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후회의 (문단 편집) === 돤치루이의 선후회의 제안 === 11월 21일, [[돤치루이]]는 통전을 발표하여 선후회의와 국민대표대회의를 소집하여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임시집정에 취임하겠다는 통전을 발표하여 11월 22일 베이징에 입성했다. 돤치루이의 통전은 크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 1. 법통이 허물어져 철저한 개혁의 길만이 남아있는 이때 우선 중앙정부가 비어 있으므로 임시집정직에 취임, 임시정부를 조직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하겠다. * 2. 국헌제정, 성헌보성, 군제개혁, 재정정리, 교육발전, 실업진흥, 교통개발, 민생구제 등의 대사업은 전국민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하므로 앞으로 1개월 안에 선후회의를 조직하여 시국의 분규를 해결하고 건설방침을 마련하도록 하고 또 선후회의 3개월 안에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미국 필라델피아 회의처럼 일체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겠다. * 3. 이 회의가 완성되는 날 집정직을 사임하겠다. 돤치루이는 자신의 제안이 쑨원의 북상선언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발표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쑨원의 국민회의 소집 주장에 맞서 법통대안과 취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변명으로 해석된다. 당시 전국적으로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시국을 수습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국내외에서 빗발치고 있었는데 돤치루이의 선후회의 제안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일각에서는 돤치루이의 선후회의 제안을 그저 군벌들의 이익 분배를 위한 야합으로 여겨 묵살하였는데 예컨대 [[중국 공산당]]은 임시집정 정부를 무시하고 예비회의를 소집하고 정권담당의 주체를 맡겨 민치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12월 7일, 92개 공단의 127명의 대표가 모였던 상하이 국민회의 촉성회는 이 주장을 채택했다. 하지만 돤치루이 정부 자체를 부인하는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서는 전국적으로 호응하는 이들이 적었고 쑨원이나 국민당도 일단 임시집정 정부를 인정하고 임시집정 정부로 하여금 국민회의를 단계적으로 소집하는 것을 촉구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힘을 얻진 못했다. 반면 돤치루이의 선후회의 주장이나 쑨원의 국민회의 주장이나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여 돤치루이에게 선후회의를 조속히 소집할 것을 요청하는 호응도 뒤따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돤치루이가 주도권을 쥐고 국민회의를 소집하는 것을 지지할 뿐이지 돤치루이의 독재적인 권력을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