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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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의 손자
복선군
福善君

봉호
복선군(福善君)[1]
본관
전주 이씨
이름
남(楠 → 柟)
생부
인평대군
생모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同福 吳氏)
부인
군부인 임천 조씨(林川 趙氏)
자녀
1남[2]
묘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A]
생몰
기간

음력
1647년 8월 25일 ~ 1680년 4월 12일
양력
1647년 9월 23일 ~ 1680년 5월 10일
1. 개요
2. 생애
2.1. 초반
2.2. 숙종 시기
3. 사후
4. 가족 관계
5.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왕족. 인평대군의 5남이다.[3]


2. 생애[편집]



2.1. 초반[편집]


1647년(인조 26년) 9월 23일에[4] 태어났다. 10살에 아버지 인평대군과 어머니 오씨 부인을 잃었고, 얼마 뒤 즉위한 사촌형 현종[5]고아가 된 복선군 형제를 궁에 들여서 키웠다.[6]

공식 기록에서 처음 나타나는 건 1662년(현종 3년) 3월 26일[7] 자 《승정원일기》 기사이다. 사복시에서 복선군을 포함한 왕족 4명에게 말을 지급하려 면급마별단(面給馬別單)을 작성하여 현종에게 올린다는 내용이다.# 그 뒤로도 칙사를 맞이하는 등 국가행사에 다른 종친들과 함께 참석한 그저 그런 내용들이 있으나 #, 1666년(현종 7년) 12월 20일[8]에 제향 관련 문제로 인해 승정원의 건의로 추고받았다는 기사가 개인적인 기록 중에서는 처음이다.#

1668년(현종 9년)에는 형 복창군, 동생 복평군과 함께 사냥으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쳐 추고받았다.#

1670년(현종 11년) 12월 16일[9]에는 사은사 겸 동지정사로 임명받아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조선경신대기근으로 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겪고 있어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러 간 것이었는데, 복선군을 비롯한 사신단은 이 때 강희제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강희제#

한마디로 왕이 신하들에게 눌렸으니 나라가 그렇게 된 것 아니냐는 뜻이다. 정황상 강희제 입장에서는 조언으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 사신단 입장에서는 충분히 조선을 조롱하는 의미로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저 말을 듣고 복선군은 이렇게 답하여 조선의 체면을 지켰다.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 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 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복선군#

이렇게 강희제 앞에서도 할 말은 했던 복선군은 구휼품을 얻어서 1671년(현종 12년) 4월 21일[10]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1673년(현종 14년)에는 청나라 책들에[11] 인조반정 관련 내용이 잘못 적혔다하여 현종에게 대응해야한다고 형 복창군, 동생 복평군과 함께 상소했다.#


2.2. 숙종 시기[편집]


1674년(숙종 즉위년)에 사촌형 현종이 승하하고 당조카 숙종이 즉위했다. 이후 복선군은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서인들의 견제를 받았다. 숙종이 왕이 될 때 나이가 불과 14세였던 데다, 흔히 알려진 강한 이미지와 달리 몸이 꽤 허약했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계유정난같은 사태가 생길까봐 불안했던 것이다. 현종과 숙종은 외아들이라 남자형제가 없었고, 그렇다면 왕위를 넘볼만한 가장 가까운 왕족은 당숙(현종의 숙부 인평대군의 아들들)인 복선군 형제였다. 더군다나 명성왕후는 서인 측인데 복선군은 남인과 가까웠으며[12], 상술했듯 경신대기근 때 구휼품을 얻어온 큰 공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이었다.

초반에는 사은상사, 변무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별 무리 없이 활동했으나, 복선군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복선군의 형 복창군과 동생 복평군이 궁녀와 사통했다는 고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홍수의 변’으로 부른다. 자세한 것은 명성왕후홍수의 변 문서 참조. 그 뒤 한동안 조알(朝謁)하지 않다가 홍수의 변의 여파가 잠잠해진 후 윤휴 등의 도움으로 헌관이 되어 다시 궁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 뒤 다른 종친들과 함께 왕실 족보 《선원록》을 개정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1680년(숙종 6년)에 명성왕후의 사촌오빠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가 “허견이 복선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고변했고, 결국 이에 엮여 절도에 위리안치 당했다가 그해 5월 10일에[13] 교수형당했다.# 향년 34세.[14] 자세한 내용은 삼복의 변(三福의 變) 참조.


3. 사후[편집]


복선군이 사망한 후 며칠 뒤에 형 복창군도 사사당했으며# 동생 복평군귀양갔다. 복선군의 다른 가족들은 숙종의 명으로 연좌받지 않았으나#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1864년(고종 1년)에 고종이 벼슬을 회복시켜주었고# 1873년(고종 10년)에는 복선군 내외의 사판에 종친 출신 관료를 보내어 치제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A]에 있다.


4. 가족 관계[편집]


군수를 지냈던 임천 조씨 조시형(趙時馨)의 딸과 혼인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1864년(고종 1년)에 고종의 명으로 동생 복평군의 5남 완릉군 이경이 복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완릉군은 4남 3녀를 낳았고 후손들이 이어져서 오늘날 복선군 가문을 이루고 있다.

  • 부 : 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 李㴭, 1622 ~ 1658)
  • 모 : 복천부부인 동복 오씨(福川府夫人 同福 吳氏, 1622 ~ 1658) - 감사 증 우의정 오단(監司 贈 右議政 呉端)의 딸
    • 형 : 복녕군 이욱(福寧君 李栯, 1639 ~ 1670)
    • 형 :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1641 ~ 1680) - 삼복의 옥에 연루되어 처형됨
    • 동생 : 복평군 이연(福平君 李棩, 1648 ~ 1700) - 숙부 용성대군에게 입적
    • 동생 : 이금온(李金溫, 1654 ~ ?)
    • 동생 : 정중만(鄭重萬)의 처

  • 부인 : 군부인 임천 조씨(郡夫人 林川 趙氏) - 조시형(趙時馨)의 딸
    • 양자 : 완릉군 이경(完陵君 李烱) - 동생 복평군의 5남
    • 며느리 : 하동 정씨(河東 鄭氏) - 정심(鄭深)의 딸
      • 손자 : 하흥군 이채(河興君 李埰)
      • 손자 : 하청군 이호(河清君 李濠)
      • 손자 : 이담(李埮)
      • 손자 : 하은군 이광(河恩君 李垙)
      • 손녀 : 신처권(申處權)의 처
      • 손녀 : 김재후(金載厚)의 처
      • 손녀 : 신취문(申就文)의 처


5. 매체에서[편집]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BS 장희빈 복선군.png}}} ||
〈장희빈〉의 복선군
2002년 KBS2장희빈〉에서는 송용태가 연기했다. 실제 복선군은 30대에 죽었는데 맡은 배우는 당시 50대였다.(...) 극 초반부에 삼복의 변과 관련하여 등장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장옥정 복선군.png}}} ||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복선군
2013년 SBS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이형철이 연기했다.
[1] 봉호는 어머니의 본관지인 전라도 동복현(同福縣.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유래했다.[2]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A] A B 구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비정동.[3] 2남과 4남은 일찍 죽어서 성인이 된 아들 중에서는 3남이다.[4] 음력 8월 25일.[5] 인평대군의 형 효종의 아들.[6] 인평대군의 자녀는 총 6남 4녀이다. 그 중 2남, 4남, 3녀, 4녀는 요절했고 당시 살아있던 자녀는 총 4남 2녀였다. 큰아들 복녕군과 3남 복창군은 이미 봉군되었고 혼인했기 때문에, 1녀, 2녀, 5남 복선군, 6남 복평군이 궁에서 자랐다.[7] 양력 5월 13일.[8] 음력 11월 25일.[9] 음력 11월 5일.[10] 음력 3월 13일.[11] 《황명통기(皇明通紀)》, 《십육조광기(十六朝廣紀)》, 《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 등이었다고 한다.[12] 1675년(숙종 1년) 남인이 청남(허목 · 윤휴를 수반)과 탁남(허적 · 권대운)으로 갈릴 때, 복선군은 청남에 속했다.#.[13] 음력 4월 12일.[14]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 만 나이로는 32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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