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비성 (문단 편집) == 연혁 == 5세기 말-6세기 초에 건설되어 [[성왕(백제)|성왕]]의 천도로 [[538년]]부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백제 최후의 수도로 기능했다. 소부리(所夫里)라고도 불렸다.[* 백제 지명 중에는 -부리로 끝나는 것이 많다. 아마도 "벌판"을 음차한 것으로 본다. 신라,가야가 있던 영남지역에는 '벌' 또는 '불'을 훈을 음차해서 '火'로 표기되기도 한다. 북부 큐슈에는 벌판 "原"을 "바루"로 읽는다.] [[660년]] 당나라의 대군을 맞아 백제주력군은 백강에서의 요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당나라군은 배를 타고 사비성으로 진격한다. [[8월 20일]], 처절하게 싸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결사대가 전멸하였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 앞에 결집하자, 백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표현대로 "온 나라를 기울여서" 몇 차례 결전을 벌이나 잘 훈련된 당나라군과 기세가 오른 신라군을 당해낼 수 없어, 전사자만 만여명에 이를 정도의 대패를 당한다. 당 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후 나성이 돌파당하고, 의자왕과 백제군은 부소산성에 농성했던 것 같다. 의자왕은 홀로 배를 타고 웅진성으로 달아났고, 23일엔 [[문무왕]]의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점령하였다.[* 의자왕은 급히 [[웅진성]]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붙잡혔다.] 이후 당나라가 [[웅진성]]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사비성은 거기에 속했다가 [[나당전쟁]]으로 [[신라]]가 수복해 [[671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도독을 부임시켰다. [[통일신라]]는 이곳 대신 [[웅진성]]을 충청 일대 [[웅천주]]의 행정 중심지로 삼았다.[* 웅진, 즉 공주시는 평지가 좁아서 한 나라의 수도로는 적합하지 않아서 천도했지만, 이제 더 이상 수도가 아니기에 드넓은 부여 대신 공주로도 지역 행정 중심지 역할은 충분하다고 보았던 듯 하다.] 신라 [[경덕왕]] 10년([[750년]]) 지명을 백제 시절의 소부리에서 '[[부여군]]'으로 개칭, 이후 오늘날까지 이 명칭이 쓰이고 있다. [[부여군]] 역사 항목 참조. 이외에 '사비로'라는 도로명이 부여군내 한복판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이다. [[삼국유사]]엔 사비를 '전백제 왕도(前百濟 王都)'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는 사실 역시 서술했다. 당시 사비엔 부산(浮山), 일산(日山), 오산(吳山)이란 세 산이 있었는데 모두 신인(神人)이 살고 있어 하늘과 땅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사비성을 둘러싼 강을 사비하라고 불렀고 두 산 사이에 대왕포(大王浦)가 있어 백제 군주들이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