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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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송
大宋

파일:songdynsty.png
960년 ~ 1127년
성립 이전
정강의 변 이후
후주
금나라
남송
별칭
북송(北宋), 송조(宋朝)
위치
중국
수도
동경 개봉부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천자)
국성
(趙)
주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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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태조 조광윤,(960~976),
2대 태종 조광의,(976~997),
3대 진종 조덕창,(997~1022),
4대 인종 조정,(1022~1063),
8대 휘종 조길,(1100~1125),

주요 재상
범중엄, 사마광, 왕안석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종족
객가, 한족
통화
교자, 송전[1]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960년 진교의 변, 건국
961년 배주석병권[1] & 금괘지맹[2]
965년 전운사 설치, 금군 강화
973년 과거제 전시 도입
975년 남당 병합
979년 북한 병합, 천하통일.
979년 1차 북벌, 고량하 전투
986년 2차 북벌, 기구관 전투
1004년 전연의 맹
1005년 《태평어람》 편찬
1041년 호수천 전투. 장방평, 천언서
1043 - 1045년 경력변법 (범중엄)
1044년 경력의 화의
1069 - 1076년 희녕변법 (왕안석)
1071 - 1073년 티베트 동북부 점령[3]
1075년 심괄, 요나라와 담판
1075-1077년 베트남 리 왕조와 전쟁(송월희녕전쟁)
1081년 다섯 진로로 서하를 공격하나 실패(오로벌하)
1083 영락성 전투, 서하 원정 실패
1086년 사마광 복귀, 신법 폐지
1078년 붕당 발생[4]
1094년 신법 부활[5]
1097 - 1098년 서하의 침공 격퇴
1102년 채경 집권, 원우당적비 건립.
1105년 채석강 시작.
1108년 청해 일대 3천리 개척[6]
1118년 해상의 맹
1120 ~ 1121년 방랍의 난
1122년 연경 공격 실패
1125년 금나라 남하, 개봉 포위
1127년 정강의 변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
2. 역사
3. 정치
3.1. 행정구역
3.2. 왕안석의 신법(新法)
4. 경제
4.1. 풍성한 경제력과 문화
5. 사회와 계급제도
6. 건축
7. 군사
7.1. 부실한 군사력
7.1.1. 보병 위주의 송군
7.1.2. 비효율적인 용병술
7.2. 재평가할 부분
8. 외교
8.1. 고려와의 관계
8.2. 근시안 외교 정책
9. 평가
10. 역대 황제
11. 계보
12. 추존 황제
13. 여담



1. 개요[편집]


北宋. 960년 오대십국시대 후주(後周)의 무신 조광윤이 후주의 공제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중국의 한족 왕조. 수도는 개봉(카이펑)이었다. 조광윤이 송주에서 절도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대송, 연호를 '건륭'으로 정했다. 보통 북송은 960~1127년까지 존속한 167년의 역사를 말하나, 이후 남송도 1127~1279년까지 152년을 더 존속했으므로 이라 하면 보통 960~1279년까지 총 319년간 존속했다고들 여긴다.


2. 역사[편집]


송 태조 조광윤은 육조시대 유송(공교롭게도 이름이 똑같이 宋이다) 이래로 계속되던 전 황제에게 선양을 받고 그 일족을 멸족하던 관행을 중지하고, 후주의 황족인 시씨 일족을 보전하며[2] 우대하는 등, 상당히 인도적인 방식으로 나라를 세웠다. 시씨 가문에 대한 은전은 태조 조광윤<석각유훈>에 따라 계속 유지되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비장했던 애산 해전으로 남송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다수의 시씨가 송 황실과 마지막을 함께 했다. <석각유훈>에 더해서 조광윤이 시씨 가문을 우대하겠다는 증거로 내려준 것이 바로 단서철권이다.

애초에 후주 자체가 단명 왕조이기도 했지만, 후한유지원 - 후주 태조 곽위 - 후주 세종 시영처럼 찬탈과 양자 상속을 거듭해 대를 이어왔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광윤은 곽위에 비해서 매우 온건한 계승을 한 셈이었다.

태조는 장수 시절부터 거란족을 물리치고 후주의 북조 전역을 완수하는 1등 공신이었으며 후촉, 남평, 광주남한과 남부 최대의 국가인 남당을 멸망시켜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자기 대에 통일을 완수하진 못했다. 제2대 황제는 조광윤의 동생인 태종 조광의로 사서에 따르면, 태조 조광윤이 조광의에게 선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조광의가 방에 들어간 다음 갑자기 조광윤이 급사하고 다음 황제가 되었다는 촉영부성의 일화는 아무리 봐도 황위 승계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촉영부성 그 자체가 조광의를 비난하는 이들의 주장이란 말도 있다. 어쨌든 송 태종은 오월북한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완수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부터 송나라는 약한 군사력에 발목을 잡히는데,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 시절에는 통일 전쟁을 완수한 고참병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아 군사력이 우수했으나, 2차에 걸친 대요 북벌이 실패하고 요나라와의 일전에서 대패를 거듭해 군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송의 군사적 약체화를 간파한 요는 200,000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 성종 야율융서가 직접 친정해 파죽지세로 전주까지 밀고 내려왔다. 송 조정은 대군의 남하에 기겁하여 금릉(난징)과 성도(청두)로 천도해야 한다는 천도론이 대세가 될 지경까지 몰렸다. 당시 황제이던 태종의 아들 진종은 심성이 여린 군주로 유명하나, 구준의 진언을 받아들여 전주에 친정하고 요 성종의 기세를 꺾는데 성공했다. 이후 전황이 소강 상태가 되자, 송과 요는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게 되었고 요군은 철퇴했다.

조약을 체결하기 직전의 송은 대단히 분위기가 좋았는데, 황제가 금군을 이끌고 친정해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성공하고 국경 방위군으로 하여금 요군의 퇴로를 끊으려 했다. 또한 요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소달람을 저격해 전사시키기까지 해서 해볼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피해 없이 황하까지 밀고 내려온 요의 20만 기마 군단은 상당한 부담이 되는 상대였기에 송과 요는 강화를 맺었다.

전연의 맹의 주요 조항은 송과 요는 형제 관계가 되며 송은 요에게 비단 20만필과 10만냥을 세폐로 지급한다는 것으로 요가 강력히 요구하는 영토 할양 대신에 재화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구매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후, 꾸준히 성장해 나가던 송에 새로운 대적이 생겼으니, 탕구트계 민족이 세운 서하였다. 원래 송과 서하는 여러 차례 충돌하긴 했지만, 온건파인 서평왕 이덕명의 재위 기간 동안은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원호가 즉위한 뒤부터 상황이 반전해 송은 호수천 전투를 비롯해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최고위급 인사인 범중엄과[3] 한기를 투입해 소모전과 지연전, 청야 전술을 펼친 끝에 간신히 전선을 유지했다. 반대로 서하는 고작 10만의 병력으로 60만 이상을 전선에 투입한 송을 몰아붙였지만, 아버지 이덕명이 받던 세폐와 조공 무역이 끊겨 수많은 도시를 약탈하고도 물자 부족에 허덕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송의 인종과 서하의 경종 이원호는 불편한 타협을 받아들이고 세폐와 조공 무역을 부활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송의 군사적 약세는 최고 지휘관 대부분이 군대를 전혀 모르는 문관 출신인데다[4] 작전에서 장군들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일이 많아[5] 패전을 자초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문제로 계속 병력을 증강해 군사비 문제가 대두하고 세폐 지급으로 평화가 유지됨에 따라 전투 경험이 부족한 병력이 양산되어 송군은 강병을 자랑하는 요와 서하에 비해 크게 부족한 약군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1127년에 일어난 정강의 변으로 휘종흠종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태종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고, 남은 세력은 항주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이후의 시기를 남송, 그 이전은 북송이라 일컫는다. 사실상 당나라 시절까지의 북중국의 한족은 선비족 계열이었으며, 문화가 가까운 요나라 및 금나라에 전부 편입되었지만 북송의 황제는 선비족 계열 지배층에서 벗어난 한(漢)나라의 직통이자 전통적인 혈연의 한족 귀족으로 그만큼 한자에 탁월했고, 오랜시간 지난 한나라조위 전통의 한족 문화를 펼쳤다. 하지만 한나라 직통이라고 부르던 북송 황제의 혈연들이 여진족의 기방에 보내지는 것은 한족들에게는 매우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북송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었다. 북송은 요나라를 제압하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금나라와 결탁했는데, 요나라의 암군 천조제와 비밀리에 관계를 맺는 등의 신의없는 외교를 단행하여 금 태종의 침공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3. 정치[편집]


파일:external/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41b84448b5b86edb41b844490ad1&name=04.jpg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6] 부분

조광윤은 당나라의 멸망 이후 거의 60년에 가까운 전란을 수습하고, 이 혼란이 나라 각지에 군벌(절도사)들이 할거하여 생긴 것이라는 판단 아래 모든 절도사를 해체하고 전군을 황제의 아래에 두며 금군을 설치하는 등 중앙집권제를 완성하였고, 과거제로 관료를 발탁해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강력한 군주제를 완성했다. 원래 과거 제도가 시행된 시기는 수나라 때지만, 진정한 관료 발탁의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송나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학자 조익(趙翼)이 송나라의 관리에 대해 평하길 송나라가 사대부를 대우하기를 매우 두텁게 하였고 재물의 하사가 실로 풍족했기에, 관직에 오른 자들은 일신의 걱정에 매달릴 필요가 없이 각자 직무에만 몰두하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어진 신하들이 대로 나왔고 관리들의 품행과 치적이 뛰어났으나, 재물을 베푸는 것이 너무 지나쳤기에 나라의 곳간을 흔들리게 만들었으므로 송나라의 제도는 법으로 삼을 것이 못 된다고 했다.[7]


3.1. 행정구역[편집]





북송은 기존의 주현제보다 더욱 효율적인 행정단위를 설치했는데 그것이 바로 (路)이다. 북송의 행정구역 체제는 로(路)-주(州)-현(縣) 체제였으며, 주를 부(府)로 승격시키거나 현을 군(軍)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3.2. 왕안석의 신법(新法)[편집]


송(북송)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법이다. 인종 이후 송은 재정상 큰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비대해진 관료제와 군대, 지주들의 토지 겸병, 대상인의 독점 행위, 세폐 문제 등이 재정 적자를 초래하여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했다. 이런 때 왕안석신종의 신임을 얻어 신법을 시행했다. 신법은 부국책과 강병책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부국책으로는 청묘법과 시역법, 모역법, 균수법이 시행되었고 강병책으로는 보갑법과 보마법이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청묘법은 20%라는 싼 이자로 농민들에게 자금을 대출해주어 자연 재해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를 구제함과 동시에 대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막음으로서 제국의 재정을 충실히 하려는 의도였다. 송대에는 호구를 따질 때 주호와 객호로 따졌다. 그 중 주호가 주 납세층이었는데 주호 또한 5개 등급으로 나뉘었다(1, 2등급이 대지주, 3, 4등급이 대부분의 보통 농민, 5등급이 영세 농민). 그러나 대지주들은 토지 장부를 위조해 은닉하기 일수여서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5등급의 영세 농민들은 세금낼 능력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3, 4등급의 농민들이 1, 2등급의 대지주의 세금까지 떠맡게 되었고, 이들마저도 몰락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대지주의 성장을 막기 위해 실행된 청묘법은 안정된 세수 확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시역법을 실시해 중소 상인들을 보호했다.

무엇보다도 왕안석이 가장 심려를 기울인 신법은 모역법이었다. 당 덕종 때 양세법이 시행되어 원칙상 양세를 제외한 잡세는 폐지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송대에도 여전히 양세법 하에 여러 잡세들이 많았다. 그 중 백성들을 괴롭힌게 '역'이었다. 일반 농민 뿐 아니라 지역의 유지들도 역을 져야 했다. 돈많은 지주야 거주지를 도시로 옮겨 역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반 농민들은 그렇지 못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따라서 왕안석은 광범위한 여론조사와 시범 운영을 통해 모역법을 시행하게 된다. 모역법은 납세층을 재산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눈 후 각 등급에 맞게 세금을 거두고, 국가는 거두어진 세금으로 역을 수행할 사람을 고용하는 제도였다. 철종 즉위 이후 사마광 등의 구법당이 신법을 폐지할 때 모역법을 폐지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안석이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왕안석의 신법은 전체적으로는 적절한 개혁이었지만 문제는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관리들이 실적만 노리며 부실 운영하는 등 많은 부작용을 낳아 결국 철종 때 구법당이 세력을 잡자 폐지되었다. 그 후 다시 신법당이 등장하지만 이때가 되면 개혁의 의지는 사라지고 오로지 정쟁을 위해 신법을 이용하게 된다. 결국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 심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백성의 실생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안타까운 결과로 그치고 말았다.


4. 경제[편집]



4.1. 풍성한 경제력과 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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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부분[8]

파일:external/c2down.cyworld.co.kr/download?fid=642241b84448b5b8ab9f41b84448b0d1&name=20080501_7ed4d3ad679d7c440803Dj0WK5SlC98f.jpg
▲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간

당나라 시대에 내전이 심심하면 발발하자, 송나라는 정반대로 문치주의를 주장하며 군사력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군사, 외교적으로는 좋지 못한 행보를 보였으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송나라는 근대 이전 중국 역사상 손꼽힐 만큼 융성했다.[9] 과거 중국 대륙은 오랜 대전쟁으로 전쟁터가 되었으나, 송나라 시대에 전 세계 무역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그 폐허를 극복하고 완전히 부활하는데 성공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진화까지 했다. 상업 수도였던 개봉은 당시에만 인구가 무려 130만여명, 남송 수도 임안100만여명이었으며 중국의 산수화성리학도 이 때 기틀이 서기 시작했다.[10]

이러한 경제력의 근원은 송나라가 당시만 해도 촌동네에 불과했던 강남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선 이런 이미지를 반영하여 오나라가 '비옥한 강남의 토지'를 끼고 어쩌구 하는데,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시기가 명나라 초기였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이지 실제론 고증 오류다. 후한 말 남양에서 강성한 세력을 지닌 군벌이었던 원술이 비어있는거나 다름없는 강남을 놔두고 중원에서 피터지게 싸우다 망한 것도 그만큼 강남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강남에 자리를 잡은 손책과 그 뒤를 이은 손권 역시 지방 군벌로 끝났거나 독자적으로 제위에 올랐지만, 당시 한(漢)의 천하에 군사적이거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심대한 영향은 주지 못했다.[11] 강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육조시대 이후로, 그것도 강북을 능가한 것은 남송 이후의 이야기이다.

파일:송대의 식량.png
송나라 대의 농경 발전

송나라때 드디어 강남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던 이유는 쌀에서 찾을 수 있다. 송 이전에 쌀은 주식이 아닐 뿐더러 강북에서는 자라기 힘든 작물이었다. 그러나 가뭄에 강하며 성장이 빠른 ‘점성도'(占城稻) 품종이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와 강남 전역에 쌀 농사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쌀 농사에서 중요한 물 때문에 수차가 개발되어 계단식 논 또한 생겼다. 게다가 이앙법의 도입으로 2모작이 가능해졌다. 이런 연유로 백성들의 경제적 부가 늘어나자 상업이 발전하였고 운송업도 같이 발달했다. 그에 따라 숙박 시설이나 여관 수리업 등 서비스업도 발전했다. 또한 수나라 시절부터 개발한 대운하를 통해 정치 중심지 화북과 경제 중심지 강남의 교통상 연계성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송은 이전 시대에 비해 강남 개발의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파일:송대의 인구 증가.png

생산력의 급증과 함께 중국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1억 명을 넘는 시기도 이 때쯤 시작되어[12], 화폐의 발전을 불러왔다. 그렇게 나온 것이 '천희통보'이나 연간 막대한 양을 찍어내도 수요를 완전히 따라잡지 못하였다. 화폐 다음 거래 수단으로 어음이 지목되었다. 원거리에서 무거운 화폐 대신 어음동이를 가져가면 되니 매우 편리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가짜 어음으로 사기를 치거나, 어음을 주니 실제 가치하고 다르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1024년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가 발행되었고 근대적 회계 방식인 복식부기를 시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일본 후지와라 정권에서도 중국의 화폐를 잔뜩 배에 싣고 와 자기네 나라에서도 썼다고 한다. 나름 동아시아 글로벌 화폐였던 셈. 한의학에서 기존과 선을 긋는 사상적 전환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였다.

상업 발달의 산물인 상인 동업 조합(행, 작)도 번성했다. 도자기 기술도 발전을 거듭했으며 문화가 발달해서 농민들은 차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찻집 같은 곳도 생겨났다. 예식을 대신 준비해주는 (요즘으로 말하면) '출장 뷔페 서비스'(!)가 있었고 기계식 물시계가 등장했으며 시중에는 음식점 숫자가 너무 많아서 맛을 넘어서 공연이나 냉난방, 배달 서비스 같은 마케팅으로 경쟁했다. 도시 내에는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간이 극장이 존재했고, 각 가정에서는 석탄을 가정연료로 썼다.

파일:송-고려 무역.png
송나라 대의 무역

또한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수출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점도 이 시점으로, 도자기의 도시 경덕진이 본격적으로 융성하기 시작했다. 외국 무역과 수출입 관리, 출입품 검사와 징세는 당나라때 설치된 시박사에서 담당하였다. 송대에는 광주를 비롯해 항주, 명주(영파), 천주, 밀주(칭다오), 화정 등 여덞 곳에 시박사가 설치되었다. 고려와의 무역은 주로 명주 시박사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의 성품이나 인심 역시 매우 후했다.

외지에서 새로 이사 와 옆집에 살게 되면 서로 도구들을 빌려주고, 뜨거운 탕과 마실 것을 갖다 주었으며, 물건을 사고 파는 일 등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 … 어떤 집에 경사나 흉사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두 몰려가 그 집을 가득 메웠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13]


서구권 학자들 역시 송나라의 경제력을 높게 평가하는데,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은 1인당 GDP를 450달러로 추산해 당시 송나라가 세계 전체 GDP 비율 중 23%을 차지한다고 추산했고,[14] 더 최근의 연구 결과에선 스티븐 브로드베리(Stephen Broadberry)가 1인당 GDP가 1,200~1,500달러 사이였다고 추산했다.[15] 참고로 산업혁명 초인 1750년 영국의 1인당 GDP가 1,710 달러, 1800년엔 2,080 달러였다.

그러나 동양학자들의 정치적인 목적과 일부 서양학자들의 '극단적인 문화상대주의' '오리엔탈리즘' 에 입각한 송나라의 경제력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송은 그리 길게 유지된 국가도 아니며 당장 방랍의 난만 해도 북송 조정의 가혹한 착취와 부정부패, 백성들의 고달픈 삶이 원인이 된 것인데 송나라 경제를 고평가할 근거가 없다. 게다가 송대 이후 중국의 경제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예컨대 화북 지방의 철강 생산량은 송대에는 35,000톤이었지만 원대에는 8,000톤으로 격감했다. 이는 철강이나 석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마 잦은 전란과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가 격감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북송 초기 송 전역의 인구가 5,000만 명이었고, 이후 정강의 변으로 화북을 점령한 금나라 후기의 인구가 여기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인구가 몽골의 침공과 흑사병을 겪으면서 1,000만 명까지 격감한다. 당연하지만 거의 4,00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모두 죽은 것은 아니고 그 중 상당수는 전란과 피난으로 통계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잔혹한 전쟁과 전염병으로 정말로 죽은 인구도 엄청 많았으리란 추측은 가능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송의 경제력은 많은 주목을 받는데, 때문에 일부에선 송대에 이미 산업 혁명의 기반이 있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송의 발달된 과학력, 그리고 산업 혁명 시기 영국과 비슷한 석탄 사용량과 제철 능력 때문에 나온 말. 그러나 산업 혁명이 단순히 석탄 사용과 제철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순화는 삼갈 필요가 있다. 애초에 흔히 주장하는 산업 혁명 떡밥이라는게 송의 석탄 사용량을 주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중국의 인구수가 예나 지금이나 많아서 그런 것이다. 석탄을 취사, 난방용으로 이용하는 건 이슬람과 유럽에서도 옛날부터 있어왔기에 송이 특별한 경우가 아닌 것이다. 심지어 중국과 비견되도 지지않을 인구와 국가규모를 지닌 로마에서도 근세 이후에서나 볼 이산화탄소량이 배출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의 수력 방적기[16]는 유럽에서 산업 혁명 과정에 쓰인 방적기와 큰 관련이 없는 데다가 실제 사용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결정적으로 송나라 시대의 중국은 유럽처럼 산업 발전에 필요한 제대로 된 증기기관이나 외연/내연기관의 발명도 없었고, 이걸 이용해 대량 생산에 응용하려는 시도도 전무했다. 애당초 '송나라 산업 혁명론' 자체가 마오쩌둥 시절 정치성 이론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중국 자본주의 맹아론 부록이나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학술적인 연구나 고찰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파생된 썰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

남송시대를 북송의 후계 구도로 보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재현으로 간주할 경우, 제1차 남북조시대가 호한체제(胡漢體制)로 이어진 것과 달리 이 제2차 남북조시대는 오히려 강남인들의 선민의식으로 이어진 원인을 북송의 높은 경제력에서 찾기도 한다. 남쪽의 한족들 입장에서 사마진 정도의 나라가 파괴당한 것은 극복 가능했지만 북송이 파괴당한 일은 정신적으로 매우 큰 여파를 미쳤다는 것이다. 이는 먼 훗날 아이러니하게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다민족국가로서의 길을 공언한 뒤에야 어느 정도 해소된다.


5. 사회와 계급제도[편집]


기존 봉건적 세습과 인맥 등으로 이루어지던 관료층들이 모든 계층이 응시 가능한 과거제로 완벽히 대체되었다. 과거제 자체는 후한 시기에 개념이 제시되었고, 수나라 시기에 처음 실행되어서 당나라 시기에 제한적•국소적으로 운영된 과거 선발 관료제가 실행되었지만, 절대 다수의 관료 기득권층은 귀족 계급에 세습되었다.

흔히 당나라 시기에 한국에서 상상하는 완벽한 선발 관료제가 정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다. 일례로 당나라의 과거시험에서 655년 한해 동안 꼴랑 44명만 합격했으며 ,이후 측천무후가 실권을 잡기 이전인 7년 동안 연간 평균은 매년 58명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물론 측천무후 이후부터 활성화되어서 매년 수백, 수천명의 과거 합격자가 나왔으나 거의 대부분은 진사 자격만 받고 지역에서 명사로 대접받는 걸로 끝이었다. 실제 관료로 임명되는 것은 1~2%에 불과했다. 잘못 적은게 아니다.[17] [18] 측천무후 사후의 평균 과거제 관료 발탁은 연평균 23명에 불과했다.출처 특히 황소의 난 이후 절도사의 흥기로 정부가 마비되면서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진 시기까지 합해서 측천무후 시기 이전보다 합격자가 적어졌다. 하지만 당나라는 정상적으로 정부가 기능할 때도 몇십명 중반대 수준의 발탁에 그쳤다.그래서 당나라 시절의 과거 제도는 어디까지나 귀찮은 인재 발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었지, 실제로 관직에 임명시키는 것은 과거 시험과 완전히 별개로 황제 개인의 호오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이런 당나라 시대의 과거제와 송나라 시대의 선발 관료제는 사실상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고, 일반적으로 시험 합격자가 관직을 얻도록 정착시킨 것은 엄청난 혁명이자 급진적인 사회 발달이었다. 이러한 혁명의 결과 수•당 시기에 지속적으로 약화되어온 관롱집단 귀족층 계급을 사실상 와해시켰으며, 부르주아 신사층으로 대체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더군다나 송은 아래로는 천민 계급을 폐지해서[19] 진정한 황제 밑의 평등을 이룩하게 된다. 이전 당나라 에서 범죄자와 외국인을 제외한 자유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긴 했으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노예로 파는 행위와 외국인과 소수민족의 노예화를 허용하면서 사방에서 대놓고 북새통을 이루는 노예 거래와 노비 세습이 이뤄져 다른 노예제 합법 중세 국가들과 근본적 차이가 없었다.

반면에 송나라에서는 사회 구조 자체를 재편해, 노예 매매 자체를 불법화하고, 자유인이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거나 스스로 노비로 전락한다는 노예 무역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실태를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시켰다. 오직 범죄로 인한 노예화만이 인정되었으며[20], 그러한 케이스도 노예 거래가 불법이니, 관아의 재판 기록으로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라고 위조하는 행위가 상당히 힘들어졌고, 송나라 이전 시기나 원나라 등 이후 시기에 보통 노예였던 종과 머슴들도 금전 고용 거래 관계가 일반적 관행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수-당은 균전제로 대표되는 정부의 가혹한 무급 강제노역과 동원을 위해 양민조차도 엄격하게 토지에 인신을 묶는 구속을 당했고, 비단 일상적인 노역과 징병외에도 농지에 인신이 묶여 대대로 태어난 땅에서 농사가 강제되고, 농지가 정부에 철저히 통제된 상황인만큼 소출마저 손쉽게 정부가 파악해서 빈번한 추가세금으로 갈취당하던 상황이였다. 실상 당나라의 양민은 국가의 농노, 심하게 표현하면 공노비였다.

반면에 송나라는 균전제를 폐지해 구 천민과 구 노비들부터 토지에 해방된 양민들까지 예외없이 국경내에서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졌다. 운신의 자유뿐만이 아니라 침해당했던 직업선택의 자유랑 재산권의 보장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음으로, 두말할 필요없이 물류와 상업과 공업의 급진적인 발전을 불러왔고, 농업조차 탁장행정식 모순인 균전제식 농지분할로 인한 비효율이 사라지고 미개간지 개간이 급속도로 이뤄지면서, 추정인구수 9세기 당나라 5~6천만명이 12세기 송나라 1억2천만으로 2배 폭증했다.

전한기 인구수추정치가 5700만명이 다수설이니 당나라까지의 800년동안 인구수 정체 혹은 퇴보를 했단 것으로, 북위~당나라기 균전제가 그만큼 농업에 해로웠단 것이다.[21][22] 육조시대에 한족 난민으로 급작스럽게 개발이 이뤄졌으나, 수당기 균전에 북중국의 인력이 묶여서 농토개발이 지지부진해진 강남지역이[23], 균전제가 붕괴해 난민이 쏫아지던 오대십국과 인력이동이 자유로워진 송에 다시 급진적인 개발이 이뤄져 강북지역의 경제력을 능가한 시기고, 연운16주랑 서량-오르도스를 각각 요나라-서하에 빼앗기고, 자연방어선이 없어 성채-인공호수 도배 무인지대 설정으로 북중국의 국토사용이 제한되었음에도, 도리어 당나라에 비해 송나라기 강북인구가 증가했다. 군대는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고, 강제동원 무급노역은 자발적 유급 고용제로 변했다. 급진적인 민권신장만이 아니라, 폭발적인 민간경제의 활황을 불러왔다.

단 유급고용은 신법으로 인한것으로 왕안석 실각후 구법당에 의해 강제노역 제도가 부활한다. 그렇다고, 노역은 당이나 송이나 거기서 거기가 절대 아니다. 당나라기 균전제는 일개 제도 따위가 아니라 행정과 국방과 경제와 사회등 대부분의 제도의 전제조건이자 바탕으로, 안사의 난황소의 난등 균전제가 와해되기 시작하자 당나라의 조세랑 인력동원제도가 붕괴되고, 급격히 쇠퇴하는등, 당나라의 국체 그 자체였다. 동원을 극대화하기위한 국가기반에 따라서 노역은 만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였다. 당나라의 강력한 대외국력투사 화려한 모습 이면에,양민의 강제노역과 징병을 효율적으로 쥐어짜는 어둠이 있었다.[24] [25]

송나라는 유교가 국본이여서 애초에 노역에 부정적이였고, 또 행정관료들이 견제감시 쿠사리넣어서 노역의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애초에 균전제를 포기한만큼 제민지배능력이 떨어져서, 당나라급 동원력은 나오지 않았다. 송나라기 크게 진보한 관료제도 불구하고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인구를 균전제처럼 통제할 순 없었다. 즉 당나라처럼 만연한 노역을 부릴려고 해도 능력이 부족했다

일본의 쿄토학파가, 남북조-수당시절을 중세로, 송나라를 근세-준근대로 보는게 괜히가 아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탈봉건적이나, 송나라에서는 재상중심제도의 운영으로 전제군주제임에도 황제는 법치주의의 구속을 받았다. 유명한 춘추전국시대 법가조차도 어디까지나 황제는 법을 초월하고, 오직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념에 그쳤는데도 말이다.

어사 유불은

"천하의 일은 천하가 함께 해야 한다.군주가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란 공화주의적 발언을 했다.

어사 방정실은 송 고종의 면전 앞에서

"천하는 중국의 천하입니다. 조종의 천하입니다. 군신, 백성, 삼군의 천하입니다. 폐하의 천하가 아닙니다."


재상 두범은

"천하로서 천하를 삼고, 개인으로서 천하를 삼지 않는 것이 만세를 지나도 바뀌지 않을 수 있다"


성리학자 서의는 송효종에게 이런 상서를 올린다.

"만일 군주가 성인이면 신하는 멍청이다. 폐하는 누구와 공명을 함께 하시겠습니까?"


성리학자 정희도 황제의 면전에서

"천하를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고는 재상에게 달려 있으니, 군주의 덕으로 성취를 경연에서 꾸짖으십시오"

라고 말하는 등 일부 위험 분자의 사상이 아닌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이상적인 사회상이 모두의 천하이고 모두가 함께 다스린다는 "공천하" "공치"의 이념이 주류를 이뤘다.

물론 이러한 구조 자체를 명백하게 법으로 못박아 놓은것은 아니나, 실제로는 송 인종이 개인적으로 관직에 임명하는 독단적 조서가 여러번 있었으나 재상이 직접 되돌려 보내면서 하나도 실행되지 않았던 등, 전체적으로 권력의 분화와 견제, 합의 과정의 중대성 등에 의해 돌아가던 시기였다.

그래서 중서성은 행정부이고, 재상은 행정부의 수장인 총리, 황제는 내각제의 대통령의 역할을 하던 매우 근대적인 정부를 구성했고, 이는 앞서의 계급간의 평등을 합치면 융커와[26] 군부의 전횡이던 독일 제국은 물론이고, 계급제 사회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빅토리아 시기 대영제국보다 나은 점이 많다.#

단 송나라의 정치 사회제도를 공화주의적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왕안석의 신법당과 사마광의 구법당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보듯이 송나라의 정치는 황제와 황제를 보필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근대 유럽이나 미국 사회처럼 유산시민계급의 정치참여는 보이지 않는다.

즉 송나라의 정치제도는 왕과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들의에 의해 주도되는 조선시대의 정치제도와 유사한 제도이며 근대 유럽보다 나은 점이 많다는 시각은 지나친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근현대 공화주의적 정치제도는 대영제국이나 독일제국 또는 미국, 프랑스같은 근대 서구권에서 유산시민계급 중심의 시민혁명과 투표권 부여를 시작으로 점차 일반 노동자 계급이나 여성들까지 투표권을 얻게 되며 발전한 제도이며 송나라의 정치제도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유학을 배운 과거급제 관료면, 유산시민계층이 아니게 되는것인가?
유학을 배우면 시민이 아니라 인신구속 대농지를 가진 봉건호족이라는 편견은 어디서 나온것인가?
조선이랑 송나라의 정치제도랑 유사하다고 하는데,막연한 이미지말고 어떤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인지 궁금하다.

인신구속 노비 대토지 향촌유력자가 주요 기득권으로 돌아가던 조선
그 대토지 향촌유력자초자 주상의 비대한 권력앞에 파리목숨일 정도로 군신간의 밸런스가 한쪽으로 쏠린 조선
강제 무급동원과 무급징병제가 골자인 조선
말기 신분제 문란과 해체과정에서도 경제적인 몰락에 그치고, 사회문화적으로 반상의 도를 중시하던 조선.

애초에 송나라의 경제-사회구조랑 조선의 경제-사회구조가 상이한데 단순히 유학을 국시로 삼았다고 동일하면..
기독교 문명인 근대 미국과 러시아제국도 유사한 사회구조를 지녔다는 공허한 말밖에 안된다.

대영제국 선거법 개정으로 유권자 비율이 14.2%로 늘은 1867년 이전엔 투표권자가 고작 5.9%밖에 안돼는 시기가 있었다.[27]

과연 이것이 송나라의 비대한 관료제가 정치에 참여하는것에 비해서 특질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6. 건축[편집]


파일:화린사 중국.jpg
푸저우에 있는 화린사 금당. 964년의 건물로, 남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파일:중국 카이펑 1.jpg
카이펑의 철탑. 북송의 수도 변경 개봉부 시절인 1049년에 건설

파일:항저우 중국 탑.jpg
항저우에 있는 육화탑. 남송의 수도 항주 임안부 시절인 1165년에 건설

파일:중국 송황릉.jpg
정저우 서쪽 50km 지점에는 송황릉이 있다. 원대에 파괴되었다. 최근들어 관광지로 정비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봉분은 방치되어 있다.

송의 건축 양식은 중세 ~ 근세 일본의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도 고려 말의 건물들을 보면 일부 영향을 받은 것이 보인다. 특히 불교 미술의 전성기로, 중국에 현존하는 수많은 목조/석조 탑들이 대부분 송대에 세워진 것들이다. 7층 이상의 다층이 대부분이고 처마 등의 장식이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명대에 유행한 벽돌 성벽도 이미 송대에 정립된 양식이니, 중근세 동아시아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고 평할 수 있다.


7. 군사[편집]



7.1. 부실한 군사력[편집]


송은 뛰어난 관료제와 중앙집권화 성공, 풍성한 경제력, 꽤 넓은 국토,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이 이상하리만치 실속이 떨어졌다. 실제 송의 국방력은 마냥 소홀했다고 보기엔 그 규모가 꽤나 방대했는데, 송나라 후기의 병력수는 무려 126만명에 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 병력은 송 인종 시기에 서류상의 병력이었고 실제 병력은 이보다 더 적다고 여겨지긴 하나, 그래도 결코 적은 규모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28] 허나 현실은 이런 규모가 무색하게 실제 전투에서 송군이 승리한 횟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특히 정복 왕조와의 전쟁에서는 상당수가 개박살이 났다.[29]

이러한 문제가 생긴 원인 중 하나는 송 조정이 당나라 이래로 무인(절도사)들의 힘이 강해져서 통제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반란까지 일으켜 왕조를 갈아치우는 사태를 경험했기 때문에[30]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무관 대신 문관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문제는 이 문관들이 전투 경험이 없고 군대를 잘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크게 기여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를 잘 모르는데다 의견도 일치되지 않아 군대의 단합이 도무지 안되었던 것. 한 예가 바로 동관[31]서희[32]이다. 반면 한·당은 이세적, 이정 같이 사령관을 무관으로 임명하거나 군대를 잘 아는 문관을 임명했기에 흉노, 돌궐과의 전쟁에서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무인들의 지위는 전대 왕조들보다 격하되었는데,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몇몇이 있다.
  • 북송의 명장이었던 적청의 옛 부하인 초용이라는 자가 부하들의 고발로 한기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자 적청은 한기를 찾아 용서를 빌려고 했는데, 정작 한기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하여 적청은 한기의 처소 밖에서 '초용은 전공을 많이 세운 호남아입니다'라고 빌었지만, 한기는 '과거시험 진사 급제도 못한 놈이 무슨 자격으로 호남아 소리를 듣는가'하며 쪽을 준 뒤, 초용을 처형했다. 이렇게 무관을 대놓고 무시하는데도 적청은 꼼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총관(당시 적청의 직위)께서는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라고 알려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한기에게 처벌받을까봐 두려워서였다.[33]
  • 진종 대에 이광보라는 자가 진사에 급제했는데 검술에 능하다는 이유로 황제에 의해 진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백성들이 검술을 좋아하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송군이 오합지졸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자면, 1126년 음력 2월 송의 지방관 중 한 명이 무슨 배짱인지 공을 세우겠답시고 애먼 지나가던 금나라 사신단을 공격했는데, 이때 송의 보병이 무려 2,000명이나 동원되었다. 그렇게 송나라 장군 이간과 보병 2,000명은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지만 황당하게도 이 사신 일행은 기병, 궁기병이긴 했지만 오히려 송군이 금나라 호위무사 17명에게 가볍게 발렸고, 금의 사신은 그대로 제 갈 길 갔다. 심지어 이때 금나라 호위 무사 17명은 중앙에 7명, 양익에 5명씩 배치하는 진까지 짰다. 사실 진을 짜고 금군의 공세를 버티며 쌈싸먹기로 들어갔으면 100% 사신 일행이 끔살당했겠지만 오합지졸인 송군은 애초에 진을 짜기는 커녕 금 기병들이 양익에서 궁시를 닐리고 중기병 7명이 대열을 짓밟자 장창으로 버티기는 커녕 멘탈 붕괴로 자기들끼리 밟고 도망가며 와해되어 버렸다. 싸우다가 죽은 게 아니다. 총 사상자가 1,000명인데 그 중 금군과의 전투로 발생한 사상자는 100명이 안 된다는 점에서 그 수준을 알 수 있다.[34] 게다가 해당 기록은 금나라도 아니고 송나라 사람 서몽신이 쓴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35]의 권36, 정강(靖康) 원년 2월에 나오는 기록으로 승리자가 멋대로 부풀린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닌 게 금은 이 전투를 계기로 송군의 상태가 영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다음해 대군을 동원해 바로 수도 카이펑을 공격하고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는 정강의 변을 일으키게 된다.

다만 이와 별개로 군사비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는데 정1품 재상의 식비 보조금은 매월 300관인데 반해 장군인 정2품 절도사의 식비 보조금은 400관이었다. 장군들의 녹봉도 등급에 따라 매월 3,000관 내지 10,000관을 받았다. 군인들의 정치,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대신에 많은 봉급이라는 반대 급부를 주었던 것이다. 송 태조가 일부 개국공신들을 쳐낼 때 피비린내 나는 숙청 대신 휘하 번진 절도사들에게 많은 재산을 줘서 권력 대신 고향에서 개인의 행복 누리며 살게 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하지만 북송 시절에는 이미 "좋은 으로 쓰지 않고, 훌륭한 인재군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고, 이 때문에 질 나쁜 범죄자들이 주로 병사가 되었기에 규율이 잘 서지 않았다.[36] 그 외 송의 군사력이 약했던 원인 몇가지와 재평가할 부분을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7.1.1. 보병 위주의 송군[편집]


송의 주력 부대는 보병이었다. 그리고 이런 보병 중심의 편제는 당시 기병 그것도 세계구급 기병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37] 거란족이나 여진족, 몽골제국 같은 유목민족과의[38] 전투에서 매우 불리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던 것이 송은 주요 목초지인 서량-오르도스와, 운남, 요서-요동을 당 말과 5대 10국 시대에 서하와 대리국과 요나라에 빼앗기면서 상실하다보니 목초지의 부족이 심각해져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게다가 송의 주적이자 잠재적 적국인 요는 송의 '기마병 부족 현상'을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군마 수출을 제한하고 서하와 여진을 협박해 이들이 송에 군마를 수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때문에 송은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군마를 구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렇게 말이 부족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송은 요의 감시를 피해 서하와 여진으로부터 군마를 수입하려 했다. 서하와 여진이 요의 보복이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자신에게 군마를 판매하게 만들기 위해 송은 이들이 판매하는 군마를 전부 비싼 값으로 사들였다. 말 한 필에 비단 수십 필을 내어주고 시세가 오르면 그에 맞춰서 비단을 더 내어 주었기에[39] 서하와 여진은 비단을 확보하려고 요의 압박을 받음에도 몰래 송에 군마를 팔았다. 어찌 보면 손해 보는 장사같지만, 송 조정은 매년 수천만 필의 비단을 수취할 수 있어서 비단보다는 군마가 더 귀중했다.

그러나 이러고도 군마가 부족해서 왕안석이 군마 부족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보마법을 시행했다. 호구마다 말을 기르게 하여 농사짓는데 이용하고 전쟁시엔 징발한 말을 기병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들어보면 그럴 듯 한데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송은 목초지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말을 기를 여건이 안되는데다 농사 짓는 말과 기병의 말은 요구되는 스펙이 다르다. 농사용 말은 소처럼 느리더라도 덩치가 크고 튼튼하며, 근력과 지구력만 좋으면 그만이지만, 군마는 덩치가 작아도 빠르고 민첩해야 한다. 그래서 보마법으로 사육한 말들을 군 부대에 보냈더니 군마로는 부적합해서 짐말로 사용하고 각 군에서 어려움을 토로했다. 현대로 치환하면 농사용 트랙터를 징발해 탱크로 개조해 쓰는 수준이다. 특히 왕안석은 중국에 평지는 많지만, 목초지로 쓰기에는 부족하다는 점을 간과한 정책을 실시하다보니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 금의 강력한 기마 군단 앞에서 송군은 열세를 면치 못했다.

다만 보병이 기병에 비해 야전에서 흔히 불리하다고 하지만 항상 보병이 불리한 건 아닌데, 예를 들면 평지에서의 대규모 야전은 보병대가 장창 등으로 진형을 구성하고 버티기 시작하면 기병대가 역으로 화력에 눌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제대로 자리잡은 궁병이나 총병이 사격하면 충분히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다. 나당전쟁 당시 기병이 주축이던 당나라군을 상대하던 신라군의 주력 병력은 장창병이었으며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들을 이용한 전술이었다.[40]

하지만 송나라처럼 지나치게 보병 위주로 전력을 짜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동력 때문이다. 보병은 기병에 비해 기동성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기동성이 우수한 기병이 불리한 장소에서의 회전에 응하지 않고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면 그만이라 보병쪽이 수동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기병 입장에선 보병이 대응을 잘해서 만만치 않다면 진형을 우회해서 보병대의 거점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병이 대응을 위해 이동하여 도착할 무렵 기병대는 이미 상황을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게 거점이 당하면 보병대는 버틸 수가 없다. 특히 전략적으로 로마처럼 바다를 끼고 있거나 이탈리아와 같이 본토의 입구 경계가 생각보다 좁거나 하는 등의 지리적인 배경이 없으면 기병에 비해 보병은 매우 불리하다. 보병을 중시하고 잘 육성하던 로마 역시 기병을 망치와 모루 같은 전술, 전략에서 핵심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보병보다 높은 전력으로 두었던 것이 사실인만큼, 보병도 기병을 막을 수 있다 정도로 생각을 해야 한다. 대전차 보병/창병이 전차/기병을 상대로 대승하거나 선전하는 사례가 있다고 항상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짓이며 동서고금 할거없이 보통은 선제공격권의 차이 때문에 기병이 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와 서하 같은 잠재적 적국들이 장성을 차지한 데다[41], 송은 국토가 크고 자연적인 장애물도 없어서[42] 적의 침공을 막기가 불리했다. 그래서 국경 지역에 여러 개의 성곽을 쌓고 방어선을 구축하긴 했지만, 기동력을 갖춘 기마 군단으로 방어선을 우회해 후방을 공격하기도 해서 적의 침공을 완전히 방어해내지는 못했다. 심지어 멀쩡히 잘 싸우던 장군을 불러다 숙청하기도 했다. 주전론자였던 악비를 처형한 게 바로 그 예다.


7.1.2. 비효율적인 용병술[편집]


총 병력 중 절반 가량인 60만명을 수도 방위를 위해 개봉에 배치했다. 당나라 시대에 절도사의 번진들이 지나치게 막강해 안록산의 난이 터지고 이후로도 번진들이 황제에게 대항했던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인데, 문제는 이로 인해 국경의 수비력이 약화되고 말았다. 국경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어쩔 수 없이 중앙군을 보내야 했는데, 자원과 시간 낭비도 있었을 뿐더러 중앙군은 변방의 지리와 기후를 자세히 알기 힘들었다. 지방군의 협조가 이루어진다면 어느 정도 개선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문제가 변방이 근본적으로 오합지졸 투성이였다. 이는 조선이 쓴 진관 체제제승방략과도 어느 정도 겹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낭비, 지휘관이 현지 사정을 잘 모름 등.

또한 군 통수권은 황제가 행사하고 추밀원으로 군대를 통제했기에 각 군의 사령관들은 자의적으로 군을 이동하거나 공세를 펼치지 못하고 추밀원의 명이 있어야 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송은 경술법을 실시해 군대에 정기적으로 인사 이동을 단행하여 지휘관과 사병과의 관계를 약화시켜 당대 절도사들의 전횡을 방지했다.

이러한 제도는 군사 반란을 막는 데는 매우 탁월했으나, 진짜 위협인 외세의 침공에 허술한 약점을 노출했다. 게다가 수내안외국경 지대에 배치하는 군사는 서류상으로는 수만 대군이었으나 실제 배치 병력은...[43] 게다가 앞서 말했듯 장수들의 반란을 견제하기 위해 장수 직속 부하들을 대폭 줄여 상하 교류를 적게 만들어 버렸는데, 이로 인해 장수들은 외세가 침공해오면 잘 적응하지 못한 환경에서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 군대로 싸워야 했다.

이런 사태는 조선임진왜란 때 재현되기도 한다. 그나마 조선에서는 군사 지휘권이 그래도 현지의 장군들에게 있긴 했다. 이거라도 없었다면 이순신이 날아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송의 군대는 병사들의 연령대도 높았다. 당시 송은 군대가 철밥통이다보니 병사들이 군대에 오래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에 들어오는 자들은 위에서 언급된 대로 소위 '질 나쁜 놈들'이었고, 그들은 결국 군대 밖 사회 양지에 발 붙일 곳이 없다는 말이니 오래 남아있으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송나라 조정 입장에서는 이 '질 나쁜 놈들'이라도 있어야 했기에 군대를 철밥통으로 만들 수 밖에. 결국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평균 연령은 높아지고 병사들이 죽은 다음에야 충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병력의 약체화를 초래했다.


7.2. 재평가할 부분[편집]


다만, 그렇다고 송이 동네북마냥 매번 털리는 군대는 아니었다. 초기에는 를 상당히 몰아붙였고,[44] 서하금나라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고 심지어는 고토를 일부 회복하는 경향도 있었다. 물론 그 이전 시대인 한 · 당이나 이후의 명처럼 유목민족들과 소수민족들을 정벌하고 주변국들의 내정에 간섭하며 주변국들을 공격하는 수준이 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질 낮은 군대와는 달랐다. 남송시대 군사력에 대한 나름의 검토. 그리고 화약 무기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였다.

또한 북, 남송 합쳐 직계 왕조로 300여년을 유지한 것도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특히 중국의 통일 왕조들 중에서 300년 이상을 유지한 건 한과 송 뿐이다.[45] 명 또한 남명을 포함하면 298년 가량 존속했지만 사실 남명 정권은 합치기에는 뭣한게 여러 지방에서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명나라 후신을 자처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서 본 개념으로, 단일 왕조가 아니었다. 때문에 망한 후 남쪽으로 이동한 다른 정권인 동진, 남송과 같은 선에서 비교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그 때문에 혼란스런 동진마저 사직을 그래도 100년 넘게 보존했는데 남명은 50년도 못갔다. 한마디로 재위한 황제들의 기간을 다 합쳐도 50년이 안되는 것이다. 청의 경우에도 후금 시절까지 포함하면 296년 존속했지만 초반에는 만주에만 머물렀을 뿐이고 중원에서는 그보다 부족한 268년 동안 이어졌다.

실제 남송금나라에 바로 망하지 않고 금나라를 포함한 수십여 국가를 멸망시킨 당대 세계최강깡패 몽골제국에게 망했다. 그것도 한방에 폭삭 무너진게 아니라 장장 40여년에 걸친 항전 끝에 몽골제국이 고생해서야 망했다. 실제 몽골제국이 전력을 다해 정복전쟁을 벌인 국가들 중 이만큼 버틴 국가는 송이 거의 유일하다.[46]

전한, 당나라, 명나라처럼 경제력 + 군사력으로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하는 강대국은 아니었어도, 송은 적어도 경제력으로 자기 나라 국방을 300여년간 유지할 정도는 되었다는 것. 즉, 송대가 문치주의였던건 맞지만 그것만 가지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견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송이 가지고 있던 지리적인 약점도 있었다. 바로 연운 16주의 상실이었다. 거란이 이 연운 16주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송과 전면 대결을 할 수 있는 국가 세력으로 성장한 부분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연운 16주는 송 이전 한족 왕조들의 북방 방어선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런데 이 요충지를 송 건국 이전에 이미 거란이 몽땅 차지해버린 것. 연운 16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연운 16주 이남에는 딱히 지리적으로 진격에 방해가 되는 지형이 없으며 화북과 강남의 평야 지대로 직행할 수 있는 루트이다. 즉 북송은 처음부터 방어상의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47] 반면 남송 때는 국토가 쪼그라들고 장강, 회수, 사천의 산맥 등 험준한 지형을 국경으로 삼게 되면서 오히려 방어에 유리해졌다.

또한 왕안석의 신법 시기 당시에도 송은 서북방으로 영토를 적극 확장하기도 했다.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던 시기였던 1068년에는 왕소가 "평융책"을 송 신종에게 제시하였고, 왕안석과 송 신종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하황 지역[48]을 수복하게 되었다.(희하개변) 그러나 이후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하고[49] 왕안석 실각 및 송 신종 사후 사마광을 위시한 구법당이 득세하자 하황지역을 다시 토번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송 휘종 재위 시 동관이 하황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토번 군사들을 궤멸시킴으로써 송 신종 때 개척하였던 영토를 다시 되찾았고, 황두회흘까지 점령함으로써 농우도호부가 설립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사실 졸전 중 송의 사례가 많이 알려져있다보니 편향적 시선을 많이 받아 그렇지, 무경총요 같은 걸 보면 이론적으로는 군사학 진보도 상당히 이룬 시대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실사용자인 전문적인 군인들이 문제라 상당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좌절을 많이 겪었다. 이점은 지나친 문치주의의 폐해라고 볼 수 있다.

또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 볼 수도 있다. 송나라를 '약체' 취급하는 관점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상기된 바와 같이 중국 역대 통일왕조의 존속기간을 비교해보면 거의 320년에 달하는 송나라의 존속기간은 한나라의 뒤를 이은 2위에 해당한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식의 사고방식으로 접근해보면 약하기는 커녕 오히려 명백히 강자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이 존속기간 동안 송나라가 주변국(특히 중국의 영향권인 동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강맹한 위세를 거의 보여주지 못한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고, 이런 면에서 송나라를 (중국 통일왕조 치고는) '군사적 약체'였다고 취급하는 관점이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송나라의 '유지력'은 충분히 강력했고, 국가의 유지력에 있어서 자국을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은 필수적 요소다. 즉 송나라의 군사력은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자국에 대한 유지력을 지탱할 수준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송의 군사력을 ①'국내의 안정성'과 ②'정주제국의 유목민 대책' 이라는 두 측면에서 다시 살펴볼 수도 있다. 먼저 국내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송나라의 문치주의는 <군벌의 발호를 막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군사력의 강화를 포기>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치주의로 인해 송나라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문치주의가 문제다' 라는 분석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송나라는 <군사력의 약화를 댓가로 중앙집권의 확립과 군벌의 탄생 방지, 국내의 번영이라는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른 장수 통일왕조인 한, 명, 당나라의 사례와 비교하면 이 점은 명백하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결국 군웅(군벌), 절도사의 발호로 멸망했고, 명나라의 멸망에도 오삼계와 같은 군벌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송나라는 강력한 외적의 공격으로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어쨌건 지방 군사력의 반란이나 배신 문제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문치주의의 결과를 군사력의 약화라는 대가를 확실하게 치른 대신, 군대에 대한 통제력과 정국 안정성이라는 성과도 확실하게 얻은 것. 송나라의 군사제도를 흔히 <반란의 위협을 막는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진짜 위협인 외세의 침공을 막는데는 허술했다>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지나치게 근대 이후 고도화된 국가를 기준으로 본 해석일수도 있다. 전근대 왕조국가의 입장에서 지방 군사력의 반란은 외세의 침공 못지 않게 진짜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 통일왕조 정도의 규모가 되면, 지방 군사력의 위협은 어지간한 외세의 위협보다 더 위험한 경우도 많았다.

무엇보다 송나라 바로 이전의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을 시작으로 지방 군벌, 특히 절도사들에게 권력을 몰빵한 결과 사회의 혼란과 왕조의 몰락으로 갔었기 때문에 송 입장에서도 쉽사리 지방군을 강화하는 선택지를 고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송이 요, 서하, 금, 원 등 외세에 시달렸기 때문에 중앙군 대신 지방군을 강화했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 당의 몰락 과정을 지켜본 송 조정에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고 보는게 맞다. 모든 정책은 항상 양날의 검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만 송이 진짜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은 군의 편제 따위가 아니라 대전략이 부재했다는 점에 있다. 북송 시절 요나라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금나라와 손잡고 요를 쳤으나 그 이후의 대응에 대해서는 깊게 고찰하지 못했고 결국 섣불리 금을 쳤다가 결과로 돌아온 것은 정강의 변으로 대표되는 카이펑 조정의 함락, 즉 북송의 멸망이였다. 그런데 남송 시절에도 금나라와 몽골 제국 사이에서 이와 같은 선택이 되풀이되고 다들 결과는 잘 안다. 송은 복수심에 상대(요, 금)를 무너뜨리는데만 혈안이 되었을 뿐 향후 또 다른 상대(금, 원)에 대한 대응 방안이 부재하거나 두루뭉실하였다. 물론 북송 시절과 달리 남송은 몽골을 상대로 40여년간 항쟁하였기에 일반화하긴 어렵겠지만 이미 만주와 내몽골, 화북 대부분을 잃고 샌드위치 신세로 축소된 금나라를 감정을 앞세워 몽골과 협공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건 사실이다. 이 역시 결과론적일 수 있지만 금의 세력 축소와 몽골의 발흥이라는 형세 및 지난 역사에 대해 송이 자세히 고찰했더라면 금나라와 협력하거나 대몽골 동맹을 맺지는 않을지언정 금을 협공하지 않고 최대한 버티게끔 놔두고 이를 방어막 삼아 내실을 강화하는 방책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반에는 금이 남송을 선공했다는 사실은 감안해야하지만 막판에는 오히려 금나라 사신이 송에게 빌었기 때문에 더욱 유연한 선택의 기회가 있기는 했다. 다만 참작의 여지가 없는 북송과 달리 남송은 금의 멸망 즈음에 몽골과의 전쟁을 고려해 장강라인 방어선을 강화하였고 이는 44년에 육박하는 방어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참작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앞의 대전략 측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건 송에게 금은 말 그대로 철천지원수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1950년 북한의 선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의 기억이 가시지 않았고, 앙금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제3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만약 실리적으로 그것이 이득이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송 입장에서 몽골은 잠재적 위협이고,(물론 몽골은 이미 서하, 서요를 멸망시키고 중동과 한반도를 유린하고 있었던 정황이 있었기에 요나라 말기의 금나라를 생각하여선 곤란하다.) 금은 실제로 북송을 멸망시킨 위협이었다. 우리는 송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알고 있으니 금을 지원하거나 최소한 놔뒀어야 이득이라는 것을 알지만, 당대 사람들에게 그것을 바라는 것은 너무한 처사라고 할 수 있다. 하다못해 금나라가 몽골의 공격을 견디기 어려움을 느끼고 바로 송과 손을 잡으려 시도라도 했으면 협력의 가능성이 좀 더 높았을수도 있었겠지만, 그나마 여력이 남아있는 동안은 먼저 송을 쳐서 국력을 회복하려 하다가 정말 막판까지 몰리고서야 비로소 손을 잡자고 제안한 것이니 남송의 입장에서는 '금과 협력하는 것이 이익이 되기는 하겠으나, 협력관계의 유지가 가능할만큼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고는 볼 수 없다'와 같이 판단했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역사의 진행과 결과를 모두 알고 있는 후대인의 관점에서야 역시 그 상황에서는 협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방치라도 해두는 것이 더 나았다고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제한된 정보로 당장 판단해야 하는 당대인에게 그만큼 객관적, 결과론적인 판단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사실 이는 결국 전근대 국가에서 '국내 안정성'과 '군사력 강화'라는 두 목표가 사실상 서로 상충되는 것이었음에서 기인한다. 당시의 기술적, 제도적 한계에서 군대를 강화시키려면 반독립적인 군사세력의 탄생을 허용해야 하고, 이 반독립적 군사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하여 정국의 안정성을 저해한다. 하지만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군사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수록 군대의 유지와 운영에서 비효율적인 면모가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봉건제 문서에서도 다뤄진 내용이지만 기술적, 제도적 기반이 갖춰진 현대를 기준으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면서도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면 된다'고 접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선택지에서 송나라의 선택은 '안정성'에 아주 높은 우선순위를 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는 과연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선택, 예컨데 안정성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군사력을 좀 더 강화시키는 등의 선택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지에 대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물론 역사적으로 '가지 않은 길'의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이 질문의 정답이 무엇인지도 아무도 답할 수 없겠지만... 송나라의 번영과 존속기간이라는 결과를 기준으로 보면 나쁜 선택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건 송나라는 이 선택의 결과로써 (보다 군사력에 우선순위를 둔) 다른 왕조들에 비해 오랜 기간 역사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무조건 오래 살아남았으니 더 강하다고 보는 것도 균형을 잃은 관점이겠지만 연운 16주를 잃은 상태로 왕조 초기부터 이미 결집된 상태의 유목제국을 상대해야 했다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조보다 오래 견뎌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두번째, 정주 제국의 유목민 대책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흔히 <문약한 송나라는 북방 유목민들의 침탈에 시달리며 돈과 외교로 평화를 사려고 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다>는 이미지가 소비되지만, 이 역시 공정하게 따지면 역대 중국 통일왕조 중에서 북방 유목민의 침탈에 안 시달린 왕조는 없다. 당장 역대 중국 왕조 중 비교적 장수한 왕조들의 사례를 보더라도 명나라의 멸망에는 북방 유목민(여진족)이 큰 영향을 끼쳤고[50] 한나라의 경우 한나라 자체의 멸망은 유목민과 무관했지만 한나라의 체제를 계승한 서진영가의 난으로 무너지고 중원을 상실함으로써 한나라가 400년에 걸쳐 구축한 체제 자체를 무너트린 것은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정주 제국에게 있어 유목민은 언제나 두려운 적이었으니 유목민에게 시달렸다는 것 자체가 곧 그 나라가 약체였다는 근거는 아닌 셈.

또한 군사력으로 유목민을 막아낼 힘이 없어 돈과 외교로 평화를 사려 했고 이 과정에서 박쥐같은 행태로 신뢰를 잃고 적을 만들었다고 하는 말 역시, 따지고 보면 원래 이이제이 정책으로 모든 정주제국의 대 유목민 대책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 송나라가 특별히 한심해서 유목제국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못하고 다른 유목제국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니라, 원래 정주제국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유목세력과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 보다는 다른 유목민을 끌어들여 상대하게 하는 쪽이 더 효율적인 선택지였던 것. 한 세력과 손을 잡고 다른 세력을 친 후 손 잡았던 세력을 배신하여 신뢰를 상실했다는 것 역시, 원래 이이제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여진족과 손을 잡고 강성한 거란족을 친 후, 그 결과로 거란족이 무너지는 대신 여진족이 성장하면 동맹을 끊고 이번엔 몽골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여진족을 견재하는 패턴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이이제이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 전략의 실행하자니 송나라의 연약한 군사력이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원래 이이제이란 시행하는 측이 명백한 우위에 있을 때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전략인데 송나라는 군사력 부족으로 인해 전략적 주도권과 정국 통제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휘둘려버린 결과 역으로 유목민들의 공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입는 상황을 자주 겪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 전적으로 송나라의 문치주의에 있다고 보기는 또 애매한 것이, 일단 송나라가 처해있던 상황 상태가 심각하게 불리했다. 본래 대 유목민 방어의 핵심 거점이어야 할 연운 16주석경당에 의해 요나라로 넘어가 오히려 유목민의 남진 교두보이자 전략적 거점이 되어버렸고 건국 초기부터 (이이제이가 쉽게 통하는) 부족 단위로 분열된 상태가 아니라 국가 수준으로 결집한 유목민 세력을 상대해야 했던 것. 즉, 문치주의를 포기하고 군사력 확충에 중점을 두었다 하더라도 송이 과연 유목 세력을 상대로 우위를 확실하게 차지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역시 결과적으로 본다면 '다른 경우보다 불리한 상황' 에서 '결과적으로 더 오래 버티는데 성공' 한 송나라의 선택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이었다, 더 좋은 다른 해결책이 있었다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리하자면, 송은 당과 오대십국의 멸망 사례를 참고하다가 지나친 문치주의가 되어버려 송나라의 군사적인 잠재력이 국력에 비해 미약해졌고, 이때문에 대외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며 군사적 방위력보다는 외교적, 경제적 수단에 의존하여 자국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는 것 자체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그러나 송이 선택한 외교적 수단은 과정만 놓고 보면 나름의 합리성과 효과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전략 덕분에 오히려 역대 다른 통일왕조에 비해 더 불리한 상황에서도 장기간 국가를 존속시키기까지 했다고 재평가할 여지도 일부 있다. '항상 얻어터지고 털리기만 했던 약체 송나라'라는 이미지는 일면 정확하지만 다른 일면에서는 과장되거나 편협한 관점으로써 역으로 지나친 군사력 지상주의에 기반하고 있거나, 평가의 기본인 '비교'를 무시하고 선입견에 부합하는 부분만을 취사선택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따지고보면 송나라뿐만 아니라 후대왕조인 명나라, 청나라도 군사력으로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송나라만 문약했다고 까이는건 부당한면이 있다. 명나라의 경우 홍무제, 영락제, 선덕제 시절에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 선덕제 시절부터 식민지로 만든 베트남에게 패하여 독립을 막지 못했으며 몽골한테 처참하게 패한 토목보의 변을 시작으로 점점 국력이 약해지더니 1550년의 경술의 변에서 몽골군에게 싸우지도 못한채 국토가 유린당했다. 1555년에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한적이 있다.[51] 심지어 말기에는 국력에서 매우 열세인 청나라에 약탈당하고 국토까지 유린당했고 나중에는 반란군조차 진압하지 못해 나라가 반란군에게 망하고 만다. 또한 청나라도 17~18세기까지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19세기 아편전쟁, 청프전쟁, 청일전쟁, 태평천국 운동, 의화단 운동 때 보여준 모습은 줄루 전쟁당시 19세기에 창과 방패들고 싸우던 줄루족보다도 형편없었으며 속국이었던 조선에도 대놓고 무시당하는 굴욕을 겪는다.


8. 외교[편집]



8.1. 고려와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려-북송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2. 근시안 외교 정책[편집]


부실한 국방력에 가려진 송나라의 진짜 문제. 부실한 국방력을 메꾸기 위해 송나라는 문인들이 외교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물론 의도는 좋았지만 방법이 한참 잘못되어서 외교책이랍시고 수를 내놓을 때마다 나라를 절반식 말아먹었다.. 이게 송이 화를 자초한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 실제적인 사례는 후술되어있는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52]

처음에는 연운 16주를 차지한 요나라를 해결하기 위해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안 고려에서는 사신을 보내 여진은 믿을만한 족속이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송은 듣지 않았다. (애시당초 송이나 고려나 서로서로 못 믿을 놈들로 취급했으며 이이제이를 해댔으니 맞는 말을 해도 저게 이간질인지 진짜인지 둘 다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리고 송과 금 연합군이 요를 무너뜨렸을 때, 양국간의 이해 문제와 외교적 불협화음이 심화되었다. 송은 약속한대로 요를 공격했지만, 요의 잔당에게 패전했다. 결국 송은 자신들이 차지하기로 한 연운 지역의 공략을 금군에게 '의뢰'하고 그 대가로 물자와 재화를 제공하기로 했다.

금은 의뢰를 성실히 이행해주었지만, 점령지의 인력과 물자를 죄다 챙겨가고 송에게는 빈 껍데기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송에게 외교적인 양보를 강요하고 장난질을 쳤으며 계속해서 물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반대로 송은 금의 행위에 분노하여 요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금에 반기를 든 요의 잔여 세력을 수용하는 등의 행위를 하여 금의 수뇌부를 불편하게 했다. 이렇게 양국은 서로 신의 없는 외교를 지속했고, 결국 금이 선제 공격을 가했다. 송이 요나라 잔당을 제압하지 못하는것에서 송의 군사적 약세를 확인한 금군은 하북을 유린했고 끝내는 개봉을 함락시켰다. 송은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는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며 나라 반쪽을 잃었다. 그러나 송은 멸망하지 않고 남천하여 회수와 사천 일대를 사수했다.

그런데, 그 전략을 남송 때 썼다가 이번엔 아예 멸망까지 당했다. 다만 이 경우는 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이, 남송 문서에서도 보듯 금나라가 먼저 남송을 공략해 몽골에 대항하려 했다. 즉, 남송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기에는 금나라에 세폐를 끊는 정도에서 대응하던 남송은 결국 금의 멸망이 분명해지자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금나라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전략으로 벌충한 시간을 통해 양양 공방을 우주방어로 30년간 지연하며 막을 수 있었다.


9. 평가[편집]


송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가질 수 있는 나라다. 경제적으론 상당히 융성했고, 사회도 매우 개방적인 분위기였으며[53] 이를 기반으로 각종 문화들이 무르익기 시작한 시대였다. 서민 문화도 발달해서 그래서 그런지 송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많다. 수호전, 금병매 등이 대표적이고 건축적으로도 이전 시대에 비해서 구조가 복잡한 누각 등이 많이 출현하고, 의장 면에서 풍부해졌다. 당송팔대가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 문학 또한 융성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중앙집권화가 이뤄지고 꽤 안정되어 유교적 이상에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시대였다는 것은 특별히 부정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냥 대충 봐도 정치적으로 뭔가 문제가 크게 꼬여서 사단이 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일단 권력을 전횡하는 환관도 별로 없었고, 황제의 힘을 넘보는 황후도 없었다.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송휘종동관(童貫)이라는 환관이 방랍의 난의 시발점이 되기는 했다. 당나라 시절 국토를 어지럽혔던 절도사와 같은 지방관의 난도 거의 없었다.

특히 송은 잔혹한 혹형이 이전, 이후 시대보다도 오히려 훨씬 적었다는 것은 큰 특징이다. 송 이전인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당나라, 오대십국시대의 막장 행각을 보고, 송나라의 뒤를 이은 원나라·명나라·청나라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들을 생각해보자.[54] 물론 정적 제거나 당쟁 같은 게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피비린내는 훨씬 덜 나던 시대였다. 송태조의 석각 유훈에도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남송 문서에도 나오듯이, 국가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전조의 황족(후주의 시씨 가문), 사대부, 장수, 병사, 일반 백성들이 모두 끝까지 조정을 따라서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애산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할 정도로 체제가 안정되고 그 단합력이 강력하였다.

그래도 송나라 이전의 나라들 중 비교할 법한 나라는 역시나 당나라인데, 문무에 고르게 편승된 과거 제도도 본시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가 확립했으며, 당나라 말기 지주전호제와 유사한 토지 제도의 영향도 송나라에 꽤 보인다. 뿐만 아니라 지공거 체제도 당나라와 송나라가 비슷하며 빈공과 역시 송나라가 그대로 계승했다. 대신에 당나라의 경우는 정복 전쟁을 활발하게 벌였다는 점과[55] 송나라는 꽤 주춤했다는 점이 차이고[56], 반란의 빈도는 오히려 군사력이 강했던 당나라가 훨씬 심각했다는 점도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반란을 줄이려 시행한 여러 조치들이 송나라의 군사력 약화를 가져왔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

물론 허약한 송의 군사력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그래도 북송에 비해 남송은 몽골을 상대로 멸망하긴 했지만 첫 침공을 받은 후 40년 동안 상당히 선전했다.[57] 두 번째 침입 때는 몽골의 몽케 칸이 직접 나섰으나 도중에 병사했다. 몽골 주력 부대의 침공을 받고도 이처럼 오래 버틴 나라는 매우 드물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송의 군사력이 부족한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반대로 당시 북방 민족들의 전투력이 너무 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송나라의 군사력을 마냥 저평가할 수 만은 없는게, 세계 최초로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쓴 군대가 송나라 군대라는 점은 분명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이때의 화약무기는 흔히 생각하는 대포 같은 건 아니었다.

중화권에선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 통일 왕조였던 명(明)이 막장 황제들로 인해 중기와 말기에 실망스러운 행보를 꽤 보였기 때문인지, 한족 왕조 중 송을 은근히 더 쳐주는 분위기도 있으나 최근에는 명도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명이 암군들 때문에 과소평가 받는거지 국력 자체는 상당했던 나라고 후에 해금령을 내려서 그렇지 초창기에는 나름 국제사회에 관심이 있어서 동아프리카까지 사람을 보낼 정도였다.

지역별로 평이 좀 갈리긴 한데, 중국 본토의 경우 송의 경제력이나 문화력 등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아직은 정강의 변이나 몽골 제국에게 치욕을 당한 것 때문인지 특히 한족주의자에겐 저평가 받는 부분도 있다. 오히려 대만 지역에서 문화 부흥 운동으로 송나라를 높게 쳐주는 편. 판관 포청천 관련한 작품들이 그 예로 이는 송나라의 치세를 가장 잘살린 매체로 알려져있다. 중국 본토 매체에선 보통 송의 영웅이 찌질한 황제에게 탄압받는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포청천의 경우는 성군과 충신이 둘 다 맞물려 신임을 두텁게 받는 것으로 나온다.

이 시기에는 법의학수학 등의 학문이 발달했고, 기계공학도 발달해서 소송(蘇頌)이 거대한 자동물시계를 만들었는데 톱니바퀴(물레)를 사용한 것이어서 자명종과 유사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고, 원대에 이르러 그러한 혁신들은 법의학만 남고 수학은 쇠퇴했다.

한편, 송은 명나라와 더불어 조선 왕조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편찬된 대학연의가 조선 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과거제도 송나라의 과거 제도를 조선 왕조가 완성시켰다. 주자학과 강목체 역시 조선 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형법 역시 송나라의 제도를 많이 참고하였다. 물론 조선은 이후에 등장한 명나라의 영향도 송에게 받은 영향 못지않게 많이 받게 된다.[58]

사실 여러모로 아쉬운 시대인게 유일한 문제였던 국방의 경우에도 상술했듯 석경당이 팔아먹은 연운 16주의 부재에서 비롯된 현상이였다. 내치가 뛰어났던 송이 후대의 명처럼 만리장성을 방어막 삼을 수 있었다면 동양사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갔을지 궁금증이 남는 대목이다.


10. 역대 황제[편집]


황제 재위 기간에 연호가 여러 차례 바뀐 관계로 명이나 청처럼 연호를 붙여서 "XX제" 형식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대수
묘호
이름
연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01
태조(太祖)
조광윤
(趙匡胤)
건륭(建隆, 960년 ~ 963년 11월)
건덕(乾德, 963년 11월 ~ 968년 11월)
개보(開寶, 968년 11월 ~ 976년 12월)
960년 2월 4일
976년 11월 14일
16년 284일
영창릉(永昌陵)
02
태종(太宗)
조경(趙炅)
[59]
태평흥국(太平興國, 976년 12월 ~ 984년 11월)
옹희(雍熙, 984년 11월 ~ 987년)
단공(端拱, 988년 ~ 989년)
순화(淳化, 990년 ~ 994년)
지도(至道, 995년 ~ 997년)
976년 11월 15일
997년 5월 8일
20년 174일
영희릉(永熙陵)
03
진종(眞宗)
조항(趙恒)
함평(咸平, 998년 ~ 1003년)
경덕(景德, 1004년 ~ 1007년)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년 ~ 1016년)
천희(天禧, 1017년 ~ 1021년)
건흥(乾興, 1022년)
997년 5월 8일
1022년 3월 23일
24년 319일
영정릉(永定陵)
04
인종(仁宗)
조정(趙禎)
천성(天聖, 1023년 ~ 1032년 11월)
명도(明道, 1032년 11월 ~ 1033년)
경우(景祐, 1034년 ~ 1038년 11월)
보원(寶元, 1038년 11월 ~ 1040년 2월)
강정(康定, 1040년 2월 ~ 1041년 11월)
경력(慶曆, 1041년 11월 ~ 1048년)
황우(皇祐, 1049년 ~ 1054년 3월)
지화(至和, 1054년 3월 ~ 1056년 9월)
가우(嘉祐, 1056년 9월 ~ 1063년)
1022년 3월 24일
1063년 4월 30일
41년 37일
영소릉(永昭陵)
05
영종(英宗)
조서(趙曙)
치평(治平, 1064년 ~ 1067년)
1063년 3월 1일
1067년 1월 25일
3년 331일
영후릉(永厚陵)
06
신종(神宗)
조욱(趙頊)
희녕(熙寧, 1068년 ~ 1077년)
원풍(元豊, 1078년 ~ 1085년)
1067년 1월 25일
1085년 4월 1일
18년 66일
영유릉(永裕陵)
07
철종(哲宗)
조후(趙煦)
원우(元祐, 1086년 ~ 1094년 4월)
소성(紹聖, 1094년 4월 ~ 1098년 5월)
원부(元符, 1098년 6월)
1085년 4월 1일
1100년 2월 23일
14년 331일
영태릉(永泰陵)
08
휘종(徽宗)
조길(趙佶)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10월)
중화(重和, 1118년 11월 ~ 1119년 2월)
선화(宣和, 1119년 2월 ~ 1125년)
1100년 2월 23일
1125년 1월 18일
25년 329일
영우릉(永祐陵)
09
흠종(欽宗)
조환(趙桓)
정강(靖康, 1126년 ~ 1127년 4월)
1125년 1월 19일
1127년 1월 9일
1년 355일
영헌릉(永獻陵)


11. 계보[편집]




12. 추존 황제[편집]


묘호
시호
이름
비고
능호
성조(聖祖)
상령고도구천사명보생천존대제
(上靈高道九天司命保生天尊大帝)
조현랑(趙玄朗)
진종 추숭, 도교의 신
-
희조(僖祖)
입도조기적덕기공의문헌무예화지효황제
(立道肇基積德起功懿文憲武睿和至孝皇帝)
조조(趙朓)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흠릉(欽陵)
순조(順祖)
혜원예명황제
(惠元睿明皇帝)
조정(趙珽)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강릉(康陵)
익조(翼祖)
간공예덕황제
(簡恭睿德皇帝)
조경(趙敬)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정릉(靖陵)
선조(宣祖)
소무예성황제
(昭武睿聖皇帝)
조홍은(趙弘殷)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영안릉(永安陵)
-
황고복안의황
(皇考濮安懿皇)
조윤양(趙允譲)
영종 추숭, 영종의 생부
-


13. 여담[편집]




[1] 태조대의 송원통보(宋元通寶) 등 수많은 동전들이 발행되었다. 동전명의 앞부분은 주로 각 황제의 연호가 붙으며 ~원보(元寶), ~통보(通寶), ~중보(重寶)로 끝난다.[2] 설정인지 진짜인진 모르겠으나 《수호지》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이 이 후손들 중 하나로 작중에서도 그 사실이 언급된다.[3] 범중엄은 서하의 군대를 여러 차례 격파하고 송의 통치를 받는 티벳계 민족들을 잘 위무해 명성이 높았다.[4] 대표적인 예시로 영락성 전투에서 서하군과의 난전 중 전사한 서희.[5] 오로벌하 때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는데, 이는 패전의 주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6] 후에 이를 모티브로 한 청명상하원이 건설되었고, 이 곳에서 <대송동경몽화>가 공연된다.[7] 《이십이사차기》 권 25 <송사>.[8] 길이만 5m에 달하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북송 시기 한림학사였던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그림으로서, 당시 상업이 발전하여 '불야성'(不夜城)이라고도 불린 송의 수도 개봉(카이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영역 세계사 문제에서 자주 출제되기로 유명한 그림 중 하나다. 송나라 관련 기출 문제 중에서 그림으로는 단연 1위다.[9] 근대 이후로 넓혀 보더라도 당대 중국인들의 생활은 근현대 중국인들보다 훨씬 윤택했다. 몰락할대로 몰락하여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털리고 뼈만 남은 말기의 청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군벌들이 미쳐 날뛰며 전쟁만 일삼던 북양정부, 심심하면 찾아오는 기근과 일본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진 국민정부,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병든 초기의 중국까지, 근현대 중국인들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속에서 세계사의 전쟁들을 모두 치르며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갔는데 북송시대 중국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10] 다만,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집대성되어 관학화되기 시작한 것은 남송주자때의 일이다.[11] 실제 지도상으로는 삼국시대의 위나라와 오나라의 영역이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당시 강남은 화북에 비해 개발이 더뎠고 오의 지방 행정력이 약했기 때문에 위의 국력을 통상적으로 오의 2~3배로 본다.[12] 다만 행정력의 한계로 실제 송나라가 파악한 호적상의 인구는 46,734,784명에 불과했다.[13] 모든 이가 이런 건 아니었다. 빈부격차로 거지나 도둑이 생기거나 부자의 자녀를 납치해 몸값을 받거나 하는 문제도 있었다. 《수호지》의 배경도 북송 말기이다.[14] https://en.wikipedia.org/w/index.php?title=List_of_regions_by_past_GDP_(PPP)&oldid=272230369#1000.[15] http://www.nuffield.ox.ac.uk/users/broadberry/China8.pdf. 양측 자료 모두 1990년 달러가 기준이다.[16] 《왕정농서》에 14세기 수력 방적기가 실려 있다.[17] 다만 이것만으로는 근거로 제시하기에 어렵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도 과거제가 이상하게 돌아간 나라로 여기에서도 과거에 합격해봤자 진사나 생원 칭호만 받고 끝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18]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워낙 과거급제자가 많아서, 수용한계를 넘어섰기에 명예만 주고 돌려보낸것으로, 당나라처럼 대부분의 관직을 관롱집단 귀족층의 세습으로 내주느라, 남은 짜투리 하급직이나 실속없없는 계륵을 과거급제자에게 던져준것과는 완전히 다르다[19] 그러나 송나라 이후에 들어선 명나라 때부터 악호(樂戶),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들이 다시 생겨났다. 이들이 생겨나게 된 유래는 원나라가 절강을 점령한 이후 남송 백성들을 징벌하여 육지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나 아니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자신의 적수인 장사성의 부하들에게 대대로 타민이 되어 배 위에서 살아가라는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들 중에서 악호는 원래 명나라 초기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빼앗기 위해 정난의 변을 일으켰을 때, 건문제 편에 섰던 관리의 후손들인데 영락제가 승리하자 그들의 자녀들이 교방사로 끌려가 악호나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타민들은 나중에 육지에 사는 것을 허락받기는 했지만 옷차림과 가옥 등에서 모두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규모가 작은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을 뿐, 지식인이나 농민이나 장사꾼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타민들은 글을 읽지도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으며, 양인과 결혼하지도 못했다. 출처: 《중국을 말한다》 14권 248~250쪽[20] 다만, 오늘날에도 범죄자의 강제노역 즉, 징역은 전세계 보편 사항이니 이걸 노예라고 함은 애매하다. 애초에 당시에도 이들을 노예라고 부르지 않고, 노비라 일컬었다[21] 오-동진-유송-남제-양-진의 육조시대부터 수당 육백년동안 상전벽해에 가까울만큼 강남지역 개발이 이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런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부분의 균전이 정부의 행정력 투사가 용이한 북중국=강북지역에 설치되어서 북부가 그 폐해를 크게 입었기 때문에 상쇄되었던것.[22] 물론 그 사이에 황건적-군벌난립-삼국-위진-오호십육국의 개판이 있었으니 관대하게 이 시기를 빼면 600년이긴 하나.. 그런식으로 따지면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오대십국으로 송나라도 할 말이 많다.[23] 그래도 수양제의 대운하와 해상실크로드로 인한 물류-상업의 발달로, 수당기 지지부진한 강남 농지개발과 달리 물류요지를 따라 강남의 도시는 발전했다.[24] 하지만 균전제는 미성숙한 수당기 관료제의 한계에서 행정력을 효율적으로 뽑아내는 묘책이기도 하다. 중원은 자연방벽 없이 광활한 유라시안 스텝에 둘러쌓여있어, 지구상 어느지역보다 기마민족의 압력이 심대하다. 영국이나 일본같은 섬나라면, 혹은 고대말-중세초를 제외하면 기마민족으로부터 자유롭던 서유럽이면.. 하다못해 대초원과 닿는 면적이 작고,무수한 자연방어선이 겹겹히 쌓여져있고, 자연방어선을 넘을때마다 정주화-현지문명 수용도가 높아지는 거름망으로 기능하던 중동-동유럽이면 모를까, 당나라에겐 제민지배는 생존을 위해 필수로 갖춰야됐다. 자연국경선 없이 수천킬로미터로 열린 국경선을 근대의 전차군단에 비견되는 기동력을 가진 기마민족으로부터 지킬려면 최소한의 조건이 수십만명을 상비군으로 유지하고, 유사시에 수십만명을 추가로 징집할 동원력이 필요했다. 유럽이나 중동이나 일본처럼 소수정예 엘리트 군사집단에 포커스를 둘 수 없었다, 그러면 한줌의 정예병을 무시하고 후방으로 침투해서 국토를 점령하면, 정예병들은 유지비용을 지불할 물자공급이 안돼서, 와해되거나 오합지졸로 전락하기 마련이다.[25] 즉 균전제는 경제-기술발전을 깎아먹으나, 당장 동원력과 세수를 몇배로 뻥튀기하는 부작용대비 효과가 좋은 방책이다. 당장의 힘이 없어 국방을 못 지키면, 발달을 깎아먹는 이상의 오호십욱국식 문명후퇴가 올 수 있다. 실제로 당나라는 그 힘으로 초원에서도 그 몽골외엔 비교대상이 없는 강대한 돌궐제국을 멸국시키고 일시적으로나마 몽골고원을 장악해 총독부를 세우고, 예상 불가능하게 등장한 강력한 외적인 토번제국을 (안사의 난 이전까진) 역으로 밀어붙였던 것처럼, 중화제국 역대황조중 외적의 압박을 가장 성공적으로 대처했다.그리고 군사력으로 타림분지를 넘고, 트란스옥시아나까지 넘어서. 박트리아까지 진출해 실크로드를 쥐어 무역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과 서역 학문과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 균전제로 희생된 발전을 어느정도 만회했다 .물론 안사의 난 이후엔 외적이든 실크로드든 모두 물거품이 되긴 한다.[26] 독일의 융커들은 다수의 농노와 영지를 거느리고 18, 19세기까지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독일 융커 지주들은 토지를 매매하면서 거기에 구속된 농노들도 같이 그 소속을 변화시켰으며, 이들에게 예속된 농노들은 생산수단인 토지에 예속되어 있는 경제적 구속은 물론이고 융커 출신인 비스마르크가 젊은 시절 자신이 보유한 농노들을 무장시켜 독일 의회를 공격하려 했듯이 인신적 구속 또한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7] 기준은 당연히 국제적 기준의 미성년자랑 외국인 거주자는 빼고 산출한 비율[28] 이게 대단한 이유는 당장에 수나라도 100만 대군을 진짜로 운용했다가 망했기 때문이다.[29] 다만 이건 송나라만의 특징은 아니다. 유목민족들은 강력한 전투력으로 한족 국가나 중국 통일왕조, 한국사 국가들을 터는 것이 매우 빈번했다.[30] 당장 송나라 태조인 조광윤부터가 이런 방식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송나라 건국 초기에도 절도사가 반란을 일으킨 사례가 있었다.[31] 다른 환관들과는 달리, 이헌을 따라 서북방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후 청당(칭하이 지역)을 개척하고 서하, 강족 및 토번과의 전쟁을 주도하는 등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났다.[32] 왕안석의 신법파였고 1082년 서하와의 접경 지역에 영락성을 쌓을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병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고 이듬해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난전 중 전사했다.[33] 다만 초용의 죄목이 군량 착복에 군수물자 횡령이라는 중죄이니 한기는 잘못이 없고 초용과 적청의 잘못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핀트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전근대의 중국은 엄격한 법치주의 국가도 아니었고, 과거에 세운 전공 등을 감안해서 처벌을 면하거나 경감하는 것도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한기 또한 법치주의적 관점에서 적청을 반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기의 말대로라면 '진사 급제한 호남아'는 똑같은 죄를 지어도 처벌을 면하거나 경감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설령 현대 법치주의적 관점을 적용해서 초용, 적청이 잘못했다 쳐도, 한기가 한 말은 '공로를 세워도 가방끈이 짧으면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문인우월주의 및 무인경시사상이 내포된 막말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무신정변을 보면 알겠지만 이 역시도 무인에 대한 천대로 벌어진 일임을 감안해 보면 송나라판 무신정변이 일어나도 할 말이 없다.[34] 굳이 변명하자면 이때 투입된 병력은 그나마 전투력이라는 걸 갖고 있기라도 한 중앙군도, 변방수비군도 아닌 그냥 밭갈다가 끌려나온 민병들이기는 했다.[35] 송과 금 양국간의 전쟁 및 평화교섭을 기록한 책[36] 다만 이러한 점은 비단 북송 시절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역대 중국 왕조들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장군인 척계광이나 청나라의 장군인 증국번이 거느린 군대가 정예로 유명했던 것은 엄격한 군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군대에는 순박한 농촌 청년들만 병사로 모집을 했고, 도시의 불량배나 범죄자들을 병사로 받지 않아서 군기가 엄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근대 유럽, 특히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병 지원자들 중에 범죄자의 비율이 높아(해군의 경우는 감형을 조건으로 끌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군기가 엄격했고 태형 등 체벌이 성행했다. 현대에도 나름 명예로운 경력으로 취급받는 미군이나 중국 인민해방군조차 신체는 건강할지언정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할 수 없는 청년들로 채워지고 있고 자위대는 그냥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수준이다.[37] 당장 송과 비슷하게 문관 우대 정책을 펼친 고려만 해도 결코 기병이 약한 나라는 아니었으나, 상대평가에서 밀리다 보니 여요전쟁처럼 상대 기병과의 야전은 최대한 피하고 산성에서 버티다 추격할 때 기병을 운용하는 전법을 주로 구사했다.[38] 사실 여진족은 완전한 유목민족이라고 보긴 좀 애매하긴 하다. 농사를 짓고 어업을 하는 정착 생활도 했기 때문. 굳이 분류하자면 반 유목민족 정도 된다.[39] 당시 서하와 여진에는 비단이 생산되지 않기에 비단은 고급 옷감이었다.[40] 비슷하게 스코틀랜드 왕국도 보병 중심이기에 강력한 기병을 보유한 잉글랜드 왕국에 맞서 싸우려고 장창병을 이용한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41] 연운 16주는 거란족의 요가 차지하였고, 하서주랑은 탕구트족의 서하가 차지함[42] 사실 명나라 시대에는 멸망할 때까지 산해관에 주둔한 명군이 중원에 청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때는 석경당이라는 매국노 때문에 연운 16주를 잃었을 때라 그 만리장성과 산해관이 없었고 보병만으로 도저히 요나 금의 기병을 막을 길이 없었다.[43] 사실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외침을 막으면 내란에, 내란을 막으면 외침에 취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후한 말의 삼국시대야 중원 왕조의 압도적인 국력 덕분에 변방의 유목민족들이 침공할 엄두를 못내었고 삼국이 서로의 주력을 내전에 투입하면서 변방군으로 유목민족을 막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유목민족들이 대오각성한 후에는 통일 서진 제국은 이미 내란으로 허약해진 상황이었고 이를 알아차린 유목민족의 공격에 바로 무너진 것처럼.[44] 사실 요나라 시절부터 송이 북방 민족에 시달렸다는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요는 200여년간 송의 영토를 정복한 역사가 거의 없다. 전연의 맹의 경우에도 내용에서 보듯 송의 황제가 형이고 요의 황제가 아우이듯 그렇게 굴욕적인 화친 조약 수준은 아니다.[45] 물론 북송과 달리 남송의 경우 정통 왕조일지언정 통일 왕조로 보기는 어렵다.[46] 이미 저 멀리 동유럽, 중동 원정은 송 멸망 훨씬 이전인 1250년대에 거진 마무리되었음을 상기하면 코앞의 남송이 오래 버틴게 대단한 것이다. 이러한 남송 원정에서의 국력 소진 및 늦은 통일은 원의 일본, 베트남 원정 실패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47] 이 때문에 연운 16주를 넘겨준 후진의 시조 석경당의 평가는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매우 나쁘며 아예 그를 한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나마 장안과 낙양은 수비에 유리한 지형이지만 북송의 수도 개봉은 말그대로 개활지 한복판이라 기병을 가진 대 유목민족 방어에 몹시 취약했다.[48] 오늘날 칭하이 호 일대로, 안사의 난 이래 토번국에 점령당했으나 당 선종 때 회복하였다. 그러나 장의조 사후 다시 토번에 점령당했다.[49] 1081년 이헌. 충악. 왕중정, 고준유, 유창조를 필두로 5로를 통해 서하를 정복하고자 했으나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않고 군량 문제가 심각하여 실패했고 1083년에는 영락성을 신축하여 서하를 정복하고자 하였으나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실패했다.[50] 명나라를 직접적으로 멸망시킨 것은 이자성의 난이지만 숭정제 당시 명나라가 농민반란을 변변히 진압하지 못한 데에는 명청전쟁으로 인하여 주력 정예군과 유능한 지휘관들이 요동의 대청전선에 묶여있던 영향이 컸다. 즉 명나라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 여진족은 아니지만, 그 마지막 타격을 받고 쓰러지기 직전까지의 상황에 몰아넣은데에는 여진족의 영향이 막대했던 것.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에 의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산해관은 수도 북경에서 불과 300km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요동 방어선의 핵심이자 사실상의 최종 방어선이라, 만약 뚫린다면 그 자체가 사실상 국가 멸망 일보직전 상태 돌입이다. 즉, 돌파당하지는 않았더라도 지속적으로 산해관에 공격이 가해진다는것 자체가 명말의 위기상황을 보여주는 한 지표라는 것. 게다가 꼭 여진족의 예가 아니더라도 토목의 변과 같은 대 몽골 전선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 한족 계열 통일왕조로써 꽤 강성한 편이었던 명나라 입장에서도 북방 유목민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51] 출처[52] 특히 여요전쟁 당시 요의 침략을 당한 고려가 송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송은 거절하였다. 하다못해 고려는 송에 물자지원이라도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송은 그것마저도 거절했던 것이다. 그것도 무려 3번의 여요전쟁때마다. 당연히 고려에서는 이 일로 인해 송을 신뢰할수 없는 국가로 보게 되었다. 나중에 송은 고려를 돕지 않은 대가를 제대로 치루는데 금에게 국토의 절반을 빼앗겨서 남송이 되었을때 고려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이미 송을 불신하는터라 바로 거절했다.[53] 이는 문화대국으로 손꼽히는 당에 비해서도 가지는 강점인데 당나라의 경우 생각보다 수도 장안성의 통제가 꽤 심했다. 반면 송의 카이펑은 그러한 제약이 거의 없었고 한밤 중에도 불야성을 이루었다.[54] 특히 명나라와 청나라는 말기까지도 잔혹한 고문과 형벌이 폐지되지 않고 그대로 실시되었다. 명나라를 본받기 좋아하던 조선조차 명나라의 잔혹한 형벌을 싫어하여 형벌만은 본받지 않고 왠만하면 잔혹한 혹형을 시행하지 않았다.[55] 다만 당나라도 나중에 가면 국력이 약화되면서 정복전쟁을 못하게 되었다.[56] 사실 송나라도 적국인 서하에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서하를 정복하려 무려 31만 명의 대군을 보내 공격했었을 만큼, 정복 전쟁에 꽤나 적극적이었다. 다만 당나라보다 군사력이 약해서 그런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 문제이지만.링크[57] 다만 명목상 40년이고 실제 교전이 있었던 시간은 오고타이 칸 시기에 6년(1235-1241), 몽케 칸 시기에 3년(1256-1259), 쿠빌라이 칸 시기에 12년(1267-1279) 이렇게 총합 20년 좌우였다. 게다가 교전이 없는 기간에 송나라는 따로 전쟁이 없어서 전력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몽골은 그동안에도 서부 원정, 그리고 후계자 문제로 인한 내전 등을 벌여야 했다.[58] 당장 조선의 용포와 관복은 명나라 용포와 관복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으며 경국대전 역시 명나라의 대명률을 많이 참고했고 군사면에서도 조선군임진왜란을 거쳐 원앙진 같은 명나라의 전법과 낭선, 당파 같은 명나라의 무기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59] 초명은 광의(匡義)였으나 형의 이름을 피휘해 광의(光義)로 바꿨다가 즉위 후 경(炅)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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