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사절요 (문단 편집) == 내용 == 1458년 9월에 세조는 문신들에게 [[동국통감]]을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세조는 기존 [[한반도]]의 역사책들은 내용이 빈약하고 빠진 것이 많으며 체계가 잡히지 않았으므로, 상고사와 삼국사, 고려사를 하나의 편년으로 합쳐 통사로 편찬하되 [[삼국사기]] 같은 몇몇 책에만 의지하지 말고 여러 책에서 자료를 보완하라고 명하였다. 1463년에 또다시 명을 내려 [[양성지]]가 여러 유생들과 함께 자료를 더 모으게 하고, [[신숙주]]와 [[권람]]은 이 자료들을 감수하게 했으며 [[이파]](李坡)는 그 출납을 맡도록 하였다. 원래 세조가 목표했던 의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권근]]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고대사 서술이 정치적 견해에 따라 탈락된 것이 많고 특정 국가에만 지나치게 기사가 쏠려있는 문제를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때문에 삼국사기에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들을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등의 다른 책에서 채록하고, 세조가 비판하던 [[동국사략]]의 사론까지 수록하였으며, 각 국가 간의 분량을 최대한 균형이 잡히게 서술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이용하려던 고기류(古記類)는 너무 허무맹랑하고 내용이 잡다해진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참고하지 않았고 때문에 최초의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수사관(修史官)이 완성한 것이지만 세조 자신이 의도하던 원래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노력으로 인해 이 책은 이전의 사서보다 고대문화를 훨씬 포용하고 있다. 이렇게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편찬에 대한 세조의 의지는 대단하였지만 결국 세조대에는 완성하지 못했다. 뒤를 이은 [[예종(조선)|예종]]은 [[최숙정]] 등에게 계속 편찬할 것을 명했으나, 예종이 곧 죽음으로써 편찬사업은 중단되었다. 이후 성종은 신숙주에게 동국통감을, 이파에게 삼국사절요를 완성하라는 명을 내렸고 1476년 12월 삼국사절요가 완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