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송 (문단 편집) == 개요 == '''北宋'''. [[960년]] [[오대십국시대]] [[후주]](後周)의 무신 [[태조(송)|조광윤]]이 후주의 공제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중국의 한족 통일 왕조. 수도는 [[카이펑시|개봉]](카이펑)이었다. 조광윤이 송주에서 절도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대송''', 연호를 '건륭'으로 정했다. 보통 북송은 960~1127년까지 존속한 167년의 역사를 말하나, 이후 [[남송]]도 1127~1279년까지 152년을 더 존속했으므로 '''송'''이라 하면 보통 960~1279년까지 총 319년간 존속했다고 여긴다. 송나라는 그 이전 [[당나라]]까지의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을 도입한, 글자 그대로 '획기적'인 왕조였다.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당시대]]에 강고한 기득권을 형성한 귀족제를 전폐하고 황제 전제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경제와 사회를 철저하게 자유화하는 대신에 정치 질서는 황제 일극 지배에 의해 유지하는 틀을 만들었다. 심지어 송대에 들어 [[유교]] 경전에 기초한 관료채용 시험인 [[과거제]]가 전면적으로 채용되고, [[당나라]] 때까지 남아있던 귀족에 의한 [[세습]]정치가 완전히 폐지된다. 나아가 '전시'라고 불린, 황제 직속으로 시험 감독을 시행하는 최종 공무원 임용시험이 자리잡는다. 이것은 시험 합격자에게 황제에 의한 은의를 느끼게 하고, 모든 관료를 황제 개인의 자식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중앙집권제]]를 철저히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바로 이것을 통해 지금까지 관리들 사이에서 사적인 당파를 만들어 자신의 파벌을 유지해 온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의 힘을 제거할 수 있었다. 더욱이 채용된 관료는 자신의 출신지에는 부임하지 못하고 수년마다 다음 부임지로 순회하는 '[[군현제]]' 하에서 경력을 쌓기 때문에 고향에서 다진 기반으로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없어졌다. 이렇게 하여 정치적인 귀족 계층의 '해고'가 완료되었다. 경제적으로도 [[귀족]]에 불리한 정책이 실시되었다. 송나라의 개혁파 재상이라고 알려진 [[왕안석]]의 청묘법(정부가 농민에게 저리로 융자해 주고 변제 때는 수확물을 [[화폐]]로 바꾸어서 갚는 것을 의무화한 [[입법]])은 국가 융자를 통해 농민에게 화폐사용이 전파되도록 한 정책이다. 모든 백성이 전통적인 물납(수확한 작물을 그대로 납입하는 것)이 아니라 농작물을 시장에서 판매하여 국가에 변제하였다. 이처럼 청묘법은 일반 서민이 상업에 눈을 뜨고 돈의 의미를 깨닫도록 고안된 것이다. 화폐는 농작물과 달리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보존하기 좋고, 급할 때는 다른 곳으로 쉽게 가지고 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열심히 일하고, 비싸게 팔고, 지금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으로 전직하고, 현재 거주하는 곳보다 더 쾌적한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이런 식으로 [[자유시장]]을 기초로 한 [[시장경제]]적 발전이 시작되면서 백성을 옥죄어 노역에 종사시키던 [[자급자족]]적 [[장원]] 경영이 성립할 수 없게 됨으로써 [[귀족]]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하고 만다. 이처럼 송대의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황제만을 예외로 둔 채 신분제와 [[세습]]제가 철폐된 결과 이동의 자유·영업의 자유·직업 선택의 자유가 널리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과거]]를 통해 관리 즉, 지배층으로 상승하는 문호도 개방된다. 남성이라면 사실상 거의 누구나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와 '기회의 평등'은 이때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면 '결과의 평등' 쪽은 어땠을까? 물론 그런것은 보장되지 않았다. 기회를 평등하게 했기 때문에 그 이후는 자유로운 경쟁만 있을 뿐이다. 장사 능력을 발휘해서 대박이 난 사람, 또는 시험공부에 열심히 몰두해 성과를 거둔 사람만이 막대한 보상을 약속받는다. 이것이 불가능한 게으름뱅이는 철저하게 사회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무능한 [[귀족]]에 의한 [[기득권]] 독점이 배제되고 어디까지나 국민 전체가 성공을 향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센티브]]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자유]]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부여되는 것은 경제활동에 대한 자유뿐으로 정치적인 자유는 (과거를 칠 수 있는 권한을 제외하면) 극히 강하게 제한되었다. 귀족을 배제하고 황제가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상 이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었으며, 황제에 반대할 '자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다수의 귀족이 운영하던 [[과두정]] 성향의 이전 중국왕조와 달리 송나라 대는 본격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황제와 그 밑의 행정관료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체계로 변화했으며 이런 황제권의 강화는 [[원나라]]의 지배를 거쳐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더욱 극대화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