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설탕 (문단 편집) === 세계 === [[파일:17e90855f4d4f367d.gif]][* 사탕수수를 끓인 물을 압축시켜 설탕을 만들던 과정을 재현한 모습.]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나 사탕무가 재배된 것은 기원전부터이나 결정화하는 기술은 4세기경 [[인도]] 굽타 왕조 때에 확립되었으며,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권장(꿀 대신 설탕을 선호)하던 [[자이나교]], [[마니교]] 신도들에 의해 [[중앙아시아]]와 [[중동]]으로 전파되면서, 이후 인도와 아라비아 상인들의 중요한 상품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의 하얀 가루 형태가 아니라 [[당밀]]이 제거되지 않아 [[흑설탕|검은 빛이 돌았고]] 엿가락처럼 단단하게 굳힌 덩어리여서 필요에 따라 잘라 썼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주로 수액, 즉 [[시럽]] 형태로 이용되었다. 가공에는 시간과 돈이 들었고 재료도 전량 수입이라 귀중품 취급을 받았다. 상인들은 대개 당액 형태로 거래했으며 이 시럽의 안정화를 위해 다른 식물의 수액을 섞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아라비아검]](gum arabic)이다. 당연히 이걸 마구 [[요리]]에다 뿌려댈 수 없던 관계로, 감미료의 기능보다는 음식을 보존하거나 약에 넣거나 하는 용도로 사용한 듯하다. [[당태종]] 시절의 중국은 설탕 정제기술을 얻기 위해 인도에 두 차례 사절단을 보냈으며 [[알렉산더 대왕]]은 사령관으로부터 '인도에서는 벌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갈대에서 꿀을 얻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는 명대에 이미 대중화가 되어 서민들도 차에 타 먹을 정도가 되었다. 조선 중종 당시 사신이 '사탕(설탕)은 우리가 시장바닥에서 사먹는 '''싸구려''' 식품인데 조선에서 제사에 필요하다니 보냅니다'라고 할 정도. 중국의 경우에는 아열대 기후인 장강 이남에서 사탕수수의 재배가 가능했기에 물류비가 들기는 했어도 [[대운하]]를 통해 화북으로 대량운송이 가능해서 그만큼 가격이 쌀 수 있었지만, 조선은 최남단인 [[제주도]]에서도 사탕수수가 자라기가 힘들어서 그런 것이었다. 결국 기후의 차이를 극복해내지 못한 것이다. 17세기에는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에서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었고,[* 기마 웨카타 신죠(儀間親方真常, 1557~1644)라는 사람이 설탕 제조법을 류큐로 들여왔는데, 이 사람은 중국에서는 [[고구마]], 일본에서는 [[목화]]를 들여왔다. 가히 류큐의 [[문익점]], 아니 그 이상이다.] 일본에서도 [[사츠마]]가 지배했던 [[아마미 군도]]로도 전해졌다. 이윽고 이 지역들의 [[흑설탕]]이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다. 일본 [[화과자]]가 그토록 달달해진 건 이 즈음부터. 흑설탕 매매는 [[류큐 왕국]]의 밥줄이었고, [[사츠마]]가 웅번이 되어 [[메이지 유신]]을 달성할 수 있게 한 자금줄이었다.[* 사쓰마는 기본적으로 영지 규모에 비해서 가난한 번이었다. 조슈 번과 달리 지역의 [[지질]] 자체가 [[제주도]]와 비슷해서 농사에 불리한 지역이었다. 그로 인해 [[에도 시대]] 내내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가고시마 아마미 군도와 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흑설탕은 지금도 그 지방의 유명한 특산품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반인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고, 사츠마번 시대에도 일반인들은 설탕을 [[약]]으로 쓸 정도였으며, 마음대로 핥으면 벌을 받는 시대였다.[[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48343411|일본 설탕회사 사장 어머니의 증언]] 일본이 설탕이 완전히 대중화되고 값싼 식재료가 된 것은 [[1895년]]에 [[타이완]]을 중국으로부터 잠시 할양받아[* 물론 [[1945년]]에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중국에게 패배함으로써 타이완을 중국에게 다시 되돌려줘야 했지만.] [[사탕수수]] 공급이 폭등하고나서 부터다. [[유럽]]에는 [[십자군]] 원정을 통해 11세기경 전파되었다고 한다. 사탕수수의 북방 재배 한계선은 유럽의 경우 지중해 일부(주로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장악한 [[키프로스]])에서만 재배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낮은 편이고, 그 경작에 많은 물과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비싼 작물이었다. 그래도 [[대항해시대]]의 주요 교역품으로서 항해 기술의 발전과 늘어난 식민지를 통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카리브해]] 근방의 여러 섬들을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만들었는데 그중 일부는 섬의 90%가 사탕수수 농장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실상 선착장과 거주지를 제외하곤 모두 사탕수수만 기른 셈으로 그만큼 설탕 플랜테이션이 수익이 높았다. 점차 왕족과 귀족을 중심으로 소비량이 꾸준히 늘어났으며, 나중에는 설탕만을 이용해 설탕 공예처럼 꾸민 음식(!!!)으로 부와 권력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 덕에 설탕 공예는 발전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 같은 경우는 [[치아]]가 죄다 시커멓게 썩었다고 한다. 그래도 수요에 비해 늘 공급이 달렸고 대체물이라 할 수 있는 [[사탕무]]로부터 당액 추출이 성공한 것은 18세기 중반의 일이기에 오랜 기간 동안 귀중품이었다.[*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의 영향이 컸다. 대륙 전체가 무역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다보니 대륙에서 흔한 사탕무에서 설탕을 생산하려 한 것.] 아무튼, [[유럽]]에서는 [[사탕무]] 가공으로 본격적으로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사탕수수 수출이 힘들어진 [[남미]]는 [[커피]]를 사탕수수 대신 재배하게 된다. 위에도 언급되었듯 설탕은 [[산업혁명]]기까지 고가의 기호품에 해당했다. 산업혁명 초창기에는 인구의 증가에 비해 설탕의 생산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분명히 많이 떨어졌었다. [[플랜테이션]] 농장은 16세기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설탕은 귀족들이 우월감을 즐기기 위해서나 먹는 음식이었고 서민들은 그나마 '''설탕보다는 싼''' [[꿀]]을 먹었다고 한다.[* '''[[밀랍]]'''을 만들기 위해 벌집을 조지는 과정에서 꿀을 구할 수 있는 데다, 생산지가 한정된 설탕과 달리 세계 전역에서 양봉이 가능했기에 상대적으로, 어디까지나 설탕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쌌다. 예로부터 문화권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감미료는 사치품에 들어간다.] 산업혁명이 가속화되고 식민지 경영이 보다 효율적으로 변하면서,[* 과거에는 노예 노동에 의지해서 설탕을 생산했는데, [[노예제]] 자체가 효율성이 상당히 낮았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식민지 출신 저임금 노동자로 플렌테이션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생산성이 크게 증가한다.] 그나마 가격이 안정화된다. 이후 귀족들의 사치품이었던 설탕은 노동자의 식생활을 상징하는 식품이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 설탕의 가격은 계속 낮아져서 노동자들이 비교적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고, 같은 돈으로 [[채소]], [[고기]] 혹은 [[곡물]]을 사는 것 보다는 설탕쪽이 열량면에서 훨씬 효율적이었다. 전통적인 농업사회라면 아무리 설탕의 가격이 낮다고 한들 자신들이 수확한 음식으로 배를 채웠겠으나 산업사회에서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또한 이 시기 [[홍차]]가 노동자들에게 폭발적으로 보급된 것 역시도 설탕과 관련이 있는데, '''노동자들은 홍차의 떫은 맛을 중화시키려고 설탕을 넣은 게 아니라, 설탕물의 부담스러운 단맛을 중화시키려고 홍차를 우렸다.''' 살기 위해서는 값싼 설탕물로 버텨야 하는데, 홍차라도 넣어야 이 설탕물이 먹을 만하게 바뀌었기에 노동자들에게 보급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노동자들이 구할 수 있는 홍차는 조악한 포장으로 2년 넘게 운송해서 온 것들이기에, 설탕과 우유 없이 먹기에는 좋지도 않았다. 꿀은 덩어리지지 않은 액체 상태이고, 설탕은 사탕으로 만들어 오래 입안에 머금을 수 있어서인지, 설탕이 대중화된 후에도 사탕이 더 달다는 인식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동요 중에도 꿀보다 단게 사탕이라는 노래가 있었다고. [[산업 혁명]] 이후에는 점차 서민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지고 [[지중해]] 원산인 [[사탕무]]의 발견에 의해 쉽게 입수가 가능해져서, 영국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 국민들이 고기와 채소 등을 주식으로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설탕은 음식을 더 맛있게 해주는 감미료로서 더욱더 많은 곳에 사용되었다. [[음료수]] 등에도 들어가고, 종종 예상치 못한 [[담배]]같은 곳에도 들어간다.[* [[봉산탈춤]]에서도 [[담배]]를 꿀물에 축여놨다는 구절이 있는걸로 보아 생각보다 오래된 방식으로 보인다.] 설탕이 열에 녹으면서 나는 [[캐러멜]]향이 좋기 때문이라고.[* 예를 들어 [[파이프 담배|파이프]] [[연초]]에서는 당도가 중요한 선택 기준 중 하나로 다뤄질 정도로 단맛이 강한 연초가 많다. 버지니아는 원래 담뱃잎 자체의 당도가 높아서 달콤한 향이 난다고는 하지만, 가공된 연초 향을 맡아보면 단내가 확 풍기고, 불을 붙여 태우면 캐러멜 향이 솔솔 풍기며, 빨아들인 연기가 혀에 닿으면 명확하게 단맛이 느껴질 정도로 높은 당도의 연초는 설탕을 첨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순수하게 담뱃잎만으로 그런 높은 당도가 나온다면 사탕수수가 아니라 [[담배(식물)|담배]]를 원료로 설탕을 만들고도 남을 것이다. 뭐 연초 가게에서는 '설탕을 넣어 단맛을 낸 것이다' 라고 하면 싸구려 이미지가 생길까봐 그런지 당분을 첨가했다는 이야기는 극구 피하면서 '[[버지니아]] 연초의 특성'이라고 밀어붙이는 경향이 강하긴 하지만… 이 때문인지 가당 연초는 보통 가향 연초가 아닌 일반 연초로 분류되는 편. 덤으로, 파이핑은 하지 않고 궐련만 피우는 흡연자들에게 고당도 연초 향을 맡게 해주면 "고급 연초에서는 이런 좋은 향이 나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원래 설탕을 넣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음식이나 음료에서 비슷한 향이 난다면 '단 냄새(설탕 냄새)' 라고 느꼈겠지만 설탕과는 별로 인연이 없어보이는 연초에서 달콤한 향이 나면 설탕의 달콤한 냄새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좋은 향기'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로 인해 파이프 흡연자들 사이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달콤한 향기를 본능적으로 좋은 냄새로 느낀다는 것은 정말 사실인 것 같다'는 농담이 종종 나올 정도.]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77412&start=slayer|설탕과 권력]]'이라는 책에서 설탕에 대해 굉장히 잘 설명하고 있으며, 알려지지 않은 관련 사실을 다루고 있는 꽤나 볼만한 책이다. 현재도 사탕수수 재배 및 그 열악한 저임금과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을 두고 말이 많다. 이 또한 [[공정무역]] 대상이기도 하다. 설탕이 대중화된 계기인 플랜테이션은 서인도제도의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노예노동의 비인간성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설탕불매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노예제의 참상과 함께 꿀을 재배하는 유럽의 소농들을 대지주들로부터 보호하자는 것. 소비자운동, 공정무역 운동의 선배 격이다. 유럽 국가의 [[제국주의]] 침략이 늦게 이루어졌던 [[동아시아]] 지역에서 설탕은 서구 문명과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들어 설탕 소비량도 급증하기 시작했지만, 설탕 소비량과 문명 개화 정도는 비례한다는 담론 등이 퍼지기도 했다. 19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기독교]]나 [[육식]]을 문명 개화의 취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과 유사하다.[* 자세한 것은 '[[http://www.koreanhistory.org/2168|근대 한국의 제당업과 설탕 소비문화의 변화]]'나 같은 저자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42197496|설탕, 근대의 혁명]]'을 참고.]이러한 담론이 가장 적극적으로 유통되던 것은 [[메이지]], [[다이쇼]] 시기의 [[일본 제국|일제]]였는데, 웃기게도 그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부터 물자 통제를 시작하면서 설탕에 대한 부정적인 담론을 적극적으로 보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