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위 (문단 편집) == 여담 == * 르네 그루세의 명저인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는 북위가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에 비견되는 '중국의 보호자'로 묘사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5호의 중원 침입을 유사한 선상에 놓고, 그러한 분열 양상을 통합하여 안정시킨 국가였던 [[프랑크 왕국]]과 북위로부터 일정한 알레고리를 포착해낸 듯하다. --[[마자르족]], [[아바르 칸국|아바르족]]: ???-- * 북위는 고구려의 해동패자로서의 지위를 인정해 고구려 왕에게 '''정동장군'''(征東將軍)이란 고위 관직을 하사했다. 또한 고구려 사신을 남조의 사신 다음으로 대했으며 489년(장수왕 77년, 북위 고조 효문제 19년)엔 남조 사신과 고구려 사신을 동급으로 대해 남조 사신이 크게 항의한 바 있었다. *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뮬란]]>의 원형이 되는 《[[화목란]]》 이야기가 이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시초는 [[양(남조)|양나라]]에서 왔지만...-- * 중국 역사상 유례없이 독실한 [[불교]] 국가였으며, 이 시대에 만들어진 [[윈강 석굴]]과 [[룽먼 석굴]], [[둔황석굴]]이 유명하다. ||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52196_STD.jpg]] || * 황태자로 책봉된 황자의 생모를 처형시키는 '''자귀모사'''(子貴母死)라는 냉혹한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훗날 외척의 세도를 막기 위한 처사였다고 한다. 아무튼 북위 고조 [[효문제]]의 유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음 황제인 제8대 세종 선무제 때 자귀모사 제도는 시대에 뒤쳐지는 제도라면서 철폐되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제1대 황제였던 태조 도무제가 '''자귀모사'''라는 명분하에 태자였던 탁발사의 어머니를 처형했다. 탁발사가 밤새 대성통곡을 하자 도무제는 태자가 나약하다며 오히려 죽이려고 들었다. 그러자 태자 탁발사는 밤에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 잠적해버렸다. 이후 도무제가 없어진 태자를 대신하여 아들들 중 [[하란부]] 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탁발소를 제위에 앉히려고 했다. 자기 어머니도 죽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탁발소는 급히 외가인 하란부로 달려가 이를 알려 하란부 휘하의 군사를 모았고, 새벽에 몰래 황궁으로 쳐들어가 부황인 도무제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북위의 창업 군주가 자귀모사 제도로 인해 외척도 아닌 자기 자식에게 죽은 것이었다.''' '''탁발소가 어머니도 살리고 제위에 오르려는 순간, 잠적했던 폐태자 탁발사가 외척의 군대를 이끌고 대역죄인 소탕을 명분으로 삼으며 갑자기 나타나 하란부와 탁발소 일당을 쓸어버리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제2대 황제인 태종 [[명원제]]였다.''' '''명원제는 하란부의 쿠데타 사건을 통해 외척의 위험성을 깨달아 자기 어머니를 죽인 자귀모사 제도를 오히려 더 강화시키고 공고히 다져갔다.''' 이후 제8대 황제인 세종 [[선무제]]가 없앨 때까지 자귀모사 제도는 중단되는 일없이 실행되었다. * [[동성왕]] 치세하의 웅진백제를 무려 세 차례나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최 왜 침공했는지, 육로로 침공했다면 왜 고구려가 길을 열어줬는지 의문이고, 주로 기마 부대로 편성된 유목민 군대가 해상으로도 가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와 침공의 진위 여부는 [[미스터리 관련 정보|지금도 알 수 없다.]] 관련 내용은 [[백제-북위 전쟁]] 문서 참고. * 이전 왕조인 [[후한]], [[오(삼국시대)|손오]], [[동진]]과 더불어 역대 황제들 중에서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요절]]한 황제가 많았다. 제일 오래 산 제3대 세조 [[태무제]]조차도 4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위진남북조에서 [[진(사마씨)|진나라]]와 더불어 가장 오래 존속된 왕조이기도 하다. 자그마치 '''148년'''이었다. 1위는 [[진(사마씨)|진나라]]로 156년 동안 존속했다.[* [[서진]]과 [[동진]]은 영토나 주변 정세가 달라졌을 뿐 근본적으로 황실의 성씨, 정치체제 모두 동일한 왕조였다. 당장 정사인 《[[진서]]》(晉書)도 서진과 동진을 별도의 왕조로 보지 않고 모두 아울렀다.] 허나 이는 좁게 따진 것이기에 북위의 전•후신인 대나라, 동•서위까지 합쳐서 계산한다면 북위는 200년이 넘기에 북위가 앞선다. * 동진 멸망기의 인물인 [[사마금룡]]이 북위 귀족 출신의 부인과 함께 묻힌 [[사마금룡묘]]가 발굴된 바 있다. 동진이 멸망할 때 북위로 망명한 한족 귀족 남성과 선비족 귀족 여성의 결합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