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유왕 (문단 편집) == 생애 ==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이신왕]]의 [[아들]] 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려시대]] 당시 있었던 자료에도 두 가지 전승이 모두 있었다고 한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하므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 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중시된다고 한다'''.[* ([[이도학]], 1995; [[이기백(1924)|이기백]], 1996)] 《[[송서]]》(宋書)에 따르면 [[이름]]은 '비(毗)'.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하며 능력을 잘 살렸는지 [[외교]]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남북조시대]]의 [[송(육조)|유송]]에게 [[조공]]을 자주 바쳐 425년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고, 이후 매년 사신의 파견이 있었다. 이후 원가 7년(430년)에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의 계승을 허락했다.”라고 하여 정식으로 백제왕이 되었다. 더불어 [[고구려]]에 대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한때 '''적이었던 [[신라]]를 회유해 [[나제동맹]]을 성립시켰다'''. 신라의 [[눌지 마립간]]은 과거 [[내물 마립간]] 시절에 백제 [[동맹]]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구려의 군사 지원을 받은 대가로 고구려군에게 [[내정간섭]]을 받던 중이었다. 눌지 마립간은 여기서 벗어나 자주 노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홀로 고구려에 대항하기는 어려웠다. 백제 역시 [[진사왕]] 때부터 줄곧 고구려에 밀리던 상황에서 [[왜국]]이나 [[가야]] 이외에도 동맹국이 더 필요했다. 백제와 신라 양국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는 것을 비유왕은 간파하고 먼저 433년 7월, 434년 2월과 9월 신라에 사신과 [[선물]]을 보내며 화친을 청했다. 신라 역시 434년 10월에 화답해 왔다. 여기서 발생한 문제는 왜국이 백제와는 친하다지만 신라와는 대대로 원수지간이라는 점이었고, 431년 왜국은 신라를 침공하기도 했다. 신라와의 화친 시도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 백제와 왜국 사이에 관계가 어긋났는지 438년 [[왜5왕|왜왕 진]]은 유송에 [[조공]]하면서 백제가 왜국의 속국인 것처럼 [[언플]]을 하기도 했다.[* [[왜5왕|왜왕 진]]은 [[남조]] 유송에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六國諸軍事(육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을 [[자칭]]하고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백제 또한 유송과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왜국의 속국이 아닌 건 유송도 알고 있어서 거절당하고 '안동대장군'과 '[[왜왕]]'의 직위만 수여되었다.] 그래도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완전히 악화되지는 않고 본질적으로는 계속 우호 관계가 유지되었다. 450년 비유왕은 유송에 방물을 바치면서 국서를 올려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태수(西河太守) 추인해주도록 요청하고, 표문으로 이림(易林)·무점(式占) 및 요노(腰弩)를 요구했는데 송문제 유의륭은 백제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고 한다. 당시 서하지역은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가 지배하고 있었던 지역이었기에 유송 측도 그냥 명목상으로 허락해 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풍야부는 [[북연]] 황실 출신의 인물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436년 북연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후 고구려로 망명한 마지막 황제 [[풍홍]]과 그 일족은 438년 [[장수왕]]에 의해 제거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로 유입된게 아니냐는 것.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가을 9월에 [[흑룡]]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시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자 날아가 버렸다. 왕이 죽었다. 승하 당시의 기사가 의미심장한데 기록에 따르면 [[한강]]에 [[흑룡]]이 나타났다가 날아가자 승하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백제 내부의 정쟁에 휘말려 [[시해]]당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고, [[검은색]]이 북방을 뜻함에 따라 백제의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에서 [[암살]]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반론도 있는데 [[용]] 자체가 [[물]]의 수호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는 '용=물=흑색'이라는 통념이 있었다. 당장 용의 [[순우리말]]인 '미르'가 물에서 파생된 단어다.] 비유왕의 유해가 빈 들판에 가매장되었다는 [[도림]]의 언급으로 보아 매장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던 듯. 아무래도 비유왕의 승하시에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승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자연스러운 [[죽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에서 암살했을 수 있다는 설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게 비유왕 승하 직후 곧바로 고구려의 백제 침공이 이어졌다는 것. 백제 왕이 승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쳐들어왔을 수도 있지만 먼저 [[자객]]을 보내 왕을 암살한 후 백제의 혼란을 야기하는 사전 모략을 벌이고, 쳐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검은색은 북방을 상징하고 용이 나타났다는 위치도 고구려와 [[국경]]이 맞닿은 한강이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백제의 북쪽에 있었던 고구려에서 비유왕을 죽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것이다. 둘 다 수용한다면 당시 백제 내부에 정쟁이 있었고, 고구려 역시 이 점을 이용해서 비유왕 반대 세력과 모종의 결탁을 해 비유왕을 암살한 후 백제 내부를 더욱 흔들어 놓았다는 해석도 가능한 부분이다. 나제동맹을 맺었던 신라는 약속대로 원병을 보내와서 반고구려 노선을 확실히 했으니 적어도 외교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신라는 이전부터 백제보다는 친고구려에 가까웠고,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대왕이 신라를 지켜준 대가로 고구려군을 주둔시켜 예속된 상태였다. 신라가 고구려 종속을 떨쳐내고, 나제동맹을 맺도록 비유왕이 신라를 끌어들인 것만 해도 상당한 [[업적]]이다. 물론 먼 훗날 결과적으로는 나제동맹이 깨지게 되지만 그건 100여 년이나 뒤의 일이고,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이후 50여 년간의 [[역사]]를 보면 나제동맹이 없었으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위례성]]과 한강 유역이 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개로왕]] 시해 이후 [[문주왕]]이 [[공주시|웅진]]성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부터가 문주왕이 데려온 신라 지원군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성왕(백제)|성왕]]이 [[전성기]] 시절 신라의 힘을 빌려 [[중흥]]을 맞이한 것도 나제동맹 덕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