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후 (문단 편집) === 사치 행적 === ||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C%AD%C5%C2%C8%C4_%B9%B0%B3%EE%C0%CC.jpg|width=100%]] || || 이화원에 있는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 || 사실 대부분의 왕실 사람은 품위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 적당한 사치는 필수였다고 하나, 서태후는 그 선을 훨씬 넘었으며 당시 청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상황에서 사치를 벌였기에 지금도 회자되다 못해 그녀가 가장 까이는 행적이기도 하다. 우선 진귀한 음식에 관심도 많고 [[식탐]] 또한 대단했기에[* 이때문에 서태후는 과식으로 인해 복부팽창, 위 기능 저하, 이질에 항상 시달렸다. 최후도 생일잔치에서 과식을 하다가 [[이질(질병)|이질]]에 걸려서 죽었다. 또한 탈모도 심했는데 40대부터 탈모가 발생하여 60대부터는 머리카락이 얼마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그래서 서태후는 탈모에 대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탈모를 치료하려고 많은 애를 썻지만 실패하여 결국 가발을 쓰고 다녔다. 실제 노년의 서태후 사진에서는 머리가 풍성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수리에 꽃을 붙이고 가발을 쓴 것이다.] 한 끼에 12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100냥이었으며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농민 1,000여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 어떤 설에서는 '''백만 냥'''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터무니없이 부풀린 금액이다. 1차 아편전쟁 후 청에 부과된 배상금이 백은 1,200만 냥, 2차 아편전쟁 배상금은 800만 냥이었고, 청나라 최고전성기 때인 1803년의 1년 세수가 3,800만 냥을 조금 넘겼다. 조선이 병자호란 후 청에 바친 세폐가 백은 1,000냥이다. 조선 후기의 소설 《허생전》에서 조선의 산물을 매점매석 하는데 필요한 돈을 백은 10,000냥으로 잡았다. 당시 중국 농민의 1년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이라면 더더욱 100만 냥일 수가 없다.]이자 이를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2000년 전후의 한국을 기준으로 약 8,000만 원 정도다. 그리고 서태후는 [[대식가]]로 하루에 4끼를 먹었다. 특히 절대 같은 음식을 3번 이상[* 자신의 선호 음식을 알지 못하게 해서 독살의 우려를 없애려 했다는 말도 있다.] 않았으며 어떤 때는 '''관상용'''으로 호화스런 음식을 가득 차려서 따로 내놓거나 아예 과일을 요즘의 디퓨저 마냥 소비하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이런 서태후의 식성을 간파한 환관들이 주방 인원들과 짜고 횡령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서태후가 관상용으로 차려만 놓고 절대 손대지 않는 메뉴들을 파악해두었다가 이 메뉴들은 상한 티가 나기 직전까지 재활용해서 상에 올리고, 그만큼 부식비를 착복했다.] 특히 음식들 중에서 [[오리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육식]]을 무척 좋아했으며 서태후는 한 번 먹은 음식은 두 번 다시 입에 대기를 꺼렸지만, 오리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로 만든 요리만큼은 매끼마다 빠진 적이 없었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리고 돼지고기 요리 중에서도 [[동파육]]을 특히나 좋아해서 '향령'(響鈴)이라 이름을 붙이고 매번 즐겼으며 고기 외에도 제비집과 상어지느러미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고 후식으로는 과일과 사탕, 떡을 즐겨 먹었다. 이러다 보니 서태후가 전용열차를 타고 지방에 가는 날이면 16칸 열차에서 4칸이 주방이었고, 서태후의 식사 준비를 수행하는 요리사만 50~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실제 그녀의 식생활과 관련된 야사가 있었는데피난 생활로 인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서태후 일행이 곤란을 겪자 청나라 백성들이 평소 먹던 옥수수 빵을 바쳤고, 허기에 지친 서태후는 이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하루는 자금성으로 돌아온 서태후가 그 때 그 맛을 떠올리고 황실 요리사들에게 옥수수 빵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황궁으로 돌아와서 다시 입맛이 고급이 된 서태후에게 그 옥수수 빵을 그대로 올려봐야 피난 시절 때 허기진 채 먹었던 그 맛이 나올 리 없었다. 결국 요리사들은 궁리 끝에 견과류와 설탕을 넣어 맛을 더한 옥수수 빵을 만들어 바쳐 서태후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옥수수 빵이 중국에서 흔히 먹는 [[만터우|워워터우(窝窝頭)]]라고 한다. [[선조(조선)|선조]]와 [[도루묵]]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 하지만 해당 음식이 명나라 시절의 기록에도 언급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더불어 비슷한 이야기는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에게도 있는지라[* 거지 시절, 먹다 남은 여러가지 채소를 끓인 찌개가 그렇게 맛있어서 황제가 된 후 찾았다는 이야기. 사실 국가나 특정 세력 등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어려웠던 시절 맛있게 먹은 음식을 그리워하여 다시 찾거나 계속 즐겨먹는다는 건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특히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버린 영향 때문인지 미용에 누구보다 신경을 썼다고 한다. 매일 옥용산이라 불리던 새똥으로 늘 세수를 하고 각종 꽃과 약초를 넣은 목욕물을 이용해 목욕을 하고 돼지기름과 계란 흰자를 이용해 마사지를 했다고 한다. 게다가 진주와 모유가 피부미용에 좋다고 믿어 노년이 될때까지 진주를 갈아 마시거나 외모가 아름다운 젊고 건강한 산모들을 처소까지 불러서 신선한 모유를 매일같이 마셨다고 한다.[* 하지만 모유는 면역물질처처럼 아기에게 필요한 성분이 특히 풍부한 아기 특화 식사일 뿐이다. 즉, 아기가 아닌 서태후가 모유를 먹는 것은 하등 쓸모없는 뻘짓이었다.]또한 매일 머리 치장을 하는데도 공을 들여서 환관들은 서태후의 명을 받아 궁정 밖을 나가서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찾아서 매번 서태후에게 선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서태후는 자신의 위엄이 훼손됨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보니 당시 서태후에게 젖을 주는 산모는 무릎을 꿇은 채 서태후에게 젖을 물려야 했으며, 그녀의 머리 치장을 담당하는 궁녀들은 늘 살얼음판으로 머리를 단장했으며 실수로 머리가 빠지거나 그녀를 아 프게 하면 모진 매질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이화원에 거주할 때도 자신과 통화하는 상대방이 건방지게 누워서 통화하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전화]]를 설치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삼년상]]을 전화로 퉁쳤다'''는건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사실 고종은 한국사에서도 유명한 [[얼리어답터]] 군주였다.] 심지어 서태후의 운전기사도 예외가 아니라서 무릎을 비스듬히 꿇고 차를 운전해야만 했기 때문에 서태후가 탄 차는 늘 잔사고가[* 당시 자동차가 [[포드 모델 T]]처럼 손으로만 운전하는 방식이기에 망정이지 1940년대부터 보편화된 발도 쓰는 차량이었으면 아예 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았으며 그나마 전용열차의 경우 초창기 [[증기 기관차]]는 아예 서서 운전하게 되어 있어서 자동차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C%AD%C5%C2%C8%C4_%C0%C7%BA%B9-1.jpg|width=100%]] || || 서태후의 복장을 재현한 모습 || 이런 그녀의 사치는 옷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옷이 무려 3,000여 벌이나 되었으며 옷을 담는 박스가 700박스가 넘었으며 옷은 물론 버선과 신발에도 굉장히 신경을 써서 서태후의 옷, 버선과 신발을 만드는 데만 매년 3,000명 가량이 동원되었고, 그 비용은 매년 10,000냥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음식에도 그랬듯이 옷이나 버선,신발도 한번 신거나 입고 나면 그대로 버렸으며 심지어 그녀가 쓰고 한번 버리는 목욕수건에도 수가 놓이는 등 그야 말로 사치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또한 보석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아예 과일 모양의 특이한 보석의 경우 환관들을 시켜다가 자물쇠로 늘 지키게 했고 이들 중 일부는 그녀의 무덤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특히 [[비취]]와 [[진주]]를 가장 좋아해서 진주, 비취로 만든 팔찌와 반지야 말할 것 없고 비취로 장식한 호갑투(손톱 보호대)와 머리장식, 진주,비취로 만든 망토[* [[중국 사극]]들 중 [[청나라]] 시기를 배경으로 한 궁중사극들을 보면 극중 비주얼을 위해 시대적 고증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화려한 의상과 '대랍시'란 머리 스타일이 많이 나오는데(예: <[[옹정황제의 여인]]>, <[[환주격격]]>), 이런 의상과 대랍시는 청 말기에 서태후가 주로 즐겨 입거나 꾸미던 의상과 머리 형태였다. 오히려 [[옹정제]]나 [[건륭제]] 시기에는 황실 차원에서 사치를 금하면서, 의상과 머리가 화려하지 않고 비교적 수수한 편이었다. 이런 검소함은 궁녀는 물론 황제의 후궁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 <[[보보경심]]>과 <[[연희공략]]>이 이런 옹정~건륭 시대의 의복을 잘 고증한 편이다.] 심지어 식기들과 악기도 비취로 만들었다. 이게 청나라 황실에 할당된 예산 하에서 이루어진, 원래 쓰던 정도의 사치라는 얘기도 있지만 나라가 망국지란의 위기에 있는데 이런 사치를 부림은 좋게 볼 수 없는 게 사실. 밑에서 설명할 이화원 문제만 봐도 그러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