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삼문 (문단 편집) === 강희안을 구해줬다? === 고사관수도로 유명한 세종의 처조카 [[강희안]]도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잡혀왔으나, 평소 친분이 있었던 강희안을[* 강희안을 놀리는 시를 지었을 정도였다.] 살리기 위해 성삼문이 그의 연루를 부인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후 강희안은 평소 천시하던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고. 그런데 문제는 이 내용도 [[육신전]]에만 나온다. 실제로 성삼문과 강희안 기사를 시기별로 분류해보면 알 수 있는데, 사육신 사건이 불거진 것은 세조 2년 6월 2일이다. 그런데 성삼문이 한참 고문을 받고 있던 6월 2일 강희안은 예조참의로 승진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4_002|성봉조·홍원용·강곤·박형·봉석주·안숭직·강희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강희안이 해당 사건 관련해서 처음 언급된 것은 세조 2년 7월 1일 기사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7001_005|권기와 최정강이 역모와 관련해 이계전·김인 등의 처벌을 청하나 불윤하다.]] 그런데 성삼문은 동년 6월 8일에 이미 처형되었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206008_002|의금부에서 성삼문 등의 반역죄를 고하니 연루된 자들의 처벌을 명하다.]] 사실 강희안이 연루된 것은 [[불고죄]], 그것도 정말 단순한 사건이었다. 고변 내용이 다음과 같다. >강희안(姜希顔)은 척리(戚里)로 주상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이개(李塏)의 ‘인심(人心)이 흉흉하다.’는 말을 듣고서도 못들은 체하고 피하여 갔을 뿐이요, 즉시 아뢰지 않았습니다. 또 성승(成勝)의 집에서 박팽년(朴彭年)과 하위지(河緯地)가 함께 서로 술마시는 것을 보았는데도 어찌 알지 못했다고 하겠습니까? >---- >강희안(姜希顔) 같은 자는 범연하게 공사(供辭)에 관련된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아니됩니다. 일찍이 이개(李塏)의 ‘인심(人心)이 흉흉(洶洶)하다.’는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 역도(逆徒)들이 성승(成勝)의 집에 모여서 모반을 꾀하던 날에도 역시 참여하였고, 또 성삼문(成三問)을 끌고 함께 이웃집으로 들어갔으니, 어찌 그 음모를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강희안이 처벌 받지 않은 것은 혐의가 기껏해야 불고죄(그것도 민심이 흉흉하다 정도의), 혹은 성승의 집에서 술마셨다 정도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친구 아버지 집에 모여서 술 마신 것이 역적 모의가 되고, 요즘 민심 안 좋다는 말을 들은 것이 역적의 근거가 되었다. 이 때 고발된 사람 중에서는 이개의 숙부였으나 세조에게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좌익공신에 임명된 이계전 같은 인물도 포함되어 있고, 박팽년이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던 당시 하급 관직으로 박팽년의 신임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안철손이 포함되는 등, 조선 시대에 역모 사건 하나 터지면 수백명이 죽어나가는 것이 이런 식으로 엮어들어가기 때문이다. 고발하는 사람들은 자기는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고발 당한 사람들의 빈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서 무조건 사소한 일로 고발을 하는 것이고[* 위에 언급된 안철손을 고발한 것은 그 동복동생인 안신손이었다.], 조선시대 왕들은 이 범위 줄이느라 진땀을 뺀다. 이후에도 강희안은 호조 참의, 중추원 부사, 인수부 부윤 등을 지냈다. 강희안은 성종 7년에 죽었는데,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친척 중 누구가 강희안의 집안 제사를 이을 것인가로 조정에서 논의한 기록까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