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제 (문단 편집) === 후주 고위와 북제의 멸망 === 사실 동쪽의 북제는 처음에는 부강했었다. 중원이라 불리는 지역 대부분을 점거하면서[* 수도가 북위의 낙양에서 천도한 업성이었다. 당시 낙양은 북주와의 경계지역으로 황폐화. 난릉왕입진곡의 무대] [[함곡관]]을 경계로 평야 지대가 모두 북제의 영토였다. 특히 바다에 면하는 [[황하]] 하류를 끼고 있었기에 농산물이 풍부했다[* 물론 북주 역시 후에 [[쓰촨 성|촉]]([[쓰촨 성|사천]])땅을 병합하면서 상당한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다.]. [[돌궐]]과 손을 잡고 [[거란]]을 견제하기도 했다. 고위만 해도 폐제 고은-효소제 고연-무성제 고담의 짧은 재위 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11년을 황위에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망할 나라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북제는 북주에 비해 한족세력이 강한 나라였다. 이주영에게서 분립할 때, 고환은 발해와 산동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자립할 수 있었다. 또한 북위의 한화정책 영향을 강하게 받아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체제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또한 남조와 가까워 선진문화의 수입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북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진양에 주둔하는 선비족 무인 세력의 힘이 꼭 필요했고 이들이 북제 황실 권력의 원천이었으므로 북제는 선비족 무인들과 한족 귀족세력의 대립에 고질적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쉽게 말하면 북위 말기의 상황과 비슷한데 북위보다 더 안 좋은 점은 화북의 절반을 북주라는 강자가 차지하고 있었고 또 그 북주가 파촉을 정벌하는 등 국력이 더 강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양측은 서로 숙청할 것을 황제에게 계속 충동질했는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진양의 선비족 세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수 없고 업의 한족세력을 불신한 북제 황실의 입장이 북제의 공포정치와도 무관하지 않다. 반대로 북주는 뒤떨어진 문화와 강력한 선비족 세력을 바탕으로 부병을 이루어냈으니 북제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북제는 유리하게 시작했으나 선비족과 한족세력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선비족은 북주로, 한족은 남조에게 도망칠 위험을 계속 감수하고 살아야 했다. 문선제는 능력있는 황제였지만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 결국 실패하였고 정치에 관심을 잃고 음주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북제의 문화와 체제는 수나라에게 넘어가 율령체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북주의 고답적인 주례체제는 당연히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고위의 후반기 치세가 문제였다. 고위가 화사개(和士開), 고아나굉(高阿那肱), 목제파(穆提婆), 한장란(韓長鸞) 등의 [[간신]]들을 신임하면서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특히 [[곡률광]][* 북주의 무제는 곡률광의 피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고위는 고장공마저 [[독살]]했다.], [[고숙]][* 고씨 일족으로 난릉왕이라는 작위를 받아 난릉왕 고장공이라고 한다. [[삼국지]]의 [[주유]]에 비견될 만한 미남자였으나 최후는 그런 거고 뭐고 없다.]이라는 뛰어난 명장들이 이들의 참언에 의해 살해되었다. 선비족을 우대하고 한족의 율령 체계를 거부하는 공포 정치를 유지하면서 북제는 계속 쇠퇴하여, 결국 국력과 군사력으로 압도하였던 북주와 진나라에게 영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북제가 쇠약해져 가는 것을 지켜본 북주 무제 [[우문옹]](宇文邕)은 출병을 결심했다. 575년 북주군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순식간에 영토를 잃고 말았다. 577년 후주는 장남 고항에게 양위하였고, 북주군의 추격을 피해서 도피를 하지만 결국에는 부하들이 배신하면서 3월 청주(青州)에서 유주 고항과 함께 북주군에게 생포되었다. 그 후, 북제는 멸망하였다. 북주는 고위를 온공(温公)으로 봉했지만, 577년 일족과 함께 살해했다. 결국 북제는 고위가 곡률광을 죽인 지 5년, 고장공을 죽인 지 3년 만에 멸망했다. 고위는 막판에 자신의 8살 난 아들 고항을 황제로 세우고 태상황을 칭했으나, 결국 항복했다. 그러나 반역죄로 모함받아 [[고추]][* 그러나 콜럼버스 이후에나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고추가 이 시대에 있었을 리가 없다.]로 입을 막아 질식사당하고, 고씨 황족들은 모조리 멸족당했다.[* 오직 장애인들만 촉 땅으로 보내져 천수를 누렸다.] 그런데 후주 고위의 어머니이자 무성제 고담의 황후였던 [[무성황후 호씨|호태후]]와 고위의 황후 목씨는 살아남았는데 이들은 북주의 수도 장안에서 '''기녀가 되었다'''. 남편 고담 못지 않게 음란하던 호태후는 화사개와 사실상 부부였으며 며느리까지 부추겨 장안에서 기녀가 된 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 "태후로 사는 것은 기녀로 사는 것보다 재미가 없다!" 비록 망국이지만 전직 태후와 전직 황후가 서비스한다는 소문에 해당 업소는 불야성을 이루었고, 그 후로도 호태후는 열심히 즐기다가 수나라 초기에 사망했다. 반면 북주의 무제 우문옹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율령을 정비하고 국력을 강화했으니, 점차 국력이 역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북주의 율령이 과연 그렇게 찬양할 만한 것인가라는 의견도 있다. 단적인 예로 [[수문제]] 때 제도 정비에 북주의 율령보다도 북제의 율령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북주를 이어받은 수나라의 법제도의 기반이었던 형서요제가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법을 관장하는 관리들이 어려움이 있었고 형서요제에서 다루는 죄가 1537가지인데, 북제 법률서는 949가지이며 간결하고 요점을 추려서 이해하기 쉽다는 이유로 수나라의 법을 정비할 때 이를 참고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