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 (문단 편집) ==== 주거난 ==== 중소도시 지역은 건설 몇달, 늦어도 몇년안에 아파트를 바로 받을수있었지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이우 등 인구 100만 이상 혹은 각 공화국의 수도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 지역은 토지 부족 및 인구증가 억제를 위한 개발제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짧게는 몇년에서 길게는 10년 정도 대기하는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대기기간 동안 공용아파트 단칸방[* 보통 외국의 스튜디오 아파트나 더 쉽게 설명해서 한국의 원룸을 떠올리면 된다.]에서 세내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파트를 받는다 해도, 건설비용과 건축 용의성을 고려해 거대한 소련의 영토 넓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비좁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도시화율이 높았던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의 출산율이 2명대 초반 대로 크게 낮은 요인이 되었다.[* 이 당시 도시인구가 많은 유럽권 공화국들이 아이를 많이 낳지 않은데 반해 농촌인구가 많은 중앙아시아권이나 캅카스, 몰도바는 출산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이러한 출산율의 불균형은 1960년대부터 소련 당국에서 골칫덩어리로 여겨졌다. 다만 유럽권 공화국이라 해도 주택사정이 널널한 농촌은 출산율이 2명대 중반에서 3명대를 기록했기 때문에 1명대 중후반대인 도시지역에 비해 크게 높아 이 당시에 인구증가는 그럭저럭 이루어져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로 농촌의 출산율도 급감하면서 인구감소 문제가 초래된것. 이 당시에 유럽권 공화국 도시주민들을 대상으로 소련 당국에서 여론조사를 여러번 실시했다. 사실 이를 반영해서 소련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의 넓이는 넓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집의 크기가 커졌다해도 주민들의 구미에 맞는 수준은 아니었다.] 소련 말기인 1990년 두샨베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벌어지던 시위도 [[아시가바트]]와 [[두샨베]]에서 주거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몇년씩 걸려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중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으로 인하여 이주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이 우선적으로 아파트를 배정받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어났다.[* 당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은 아르메니아로 되돌아가던 상황이었다.] 그 대신에 아파트를 받으면 임대료와 관리비는 쌌기 때문에 주거비 부담은 매우 적었다. 1980년대 기준으로 소련 가계소득에서 임대료와 관리비가 차지했던 비율은 3%였다. 이는 왠만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공공임대주택 시스템이 발달된 국가들보다도 소득대비 임대료가 훨씬 낮았으며 이는 저축률을 크게 늘리는데 용이했기 때문에, 소련 시민들의 높은 구매력을 뒷받침하였다.[* 물론 소련 당국과 기업에서 이러한 높은 저축자금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것이 함정이기는 했다. ] 사실 소련이 국토가 넓었음에도 주택이 부족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시골 간 [[사회기반시설]] 격차가 심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산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도시에 우선적으로 투자했기 때문에, 지방 인구가 일자리나 학업을 이유로 대도시에 몰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따라서 농촌 인구는 정체되는데 반해 도시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도심지와 근교 지역 아파트를 받을려는 수요가 필연적으로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때 대대적으로 아파트를 건설한 이후로도 주택난이 있었던 편이었다.[* 좀 더 쉬운 예로 한국에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산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방 인구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이주한 역사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사실 소련 뿐만 아니라 한국같이 국가가 주도적으로 산업화를 '''단기간에 속성으로''' 진행한 국가들의 경우, 공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도시의 식량 공급 및 물가를 이유로 농작물 가격을 저렴하게 유지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농촌 사회의 희생이 따랐다.] 다만 이러한 대도시 주택사정과 별개로 소련인들도 별장을 겸하여 시골에 단독주택을 가지는 경우는 많았다. 주로 국가에서 땅을 받은 경우가 주류였고, 남아도는 시골 주택을 상속, 임대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주택난은 교통과 문화시설을 비롯한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외에도 자동차 보급이 높지 않았던 것도 주택난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가령 자동차를 한 대 받을려면 몇 년에서 십 몇 년씩 걸렸다. 사실 소련은 서방 국가들처럼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 대다수 구소련권 국가에서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보편화된 것은 21세기이고, 그나마도 경제 사정 상 중고차를 수입해 타는 경우가 많다.]이었던 관계로 단순히 땅을 나눠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으로 소련은 계획경제의 특성을 활용해 거주지를 최대한 직장과 인접한 곳으로 배치하여 해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