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문난적 (문단 편집) === 학파간 갈등의 실체 === 우선, 조선 후기의 학자들 중에는 성리학 그 자체를 부정하고 본격적으로 비판한 경우는 사실상 거의 없다. 소위 실학자라 불리는 사람들도 성리학적 기반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아니다. 실제로 예송 논쟁 이전에는 그렇게 학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지 않았다. 예컨데 남인의 거두 허목의 학설은 보다 온건했기에 [[김수홍]]이나 [[원두표]], 유계 같은 서인들 일부도 지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남인들이 서인의 [[소현세자]] 일가 복권 주장을 '''효종을 부정하고 소현세자 정통을 부정했다'''고 정치공세를 한 뒤, 연이어 [[윤선도]]가 [[송시열]]의 예론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내부단속을 하기 전까지는 이들은 허목의 주장을 대놓고 지지하기까지 했다. 덧붙여, 윤휴와 허목의 학설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퇴보적으로 볼 수 있는 학설이기도 하다. 윤휴의 중용 주해의 논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유학적 성인이 될 인물은 오직 [[군주]]에 국한되며 존비귀천의 사회구조를 실현하는 것이 예법이므로, 예법의 실천이 학문의 핵심이 된다'''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유학적 성인의 소양이 모두에게 있다고 판단한 송시열에게 이 설은 말도 안되는 학설이었고 급기야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비판하게 된 것이다. 흔히 사문난적은 [[보수주의|보수]]적인 견해를 유지하는 인물들이 신진적인 세력을 견제할 때 사용하던 스킬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성리학]]의 주축인 [[퇴계]]와 [[율곡]]의 학설만 봐도 주자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었다. 퇴계의 주리론은 주자의 기본 전제와 어긋나는 학설이고, 율곡은 "주자라도 틀린 소리를 하면 틀린 거다"라고 말한다. 조선 성리학에 대한 막연한 편견들은 대부분 조선 시대 문집을 읽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만연한 편견들과 달리 송시열이 주자의 '''의심가는 해석'''을 정리한 <주자대전차의>를 지었고 <주자어류소분>을 지어 주자를 독자적으로 '''재해석'''한 적도 있다.[* 이러한 일련의 학술적 활동들은 송시열 개인에게서만 끝난 것이 아니고 그 학맥 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원진의 <주자언론동이고> 또한 이러한 계통의 산물.]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그가 [[갑인환국]] 이후로 귀양을 가서 윤휴가 전면에 나섰다가 숙종에게 찍혀 사사당하는 바로 그 시기였다. 결론적으로 송시열은 귀양 중이라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죽일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 송시열도 주자의 학문적 한계를 인정한 적이 있었다.[* 특히 심성론에 있어서 미발(未發)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이러한 태도를 보인바 있다.(안은수, 「尤菴 心性論의 특징과 의의 : 未發論을 중심으로」,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 혜안, 2009, 190~191쪽.) 관련 기록은 <송자대전> 권113에 있으며, 원문은 "前稟諸說, 多蒙印可, 自幸謏聞之不甚悖理矣, 惟未發之旨, 迄未相契, 豈前所稟者辭不達意, 以致如此耶? 朱先生於此, 亦不免前後異同."로 되어있다.] 한 마디로,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했다'라는 타이틀 때문에 '''실제 그들의 해석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윤휴, 허목, 박세당 등은 졸지에 개혁자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송시열, [[송준길]] 등은 졸지에 '[[수꼴]]'의 수괴로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덧붙여 흔히 이 시대에 대해 설명할 때 사문난적 문제를 들면서 성리학은 말 그대로 "학"(學)이 아닌 "[[종교]](敎)"로서 변질된다고 설명하는 예도 있는데 역시 오류. 敎라는 글자에 종교성이 두드러지는 건 [[20세기]] 이후 용례다. 제국주의시대에 서양의 종교개념이 동양에 소개되며 섞여들여가게 된것. 무슨 반대자를 이단으로 몰아 심문한 끝에 처형한다든지 이랬던 것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