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종(요) (문단 편집) === 외정 === 행정 조직을 정비하고, 신장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며 동•서 양방향으로 원정을 나가 서쪽으로는 [[티베트]]와 [[위구르]] 지역([[알타이 지방|알타이 산맥]] 등 신강 북부), 동쪽으로는 [[고려]]에 맞닿을 정도로 제국의 영토를 크게 팽창시켰다. 또한 남쪽의 [[북송]]과도 자주 대규모의 [[전쟁]]을 벌여 그들을 연전연파한 끝에 [[황하]] 이북까지 정복하는데 성공했으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중국 역사상 가장 군사력이 개판이었던 북송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고, 강력한 저항에 북송의 제3대 황제인 [[진종(송)|진종]]과 '''[[전연의 맹]]'''을 체결하게 되었다. [[전연의 맹]]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북송이 요나라에게 매년 대량의 공물을 보내는 대신 형제 관계를[* 송나라가 형, 요나라가 동생. 한마디로 삥은 뜯기지만 자존심은 챙긴 것이었다. [[여요전쟁]]에서 요나라가 대판 깨지고 명목상 사대관계를 맺은 것과 비슷한 점도 있다.] 맺는 것이었다.[* 이때 [[예지황후|소태후]]가 직접 친정하기도 했다.] 이렇듯 [[요나라]]의 영토를 크게 팽창시킨 [[정복자]]였지만 특이하게도 [[여요전쟁|고려와의 대결]]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제1차 침략 때 [[소손녕]]이 [[서희]]의 술책에 낚여 [[강동6주|강동 6주]]를 고려에게 넘겨주었고, 그 강동 6주 때문에 이후 전쟁에서도 고전했다.[* 사실 [[여요전쟁#s-3|1차 침략]]은 직접적인 침략이라기보단 후방 정리 차원에서의 예방 전쟁 성격이 짙었고, 강동 6주는 사실상 [[무주공산]]이었기에 [[고려]]가 점령해도 묵인해주겠다는 것에 가까워서 당시로선 서로 [[윈윈]]하는 상황이었지만, 이후 [[고려]]는 강동 6주를 완전 [[요새#s-1|군사 요새화]]해서 [[요나라]]를 엿먹인다.] 이후 [[여요전쟁#s-4|제2차 침략]]때는 성종이 친히 4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강조(고려)|강조]]와의 [[통주 전투]]에서 고려군을 대파하고,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정작 함락시키지 못한 강동 6주의 군사 요새 중 하나였던 흥화진의 [[양규]]와 귀주의 [[김숙흥]]이 지휘하는 고려군의 후방 [[게릴라]] 전술에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실익은 못 거두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양규와 김숙흥은 견고한 성채에 웅거해 있으면서도 틈틈히 기병을 내보내서 요군의 후방을 마구 교란했다. 그러나 요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던 [[양규]]와 [[김숙흥]]은 전쟁 막바지에 전사하고 말았다. 애초에 [[양규]]와 [[김숙흥]]은 '''고려인 전쟁포로가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 살 생각을 거의 안하다시피 하며''' 전투를 벌였기에 어찌보면 예견된 결과였다.] 그리고 마지막 [[여요전쟁#s-5|제3차 침략]] 땐 [[소배압]]이 퇴각 도중 [[강감찬]]과 맞붙었다가 [[귀주 대첩]]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면서 고려와도 결국 강화를 맺게 되었고, 이로써 '''고려, 요나라, 북송 이 세 나라는 [[세력균형|균형을 이룬 채]] 약 100여 년 동안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다.''' 성종 야율문수노는 장군으로서 역량이 탁월했던 [[명장]]으로, 그가 몸소 친정을 나가 수많은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고전한 상대라고는 [[고려]]가 유일했다. 그마저도 한때나마 수도를 함락시킬 정도로 아예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며, 반대로 말하면 다른 강대국들과 벌인 전쟁에서는 대부분 연전연파했기에 그야말로 [[전신#s-4|전신]]이라 불릴 만한 행보를 보여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