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제 (문단 편집) === 고양의 공포 정치 === 북제의 초대 황제인 문선제 고양은 위에서 잠시 언급한 고환의 [[차남]]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형 고징이 549년 노비 난경에게 암살당하자 침착하게 난리를 수습하고 권력을 강화한 다음 선양받았다. 고양은 과단성과 능력이 있어 능력 있는 신하들에게 나라를 맡겨 안정시켰다. 고양은 정신이 멀쩡할 때는 이성적이고 유능한 왕이었지만 문제는 술이 취하면 그야말로 미치광이 [[사이코패스]]가 된다는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고양이 말년에 갈수록 술취한 날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술 취하면 살인 의욕이 치솟는지라, 죄수들을 살인용 더미로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그 살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중에는 그냥 재판 받던 사람까지 넣어야 할 정도였다. 살인용 더미를 데리고 다닐 것을 추천한 대신도 두 번이나 [[끔살]]당할 뻔할 정도였으니 죄수들이 당할 운명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고양은 원선견의 [[관(장례)|관]]을 강에 쳐넣고, 북위의 원씨 일족 700명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도살했다. 이때 갓난아이도 위에서 떨어뜨려 창으로 찔려 죽이거나 불태워 죽이고 시신들은 모두 장수에 버렸다. 그 후 장수에서 잡힌 물고기 뱃속에서 '''사람의 [[손가락]]이나 [[손톱]]이 나오는 경우'''(...)가 자주 생겨서 오랫동안 [[업]]성 사람들은 장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태평광기]]에 따르면 고양은 [[광무제]]가 중흥할 수 있었던 것은 ([[왕망]]이) 유씨를 모두 주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여겼기에 원씨를 대대적으로 주살했는데, 이때 죽은 자가 1,0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시신은 장수(漳水)에 버렸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다 (물고기 뱃속에서) 손톱이 나왔기에 '''원랑어'''(元郎魚)라 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차마 먹지 못하였다. (원씨 가운데) 오직 원만(元巒), 원장춘(元長春), 원경안(元景安)의 세 집안만이 주살을 면했는데, '''원만'''은 그의 딸을 상산왕 고연(高演)의 비로 삼았고, '''원장춘과 원경안''' 등은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기 때문이었다. 원경안의 형 원경호가 차라리 부서진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와는 되지 않겠다[* 여기서 나온 말이 [[일본군]] [[대본영]]에서 좋아했던 [[옥쇄]]이다.]라고 말했다. 원경안이 그 말을 아뢰었더니 고양은 다시 죽였다. 이로부터 원씨의 자손들은 나이와 귀천에 상관없이 살아남지 못했다. 또 고양은 술을 마시고 친어머니 누씨를 모독한 패륜아이기도 했으며[* 술에 취해 늙은 어머니가 앉아 있는 의자를 넘어뜨려 죽이려고 했다. 술이 깨자 불에 뛰어들어 죽으려고 했으나, 누씨의 만류로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버지 고환의 첩이었던 이주씨[* 이주영의 딸 이주영아(爾朱英娥)로 효명제의 첩이었다가 효장제의 황후가 되었다. 그러다 고환이 이주씨를 첩으로 삼아 5남 고유(高浟)와 13남 고응(高凝)의 두 아들을 낳았다. 이후 팽성태비(彭城太妃)로 추존되었다.]를 범하려다가 실패하자 [[도검|칼]]로 죽였다. 또 자신의 첩 설씨가 예전에 다른 남자와 사통했다는 이유로 찢어 죽인 뒤 그 [[인피]]로 [[악기]]를 만들고,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살육하는 등 공포 정치를 한 [[폭군]]이었다. 무엇보다 [[나체]]에 [[밀가루]]로 분칠을 하고 발가벗고 다녔으며 높은 대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즐기는 등 그냥 '''미친놈'''이었다. 고양은 결국 재위 9년 만에 죽었으나,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 연호가 천보(天保)였다. 그나마 당시에는 '정치가 위에서 군주는 어두웠지만 아래에서 능신들에 의해 맑았다.'라고 평가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