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위 (문단 편집) == 개요 == [[오호십육국시대]] 말기 [[탁발부|탁발선비족]]이 세운 왕조로 '''[[중국]] 중세사의 한 흐름을 만들었다'''. [[선비(민족)|선비]]족은 영웅 [[단석괴]] 이후, 지속적으로 [[후한]]과 [[서진]]을 공격했고 5호 16국시대의 혼란을 틈타 남진해 국가를 세웠다. 북위는 5호 16국시대 후기에 등장하여 제3대 세조 [[태무제]]때 [[화북]]을 통일하고 [[남북조시대]]를 형성했으며, 후대의 [[수나라#s-4|수]]•[[당(통일왕조)|당]] 제국의 바탕을 이루었다. [[수도(행정구역)|수도]]는 지금의 [[다퉁]]이었다가 제7대 고조 [[효문제]] 때 [[낙양]]으로 천도했다. [[거란]]의 [[요나라]], [[여진족|여진]]•[[만주족|만주]]의 [[금나라]] 및 [[청나라]], [[몽골#s-1]]의 [[원나라]]와 같은 '정복왕조' 국가들이[* '''정복왕조'''는 카를 비트포겔의 이론이었다. 사회학을 기반으로 하여 유목왕조와 한족왕조를 설명한 서구 학계의 이론이다.] 여러 제도적인 노력[* 고유 문자의 제정이나 2원적인 통치 조직의 형성 등]을 통해 지배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반면, 북위는 제7대 효문제 시절 '''성족상정'''을 실시, 선비족의 성씨를 중국식으로 개칭하고 중국 문화를 크게 받아들였다.('''한화정책''') 북제와 북주 시절에는 이 조치를 다시 되돌리고 한인 귀족들에게 선비족의 성씨를 하사하기도 했으나('''호화정책'''), 선비족의 한화는 중단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수•당의 지배 계급인 '''[[관롱집단]]'''을 한화된 선비족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호•한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북위가 일방적으로 중국 문화에 동화된 것은 아니다. [*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진인각'''은 선비족 지배 계층들이 수•당을 건국했다는 학설을 지지했다. 서양학계에서는 북주와 북제를 프랑크 왕국에서 갈라진 메로빙거 왕조 및 카롤링거 왕조 등과 비교한다.] 당대의 국호는 그냥 '''위'''(魏) 혹은 '''대위'''(大魏)였고, '북위'라는 표현은 이전 시기 [[위(전국시대)|전국시대의 위나라]]나 [[위(삼국시대)|삼국시대의 조위]]와 같은 여타 '위나라'들과 구분하기 위해 역사가들이 붙인 표기 방식이다. 즉 당대를 바탕으로 한 소설과 사극에서 '북위'로 자칭하는 표현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라는 이야기이다. 또는 황실의 성씨를 국호 앞에 붙여 '''탁발위'''(拓跋魏) 또는 '''원위'''(元魏)라고 부르거나[* 이 경우 삼국시대의 위나라는 '''[[위(삼국시대)|조위]]'''(曹魏)가 된다.] 북방 이민족의 위나라라서 '''호위'''(胡魏), 시기적으로 나중에 등장한 점을 감안하여 '''후위'''(後魏)라 부르기도 하는데, 막판에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북위''' 표기가 통용되고 있다. 애당초 중국 [[24사]] 정사에 《[[위서(역사책)|위서]]》가 《북위서》로 들어가 버렸다. 다만, 주변국에서 '''타브가치'''라고 부른 사례가 있기에 고유 명칭은 '타브가치'였을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