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복선군 (문단 편집) === 숙종 시기 === 1674년(숙종 즉위년)에 사촌형 [[현종(조선)|현종]]이 승하하고 당조카 [[숙종(조선)|숙종]]이 즉위했다. 이후 복선군은 현종 비 [[명성왕후|명성왕후 김씨]]와 [[서인]]들의 견제를 받았다. 숙종이 왕이 될 때 나이가 불과 14세였던 데다, 흔히 알려진 강한 이미지와 달리 몸이 꽤 허약했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계유정난]]같은 사태가 생길까봐 불안했던 것이다. 현종과 숙종은 [[외아들]]이라 [[형제|남자형제]]가 없었고, 그렇다면 왕위를 넘볼만한 가장 가까운 왕족은 당숙(현종의 숙부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선군 형제였다. 더군다나 명성왕후는 서인 측인데 복선군은 [[남인]]과 가까웠으며[* 1675년(숙종 1년) 남인이 청남([[허목]] · [[윤휴]]를 수반)과 탁남([[허적]] · [[권대운]])으로 갈릴 때, 복선군은 청남에 속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106004_001|#]].], 상술했듯 [[경신대기근]] 때 구휼품을 얻어온 큰 공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이었다. 초반에는 사은상사, 변무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http://sillok.history.go.kr/id/ksa_10103018_004|#]][[http://sillok.history.go.kr/id/ksa_10208006_001|#]] 별 무리 없이 활동했으나, 복선군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복선군의 형 [[복창군]]과 동생 [[복평군]]이 궁녀와 사통했다는 고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홍수의 변’으로 부른다. 자세한 것은 [[명성왕후#s-3|명성왕후]] 및 [[경신환국#s-3.1|홍수의 변]] 문서 참조. 그 뒤 한동안 조알(朝謁)하지 않다가 홍수의 변의 여파가 잠잠해진 후 윤휴 등의 도움으로 헌관이 되어 다시 궁에 출입할 수 있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110029_003|#]] 그 뒤 다른 종친들과 함께 왕실 족보 《선원록》을 개정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http://sjw.history.go.kr/id/SJW-D05090120-02100|#]] 그러나 1680년(숙종 6년)에 [[명성왕후]]의 사촌오빠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가 “허견이 복선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고변했고, 결국 이에 엮여 절도에 위리안치 당했다가 그해 5월 10일에[* 음력 4월 12일.] [[교수형]]당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sa_10604012_007|#]] 향년 34세.[*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 [[만 나이]]로는 32세이다.] 자세한 내용은 '''[[경신환국#s-3.3|삼복의 변]](三福의 變)'''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