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조(조선)/치세 (문단 편집) == 한계와 비판 == '''능력 면에서는 [[명군]]이라는 탈을 쓴 채 함부로 조선의 시스템을 파괴하여 후대에까지 악영향을 남긴 [[암군]], 윤리 면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폭군]].'''[* 업적을 꽤 많이 남긴 것을 보면 나름대로 괜찮은 임금으로 보일 법도 하지만, 그렇게 평가받기 어렵게 하는 결정적인 과오들이 있다.] 사실 세조의 명성이 꽤나 깎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찬탈도 찬탈이지만 장기적인 전략이나 정치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대단히 부족했던 나머지 큰 부작용이 따르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그것이 민생에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준 것에 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세조 역시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민생 문제와 해결에 꽤 관심이 깊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공신들의 힘을 너무 키워주면 공신들이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세종이 온갖 애를 써서 완성시켰던 훌륭한 정치 문화와 우수한 제도, 정책 여러가지를 일거에 날려버린''' 게 결코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심각한 실책들 중 하나다. [[세종(조선)|세종대왕]]과 [[문종(조선)|문종]]은 국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임금들이었다. [[집현전]] 등을 통한 지속적인 학자 배출과 토론을 통해서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긍정적인 쪽으로 강화시켰다. 단적으로, 세종과 문종 때에는 신하와 군주가 상하일치하여 신하들은 군주를 존경하고, 군주는 신하들을 예로 대하여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서로 상생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50년 만에, 세조는 무려 조선의 정승이자 고명대신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 목을 저잣거리에 효수했으며, 이는 실로 세종과 문종이 쌓아왔던 인의의 정치 시스템의 실질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독재 정치를 선호해서 이러한 시스템을 철저히 왕에게 집중된 독재자 스타일로 꾸준히 밀어붙였다. 주변 훈구 대신들의 왕당파가 있었긴 했지만, 이 훈구 대신들은 세종과 문종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관료가 아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형적인 도구들에 지나지 않았다. 세조는 태종과는 달리 훈구 대신들을 철저히 관리 및 감독하지 않았고 권력의 맛을 보자 이들은 차츰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세조가 그 부패하는 절대 권력의 정점에 있는 폭군 유형에 속했던 만큼, 공신 우대 정책이 너무 과해서 그러한 권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것이다. 세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철저한 반대에 져주는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의해 농락만 당하기 급급한 아버지와 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보인]]과 [[김종서]]가 고명 대신으로 활동하고 황표 정사를 시행할 때 수양대군의 이러한 분노이자 배신감은 꽤나 커졌을 것이다. 그들을 살해할 때 왕권을 유린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세조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세종과 문종은 신권에[* 일단 왕권vs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분히 도식적인 이분법이다.] 농락을 당하고 늘 져주는 왕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세종은 반대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설득하면서 끈질기게 자기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스타일의 군주였다. 게다가 세조 측이 엄청난 국정농단으로 홍보했던 황표정사도 그리 오래 시행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아직 제왕 수업을 받지 못한 단종을 합법적으로 후견인이 된 대신들이 일시적으로 보좌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정작 세조의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 때문에 이후 조선의 왕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끌어들이면서 정치 싸움의 의도치 않은 원인을 제공했다.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휘둘리는 왕으로 여긴 세조의 생각 자체가 매우 근시안적이었던 셈이다. 세종과 문종은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할 때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 나가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여, 신속한 판단력과 발빠른 추진력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어 치명적으로 발목을 잡는 위험도 있었고, 난세에서는 일일이 토론하고 연구할 여유 없이 시시각각 급변해가는 현실에서는 혼란만 자초할 뿐이라는 심각한 한계가 있었다지만, 세종 - 문종 연간이 과연 난세였나 생각해보면 이는 근거가 부족하다. 그래서였는지 계유정난 이전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지만,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평온한 시대였다고 볼 근거가 꽤 되는 편이다. 섭정인 김종서 등의 선대 왕의 충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단종에겐 흠결 낼 수 없는 명백한 정통성이 있었으며 김종서 등이 그의 왕권을 제약한 바는 결코 없었다. 수양 측은 김종서 등이 엄청난 전횡을 저질렀다고 선전했지만, 실제 기록을 면밀히 보면 딱히 그렇게 볼만한 근거도 부실할뿐 아니라, 김종서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조건부로 부여된 권력이었다. 김종서는 외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앙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명문 세도가의 좌장도 아니었다. 세종과 문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승이 되었고, 그 정승이라는 지위로 인해 어린 국왕의 보좌 역할을 잠시 맡았을 뿐이다.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은 단종이 성인이 되는 순간 반납되게 되어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기반 없는 김종서에게 권력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왕의 총신>세도가 공식이 성립할 만큼 왕권이 강력하는 뜻이다. 세도가>>>왕 공식이 성립하는 훗날을 생각해보면...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처럼 [[도박|막가는 성향의 인간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는, 생각보다는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어려운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이 수양 대군의 탁월한 순간 판단력과 결단력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향후 국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긍정적 평가를 받긴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이 부분에서 태종과 세조 사이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 한계점을 거론하는 단락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실정은 이 일방주의 성향에서 기인하는데, 특히 명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핑계를 붙여 친족을 죽인 것은 큰 오점이다. [[집현전]]을 없앤 것만 봐도 더욱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육신]] 문제도 있었겠지만, 수양 대군은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단순한 탁상공론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을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것이 이어져 결국 피를 보고야 만 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다. 그렇다고 세조의 수많은 업적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냉혹하고 권력에 과잉적으로 집착했던 성격 탓에 행한 과오들이 그 업적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꽤 심각하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 십 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에서 그의 왕위 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 행위는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조선)|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나타난다. 태종이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역모를 생각했던 이유로 사형에 처하고, 공신인 [[이숙번]]을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낸 반면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 공신인 [[한명회]]를 자신 인생의 참모이자 친구라며 외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태조(조선)|이성계]]가 세웠던 세자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은 막내 아들인지라 쟁쟁한 형들에 비해 정통성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태종이 방석을 죽일 때 대다수의 대신들도 이에 대해 반발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세조는 정통성이 확고한 단종과 그 대신들을 몰아냈기에 [[이징옥의 난]], [[사육신]] 사건 등을 겪었으며 그 중에서도 중간파들이 일으킨 사육신 사건은 자칫 정권이 다시 전복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조는 공신들을 견제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심과 의리에 기대야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었다고 판단, [[이시애의 난]]을 기점으로 신 공신 세력을 형성하며 구 공신들을 견제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문제는 얼마 안 가서 질병으로 졸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남이]]의 옥사를 기점으로 신 공신은 소멸하고 구 공신을 필두로 "훈구파"로 명명되는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근간이 된다. 또한 지방 유학자 출신의 학자들은 자신들을 사림이라 명명하며 공신 그룹과 대립하게 되었다.[* 다만 이른바 4대 "[[사화]]"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쟁 때문에 생겨났다는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게다가 세조가 실제보다 더 오래 살았다 해도 상황이 나아졌으리라 판단하기는 꽤 어렵다. 구 공신 세력을 견제 하기 위해 신 공신 세력을 육성했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실책이고, 이 실책이 그가 일찍 죽어 그나마 이 정도에서 봉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수양이 육성하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구성군|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등등인데, 남이가 구성군을 질투하여 둘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유자광은 남이의 역모 사건을 고변했을 뿐 아니라 후일 연산군 대에 이르러 [[무오사화]]의 시발점이 되어 놓고는 연산군을 배신해 중종 반정에 참여하는 등 권력을 쫒아 박쥐와도 같은 행적을 보여주었다. 이 쯤 되면, 이들이 과연 제대로 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신 공신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성장했다고 해도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갔을지도 의문이다. 구 공신과 신 공신은 성격 그 자체가 매우 달랐다. 수양이 구 공신 세력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같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동지들이었고 매우 부패한, 약점이 많은 이들이었기에 수양이 그들의 약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귀 영화를 보장하고 그 반대 급부로 자신에 대한 충성을 얻어내어 왕권을 강화하는데 썼던 것이다. 마찬가지 의도로 [[예종(조선)|예종]]에게 자신과 같은 친위대를 붙여준다는 의미로 신 공신 그룹을 육성했으나, 일단 신 공신 세력은 예종과 어떤 정치적인 동지적 관계를 형성할만한 인물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종은 거만한 성격의 [[남이]]를 매우 싫어하여 즉위하자마자 그를 병조 판서에서 해임하였고, 여기에 불만을 가진 남이가 역모를 꾀했다고[* 현재로서는 실제로 남이가 역모를 꾀했는지, 누명을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정황으로 봤을 때, 충분히 남이가 군사를 일으킬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처형당했으며, 구성군 이준의 경우 언제든지 왕권을 노릴 수 있는 종친의 위치에 있었으며, 유자광은 서자라는 위치상 당대 조선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인물이기에 예종에게 충성을 바칠 지도 의문스런 인물이었다. 즉, 수양이 구 공신을 부려 왕권을 확립한 것처럼 예종이 신 공신을 부리거나, 구 공신을 견제하게 할 수 있을만한 세력이 전혀 아닌 이들이었다. 이런 이들이 수양이 더 오래 살아 더 많은 권세를 확보했다면 과연 예종의 왕권 확립에 기여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나이가 있어 성종 대에 이르러 점차 권세를 잃어가던 구 공신에 비해, 젊은 세대이기에 권력을 확보하고 왕권에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인물들이다. 애시당초 공신들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이들을 이용하여 왕권을 확립한다는 상황 자체가 쿠데타 동지 + 약점이 많은 비리 정치인들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것이지, 전혀 이런 상황을 활용할 수 없는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 신 공신을 수양처럼 부릴 수는 없는 일이고, 오히려 이들이 세력화 되었으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그 시점에서 수양이 죽었기에 그만큼 수습이 된 것이지, 만약 이들의 세력이 더 강화될 때까지 수양이 살아남았다면 어떤 [[계유정난|헬게이트]]가 열릴 수 있었을지 걱정스런 상황이었다. 더욱이, 주목할 것은 그나마 구 공신을 견제한답시고 한 짓거리가 새로운 공신 세력을 만든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그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통성 부족을 자력으로 메울 수 없었다는(혹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대 왕들에게까지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예종(조선)|예종]]은 그래도 나름 강한 군주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 공신 세력의 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요절해 버렸고, 사실상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성종은 그야말로 시달렸다. 성종이 세조와는 정반대로 유달리 유교적 도학 정치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세조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 연산군의 폭정이 성종 대 왕권 약화에 기인한다는 주장도 고려해 보자. 그리고 이런 식으로 구 공신들의 입김이 강화된 결과 왕실 종친들은 법으로 벼슬길이 막혀버렸고 정치적 세력으로서 왕실 세력의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해 일각에서는 [[군약신강]], 척신 정치와 외척 세력의 성장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러나 계유정난의 예처럼 권력을 가진 종친에게 찬탈당할 위험도 있는 양날의 검인 점은 감안해야 한다.] 정작 종친들이 계유정난에 가담한 이유가 단종 즉위 후 종친 세력들이 김종서를 비롯한 원로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한다고 불만을 품었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자기 발등을 찍어버린 격. 게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은 후대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언제 왕 자리가 내부의 배신으로 찬탈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선의 역대 국왕들이 통치보다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 주력하는 ~~그 왕권 강화를 위해서라도 결국 통치가 필요하다는 게 함정.~~ 정치적 경향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여겨진다. 정리하면 왕권 자체는 분명 강화쪽으로 방향성을 잡은 면이 있으나 왕권의 안정성에는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게 왕권의 안정성이 약해졌기 때문에 왕권의 강화가 절실히 필요했고 그게 실패한 왕들은 상당한 골치를 썩게 되었다. 게다가 훗날 조선 왕조가 위기에 처하거나 부조리로 고통받는 상황을 만든 원인들의 상당수는 멀리 가면 세조가 귀찮다고 없애버린 시스템의 부재나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멋대로 바꿔버린 장기적 안목이 결여된 정책 등이 원인으로 나온다. [[만악의 근원|한 마디로 조선 왕조 체제의 문제점 상당수를 본인이 만들어버린 셈.]] 실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조선의 법 체계였다. 이전의 법 체계에서는 법 조문이 있으면, 왜 이런 법이 만들어 졌는지,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이런 부분들이 먼저 기록되고, 이후 이에 대한 처리 등이 나열되는 방식이었는데, 수양 대군은 이런 방식이 답답하다고 여겨, 이를 싹 잘라 버리고, 어떤 형벌에 해당하는 죄는 무엇 무엇이고, 형량은 어떻다 라는 식으로 깔끔하게 보이도록 정리했다.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문제가 점점 생기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이런 조항은 왜 생겼는지, 왜 이렇게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는지 이 부분을 전부다 잘라 버려 오히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했는지를 찾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업무 처리에 효율이 떨어지게 되는 문제를 가져왔다. 당장 자기 시대에서야 사람들이 왜 법 조문이 만들어 졌는지 당사자들이니 알고 있으나, 이후 세대를 고려한 정보들을 모두 날려버림으로써 문제를 가져온 것. 당장, 세계의 황당한 법 조문이라고 만들어진 인터넷 문서를 봐도 시대 상황이 바뀐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들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조문들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안다면, 현실에 맞게 개정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쉬운데 이 부분들을 날려 버렸으니 법률 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또한 큰 병크 중 하나로 [[집현전]]의 폐지를 들 수 있다. 물론 [[사육신]]을 위시한 자신의 반대파 대부분이 집현전 출신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이런 자문 기구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국왕 자문 기구의 역할은 뒤에 [[홍문관]], [[규장각]]등이 계승하기는 하지만, 일단 한번 끊어진 맥락을 연결 시키는 것도 어렵고, 문, 무, 잡학에 관련된 모든 국가 전반의 일을 연구하고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했던 집현전에 비하여, 후대 자문 기관인 홍문관은 아무래도 문에 치우친 기관이었고, 덕분에, 성종조에는 문치적으로는 큰 치적들이 있었으나, 국방력 약화, 성리학 일변도의 정치 흐름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즉, 국가 운영의 브레인 집합소였던 집현전을 폐지함으로써, 수양은 자신 이후의 국가의 성장 동력을 없애 버렸으며, 그나마 문치 부분에서는 홍문관이 이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그 이외의 부분에서의 성장 동력은 멈취버리게 된 것이고, 이 덕분에 조선은 이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또한, 그 자신이 왕권 강화를 위해 펼친 정책들 또한 얼마나 그가 근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공신 문제. 평생 그가 싫어하고 비판했던 인물들인 [[고제(전한)|한고조]], [[태조(송)|송태조]]와의 공신 처리 문제를 보면, 그가 갖춘 정치력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가 드러난다. 공신 세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군주의 통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국가 운영에 큰 지분을 가진 이들은 군주에게 있어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도 있고, 힘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자신의 [[태종(조선)|할아버지]]나, [[고제(전한)|한고조]]는 이를 숙청을 통하여 자신의 왕권을 확보하였고, 그가 유약하다고 비판한 [[송태조]]는 배주석병권을 통해 그들의 부귀는 보장하면서 정치적 권력에서는 떼어놓는 온건한 방식으로 공신들을 처리하였다. 덕분에 그들의 후대는 기존의 공신 세력에 대한 부담 없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고제(전한)|한고조]]는 [[고황후 여씨|부인]] 문제로 좀 골치를 썩었으나. 반면, 수양은 오히려 이런 공신 집단을 키워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는데, 이들 집단이 제거되지 않아, 이후 [[예종(조선)|아들]], [[성종(조선)|손자]] 대에 왕권의 제약과 옥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의 안목이 근시안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태종이 세종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며 '악업은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어라'는 말을 똑같이 수양에게 적용시키며, 성종조의 태평성대가 마치 수양이 악업을 지어 준 덕분인 것처럼 말하나 전혀 사실이 될 수 없다. 태종이 말한 '악업'은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 [[회안대군|이방간]] 등을 제거한 1차, 2차 왕자의 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척 세력이 될 수 있는 [[민무구]], [[민무질]] 등의 외가 세력, [[심온]] 등의 처가 세력 등을 제거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세종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 주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수양의 '악업'은 오로지 자신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사육신]]의 옥사, [[단종(조선)|단종]]의 사사 등,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의 숙청이었지, 정작, 후대에 부담이 될 수 있을만한 외척과 공신 세력은 철저히 비호하고 권력을 주었다. 즉, 태종의 저 말을 가지고 수양을 변호할 수는 없고, 성종이 왕권을 확립하고 치세를 만들어 낸 대부분의 공은 바로 [[성종(조선)|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수양의 덕이 아니다. 이 외에 군사적인 실책도 꽤나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 봉족호.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