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지명/익주 (문단 편집) === 파(巴) 지방 및 북부 === 후한 말 파 지방은 [[오두미교]]의 근거지였고, [[유언(삼국지)|유언]]이 당시 오두미교의 교주 [[장로(삼국지)|장로]]를 한중태수로 임명했기에, 오두미교 교단은 한천(漢川) 지방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한천'이란 전통적으로 한중군의 별명으로 사용된 이름인데, [[삼국지연의|『삼국지연의』]]에선 '동천(東川)' 지방으로 언급되나, 이는 후대의 별명으로 당대에 쓰인 표현은 아니었다. [[유장(삼국지)|유장]]이 장로와 반목하면서, 장로가 태수직을 맡고 있던 한중군은 한녕군으로 개명되어 오두미교의 신정국가(...)가 되어버렸고, 유장은 장로 세력이 그대로 파군까지 장악하는 것을 막고자 195년에 파군을 분할해 영녕군과 고릉군을 설치하고 각각 태수들을 임명해 보냈다. 당시 파군태수로는 [[방희]]를 임명해 보내 장로를 막게 했으나, 유장은 곧 방희와도(...) 반목하였고, 200년에 방희가 성도를 포위했다가 화해를 청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방희가 유장과 화해를 결정한 이유는 기록에선 [[정기#s-3|정기]]와의 일화 때문이라고 설명하나, 실제로는 장로의 위협 때문이라 추측된다. 방희의 치소가 위치한 낭중현은 오두미교의 총본산이었으므로 실제로는 장로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에 방희는 한창현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창현 또한 나중에 조조가 차지한 것을 보면 방희는 결국 201년 이후에 장로의 공격을 받아 임지에서 쫓겨난 것으로 판단된다. 장로는 유장이 '파서군'으로 명명한 지역을 장악하고는 내부적으로 이를 '파중(巴中)'으로 불렀다. 215년에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은 뒤에, '파중'을 나눠 파서군과 파동군을 설치했으며, 한중군을 나눠 새로 서성군을 설치하면서 서성군에 상용도위부를 두었는데, 이 무렵 한중군에서 방릉군도 분할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광한속국도위부에 소속된 저족 집단이 조조에 협력해 장로와 장로에 예속되어 있던 [[관중제장]]의 잔여 세력을 공격했기에, 광한속국도위부를 음평군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유비가 [[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한천 지방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 시점에는 상용도위부가 상용군으로 승격된 상태였다. 조조는 유비의 북상을 염려하여 무도군·음평군의 주민들과 저족 집단을 옹주 우부풍으로 이주시켜 2군을 무인지대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군웅할거 시기에 파 지방은 파서군·파군·파동군·부릉군·탕거군 5군으로 분할되었고, 한천 지방은 한중군·서성군·상용군·방릉군 4군으로 분할된 것이다. 그러나 220년에 서성군·상용군·방릉군이 위나라에 점령당해 형주에 소속되었다. 이후 탕거군이 폐지되었고, 229년에 [[제갈량]]이 폐지된 무도군·음평군 지역을 점령하여 다시 군·현을 설치했다.[* 무도군은 전한 때 익주자사부 소속이었으나 후한 때 양주(涼州)자사부 소속으로 바뀌었는데, 이때 다시 익주 소속으로 변경되었다.] 따라서 촉한 시기에는 파 지방은 4군이 되었고, 한중군·무도군·음평군 3군이 익주의 북부를 구성하는 형세가 되었는데, 실제로도 당대에 무도군과 음평군 지역을 한중군과 한 지방처럼 묶어서 통칭하는 경향이 있었다. 촉한이 멸망한 뒤 263년 말 무도군을 옹주로 이속하고, 음평군을 자동군에 동광한군을 광한군에 병합하였으며, 한중군·광한군·동광한군·자동군·파서군·파군·파동군·부릉군을 분할해 양주(梁州)를 설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