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북사건 (문단 편집) === 어용노조에 대한 저항 === || [[파일:1086756112.jpg]] || || 이원갑[* 여담으로 이 사진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쓴 소설가 [[조세희]]가 1985년 사북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은 조세희의 책 <침묵의 뿌리>에 수록되어 있다.] || 1970년대 말이 되면서 사북탄광은 저임금과 열악한 생활, 그리고 어용노조에 대한 항의로 빗발쳤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이원갑'''이었다. 1960~70년대 내내 고통받았던 광부들은 이원갑을 열렬히 지지했고, 이재기를 끌어내리려고 시도했다. 그리하여 이원갑은 1978년 노조지부장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노조지부장 선거는 부정으로 얼룩졌다.''' 선거를 앞두고 1978년 12월 13일 이재기는 제주도의 신제주호텔에서 사북광업소 대의원 29명한테 1천만의 거금을 들이며 극진히 대접했다. 그들의 표를 자신에게 돌리려는 심산이었다. 이렇게 하여 1979년 4월 3일의 선거에서 이재기는 또 다시 노조지부장으로 선출된다. 이같은 결과에 광부들은 분노했다. 그리하여 1979년 7월 16일에 광부 2568명의 서명을 받아 노조지부장 직선제와 노조의 개혁을 요구했다. 광산노조는 이를 받아 이재기에게 징계를 내리긴 했으나 회사는 그 해 11월 15일 이재기를 노조지부장 직무대리로 임명하면서 요구조건은 실질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임금교섭에서 이재기가 보여준 기만적 행태는 광부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재기는 1980년 3월에 있었던 임금교섭에서 광부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40% 임금 인상'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20% 임금 인상'으로 처리'''해버렸다. 이는 광부들의 의견을 무시한 것이었기에 광부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에 더 이상 회사의 처사에 견디다 못한 광부들은 ''''지부장선거 직선제', '임금인상', '처우개선'''' 등을 외치며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1980년 4월 15일 26명의 조합원들은 광산노련 사무실로 몰려가 그곳의 지도부에게 "왜 직선제를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는 답변이 돌아오자 이들은 4월 18일 더 많은 수와 함께 조합사무실로 몰려들었다. 거기에는 노조지부장 이재기가 있었는데 노조원들이 물러가라고 하자 자신은 정당하게 노조지부장이 되었다면서 노조원들의 주장을 거절했다. 이에 광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알릴 집회를 열기로 하고 경찰서에 가서 집회신청을 했다. 서장은 집회를 허가한다고 했지만 노동자 간의 충돌을 우려한다며 불허할 것을 계엄당국에 건의했고 그 건의대로 '''집회는 불허됐다.''' 하지만 이 사실은 광부들에게는 알려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불허사실이 통보된 것은 집회가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기 때문이다.[* 추가로 말하자면 당시 탄광과 광부들의 사택 그리고 노조사무실 등은 모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즉, 단 몇 시간 만에 모든 광부들에게 집회불가 사실이 알려진다는 것은 무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