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삼문 (문단 편집) === 절명시? === ><臨死賦絶命詩> >擊鼓催人命 북소리 둥둥 울려 목숨 재촉해 >回頭日欲斜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기울어 >黃天無一店 황천 길엔 주막 한 곳 없다니 >今夜宿誰家 이 밤을 뉘 집에서 묵어갈고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하노라 >주려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인가 >비록애 푸새엣 것인듯 그 뉘땅에 났는가[* 수양산 : 백이, 숙제가 절개를 지켜 은거하다 굶어 죽은 곳. 수양 대군을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 이제 : [[백이와 숙제]]. 채미 : 고비를 뜯음. 푸새 : 산과 들에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 (녹봉을 의미). 백이와 숙제는 구차하게 연명하며 살았으나 나는 녹봉도 받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라는 의미.] >이 몸이 주거가셔 무어시 될고하니 >봉래(蓬萊)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야 이셔 >백설이 만건곤(滿乾坤) 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봉래산 : 중국의 전설상의 산. 낙락 장송 :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 큰 소나무. 백설 : 수양 대군과 간신 비유. 만건곤 : 하늘과 땅에 가득함.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여도 홀로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처럼 세조와 배신자들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절의를 지키겠다는 결의가 담김. 육신전에 의해서 이미지가 성립된 이후에 추가된 이야기에서는 세조는 태종의 「[[하여가]]」로 성삼문의 마지막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다. 위 시조는 세조의 「하여가」에 화답한 성삼문의 「충의가」로 묘사된다. 저 시조 자체가 뒤에 억지로 붙여 넣은 것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고려하면, 시조를 붙여 넣으면서 배경을 추가한 접착제 역할이라고 보면 되겠다.]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시조들이긴 한데 정말 성삼문이 지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애시당초 조선에서 개인의 시조나 가곡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 게 조선이 제2의 중화라는 [[소중화사상]]이 발생한 조선 후기부터이며 그 이전에 지어진 작품들은 개인 문집에 명확히 전해오는 것이 아닌 이상 저자가 불분명하다. 수양산과 봉래산이 들어가는 저 2수는 1728년 김천택이 편찬한 진본 [[청구영언]]에서부터 성삼문이 지은 것으로 등장한다. 역적의 글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소각하는 게 원칙이란 것을 고려하면 저 작품이 정말 성삼문이 지은 것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 시조들은 실존 인물 성삼문을 평가할 때가 아니라 조선 후기 사육신이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용도로 바라보는 게 타당하다. 더 재미있는 것은 [[청구영언]]에서 작자 미상으로 수록된 시조들이 [[병와가곡집]], [[가곡원류]] 등 후대의 저작으로 가면서 유응부, 이개, 박팽년 등 다른 사육신의 작품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사료에 따라 동일한 시조의 저자가 다르게 기록된 경우도 존재한다. 그리고 시조의 저자를 정하는 과정에 남효온의 육신전이 만들어낸 인물상이 강하게 작용하는 걸 볼 수 있다.[*참고 문헌 신성환, 「사육신 담론의 전변과 조선 후기 시가의 수용 양상」 (민족 문학사 연구, 2011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