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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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5] 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6]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약칭 소련(蘇聯)은 20세기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후 건국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7] 로, 냉전 시절 제2세계의 종주국이었다.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되어 만 69년이 되기 직전인 1991년 12월 26일에 해체되었고, 해체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약 2,240만 km²)[8] 와 3번째로 많은 인구(약 2억 9,000만 명)[9] 를 가진 국가였다. 현대 러시아 연방이 과거 소속되어 있었던 상위 국가였으며[10] , 냉전 시기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강대한 국력을 지녔던 국가로 평가받는다.[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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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큰 국가였다. 현재의 러시아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지만, 소련은 그 러시아와 가장 큰 내륙국인 카자흐스탄을 포함해 총 15개국이 합쳐진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했다. 호주보다 2.9배, 브라질보다 2.6배, 캐나다, 미국, 중국의 2.3배 정도 더 넓은 나라가 소련이었으며, 현재의 러시아 연방도 당시 소련 면적의 76%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상 네 번째로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였으며 역사상 소련보다 더 넓은 나라로는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이 있었다.[15] 영향권까지 고려한다면, 몽골 제국이 보유한 영토와 맞먹을 정도의 광대한 크기였다.
지구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여 북아메리카 크기에 버금갈 정도였다. 다만 거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쪽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매우 적었으며 모스크바를 비롯한 우랄 산맥의 서쪽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랄 산맥 동쪽에도 경제가 발달하거나 공업지대의 도시(이르쿠츠크, 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도 있었으나 경작지는 11%에 불과했으며[16] 41%는 타이가 지대였고 16%는 목장 등, 나머지는 툰드라와 동토, 산악 지대도 있었고 건조한 지역도 존재했다.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접경국도 많았는데 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17] , 헝가리까지 6개국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몽골, 중국, 북한까지 6개국과 국경을 접했다.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과도 접경국이었다.[18] 파키스탄과도 와칸 회랑을 두고 15km 정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었으며 일본과도 쿠릴 열도 방면에서 매우 가까웠다.
거대한 영토 덕분에 자원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준에 속했다. 시베리아 지역은 비록 춥고 척박해서 개발이 안 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대신, 석유, 철, 망간, 천연가스, 금, 아연, 니켈 등 다양한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소련의 경제 역시 현재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자원에 상당히 의존한 편이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석유 덕을 엄청나게 많이 본 편이었지만,[19] 1986년 이후 저유가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소련의 최고봉은 현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에 위치한 공산주의 봉으로, 높이는 무려 7,495m인데 세계 50위를 자랑한다. 참고로 50위라고 크게 안 높아 보인다면 매우 큰 오산이다. 7,495m라는 높이는 세계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높이이며, 50위까지 밀린 건 단지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에 밀집된 고봉들이 상위권을 싹쓸이해갔기 때문. 이 산은 소련 내외의 훌륭한 산악인에게 수여되는 눈표범 상의 수상 조건 중 하나이기도 했으며, 소련 해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이스모일 소모니 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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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의 소련 인구는 2억 9,304만 7,571명으로, 당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의 인구가 폭풍성장하여 3억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2020년 현재는 옛 소련 구성국들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미국에 밀리는 4위권이다.
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수백여 개에 달했었다.[20]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억 4,516만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만명), 우즈베크인(1,670만명), 벨라루스인(1,004만명), 카자흐인(814만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과 유대인[21] 도 각각 204만명, 138만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만명.
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위기를 겪으며 국외이민이 증가하거나 출산율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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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자동차 보급률이 비교적 뒤떨어졌던 편이었다. 같은 공산권인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 비해서도 자동차 보급률이 낮았다.
소련 내 자동차 보급률이 낮은 이유는 자동차 생산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시절까지 보통 승용차는 주로 공무용으로 쓰이던 시절이었고, 일반인들이 몰 수 있는 차량은 콜호즈나 지역 사업체 소속 화물차같은 차량이 대다수였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등 지도자들이 민간경제 개선 차원에서 개인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 판매가 허가되었다. 하지만 연간 생산량이 20만대를 겨우 넘기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 내 자가용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었고, 차를 구매한 사람도 몇년치 급여에 해당되는 돈을 현찰로 낸 다음에 몇 년 씩 기다려서 받았다. 따라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초기때에는 자동차 면허를 가진 사람도 차를 필요할때 대여해서 쓰는 수준이었고, 이 때문에 당시에는 렌트카 시스템이 발달되었다.
이후 1970년 소련이 이탈리아 피아트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피아트 124를 기반으로 한 라다 쥐굴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동차 생산량이 연간 200만대를 넘기면서 개인용 승용차의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련의 자동차 수요를 다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으로 자동차를 사려면 몇년씩 대기해야되는것은 여전했다. 이렇게 자동차의 생산량을 늘렸음에도 장시간 대기문제로 불만이 커져나가면서, 페레스트로이카기인 1985년에 외제 중고차의 수입이 허가되었다. 1980년대 말기에는 외제 중고차들이 소련 전역에 널리 퍼지면서 자동차 보급률도 급속히 상승했지만 그럼에도 소련 붕괴직전에도 자동차 보급률은 2가구당 1대꼴이었다.
자동차 가격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싼 경차인 자포로제츠는 일반인의 1~2년치 봉급 수준이었다. 중형차인 라다 쥐굴리는 3-4년치 봉급, 대형차인 가즈 볼가는 구입하려면 5~6년치 봉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평범하게 구입하긴 힘들었다.[22]
사실 원래 소련의 생활비가 낮아 평균 저축률은 높았기 때문에 자동차 보급이 안될 정도는 아니었다.[23] 그럼에도 자동차 보급이 늦어졌던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재고가 없어 신청을 한 뒤 몇 년 정도 순번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수입차는 공산권이나 제3세계 국가에서 생산된 분을 제외하면 수입이 제한되어있었고, 공산권에서 생산된 차라도 중고차는 1985년 이전까지 수입이 제한되어있었다. 이렇게 국산차로는 수요를 벌충하기에 모자랐고 수입차의 수입도 제한되어 있었으니 자가용 자동차의 보급률이 그에 비례해 떨어졌다.[24] 이러다보니 사회초년생들이 자동차를 소유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를 소유하면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자리잡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차를 빨리 구하고싶은 사람은 보통 중고차를 구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중고차 매매가 엄청나게 활성화 되었다.[25]
승용차에 비해 오토바이는 일찍이 대중화되어 있어서 1950년대 이래로 도시에서는 서민들의 교통수단 취급받았고, 노면전차나 지하철, 무궤도 전차같은 대중교통망이 잘 깔려있던 대도시, 중도시와 달리 대중교통망이 빈약한 지방 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것이 일상적이었다. 또는 별장을 오갈때나 여행을 갈때에도 버스를 전세내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자동차 보급률이 높지 않았던 이유에는 도로망 부실도 적잖은 요인을 차지했다. 소련은 지리상 여건이나 기반시설 유지보수비용 등 여러가지 이유로 도로교통에 있어 자동차보다 철도교통을 선호했다. 따라서 바이칼-아무르 철도 등 철도 노선에 주기적으로 투자한 데 반하여 라스푸티차나 부란같은 기후 특성으로 인해 적잖은 유지보수비와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전국적인 도로망 구축에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여기에 계획경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통제를 중요시한 소련 입장에서 개인의 자가용이나 화물차가 중심이 되는 도로교통보다는 철도교통이 통제하기 용이한 이유도 있었다. 이는 소련 입장에서 당장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투자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었다 할 지라도, 장기적으로 물류유통체계를 낙후시키는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소련 내내 이어진 만성적인 물자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자동차 보급률이 떨어진 데 비해 도시철도나 철도가 발달하였다. 특히 노면전차망은 매우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서방국가애서 노면전차를 잇따라 폐선하는 동안 왠만한 중소도시에서도 노면전차들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특히 지하철은 인구 100만 이상 대도시에 건설되었는데 각 공화국 수도를 중심으로 건설했지만 지하철을 방공호 용도를 염두에 두고 깊게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건설기간이 다소 긴 편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이 붕괴된 이후로 재정난 때문에 건설이 중단되거나 뒤늦게 개통되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시기 건축된 지하철로는 모스크바 지하철이나 레닌그라드 지하철, 키예프 지하철, 바쿠 지하철, 타슈켄트 지하철, 예레반 지하철, 트빌리시 지하철등이 있다.
항공의 경우 소련 민간항공부가 아에로플로트라는 이름으로 소련 전역의 민간항공노선을 관리하여 운영했다. 소련 시절 아에로플로트는 소련 정부가 관리하는 국영기관으로써 소련 전역의 민항노선을 관리하였다. 당시 국토가 넓었던 소련 특성 상 항공 교통은 대중교통과 같은 교통수단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다만 해외로 나가는 노선은 정치적 망명 등을 고려하여 쉽게 이용하기 어려웠다.
소련은 국명으로나 헌법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국가 연합 체제를 천명했기 때문에[27] 소련이라는 국가연합에 15개의 국가들이 가맹해 있는 체제였다.[30] 각 공화국들은 별도의 헌법, 의결기구, 그리고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있었으며, 이들의 의원들이 상위 기구인 소련 최고회의 혹은 소련 공산당에 진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조지아 출신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31]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각 공화국 영역은 독립국의 국경이 되었으나 이것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원래 러시아 주민들이 살던 곳을 행정 문제 등으로 인하여 다른 공화국의 영토로 만들거나(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 각 공화국의 경계 설정에 대해 민족적 구분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인구에 맞추어서 설정하거나, 스탈린 시절에는 여러 민족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등[32] 문제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계속 러시아 주민들을 지역개발 등의 이유로 타 공화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도 추진했다.[33] 물론 소련은 "설마 우리가 망하겠어?"라는 생각이었고, 대외적 관측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결국 소련 해체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소련 당시의 행정구역 변경과 민족 이주의 영향으로 인해 소속되었던 공화국들 간 민족 갈등, 영토 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1936년 이전에는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도 존재했지만, 1936년에 그루지야 SSR, 아르메니아 SSR, 아제르바이잔 SSR의 세 개의 SSR로 분리되었다. 1936 재정된 소련 헌법(일명 스탈린 헌법)에 따라 소련 붕괴 전까지는 러시아가 소련의 유일한 SFSR로 남았다.
사실 소련의 국명을 직역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이다. 즉 일반적인 연방제 국가가 아니라 국가간 연합 체제이기도 했으므로, 산하에 연방 국가가 가입하는것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소련을 '연방제' 국가로 볼 경우에는 "연방 국가 안의 연방 국가" 가 있는 경우로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소련 구성국에는 연방을 탈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공화국들의 숫자를 연대별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 밖에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공화국들은 다음과 같다.
헌법에 따라 구성국(SFSR/SSR)으로부터 (명목상의) 자치 권한을 부여받은 공화국들로, 러시아나 캅카스 지역처럼 민족 구성이 복잡한 공화국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구성국과 자치구역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연방 구성국은 독자적인 공용어나 헌법,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자치구역은 소속국이나 소속지역의 행정을 따르면서 일정 수준 재량권을 가진 지방에 가까웠다. 즉, 이론 상으로는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연방을 구성하는 구성국(SFSR, SSR 등)과 구성국 정부로부터 통치를 받는 주(Oblast, Krai 등)의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1922년 소련 건국 초창기, 소련은 당시 비러시아계 민족에게 영토별로 민족국가(Nation)을 부여하려 했다. 따라서 소련 각지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하면서, 당시 민족별 거주지를 행정구역 경계를 설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민족이 같이 거주하는 영토(대표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당시 행정당국의 편의대로 설정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이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면서, 볼가 독일인들처럼 잠재적 적국과 연관되어 있거나 체첸인같이 당국에 반항적인 성향의 소수민족을 고의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이주시켜 당국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탄압했다. 이 때 고려인 강제 이주도 이러한 맥락으로 시행되었다.
소련이 무너진 후에도 대다수 자치구역은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물론 공산당 1당 독재 시절에 여러가지 이유로 경계선을 민족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그은데다가 민족 분포를 고려했다해도 스탈린 시절의 강제 이주로 민족 분포가 뒤바뀐 사례도 있기 때문에[51] 체첸이나 남오세티야, 나고르노-카라바흐, 트란스니스트리아, 크림반도의 경우처럼 결국 전쟁 등의 유혈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소련 시절에는 이러한 민족들이 대부분 동일한 "소련인" 의 정체성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크게 충돌을 빚지 않았고, 소련 당국 또한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로써는 해당 지역에 살고 있는, 즉 소련 시절을 겪은 계층들 중 일부는 이러한 민족 분쟁에 대하여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정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소련은 헌법 상 연방제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했지만 실제로는 일당제 중앙집권국가에 가까웠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을 거치면서 극도로 전체주의적이면서도 파시즘적인 면모를 띄게 되었고, 이러한 통치시스템은 스탈린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전후 북한 (김일성)이나 알바니아 (엔베르 호자), 루마니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같은 사회주의 1인독재국가를 형성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는 탈스탈린화를 내세우면서 소련 사회의 전체주의적인 요소와 1인숭배를 제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소련 사회는 스탈린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근본적으로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독재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는 1980년대 중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후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지속된다.
냉전 시기 소련의 정치체제는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중국과 북한, 쿠바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일당제 정치체계의 기반을 확립했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 공산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소련 장관회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소련/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소련/경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복지제도는 공산국가라는 특성답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탁아소는 전국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임산부에 대한 배려도 매우 잘 되어 있었고[52] , 아이를 기르는데에도 보조금을 충분히 지급해주어 적어도 아이를 기르는데 부담이 크지 않았다.
"노동자"의 나라답게 노동자들의 복지도 굉장히 잘 되어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에는 "새나토리움"(Санаторий)이라는 시설들이 있었는데, 이는 일종의 복지기관으로 노동자들이 휴식과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휴가도 충분히 보장되었는데, 단순히 휴가를 보장하는 수준을 넘어 휴가 비용까지 국가에서 보조해주었고, 필요하다면 별장(다챠)도 공짜로 지급되었다. 이러한 여유로운 휴가제도 덕택에 여름 내내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휴식을 취하는 별장(다챠)문화가 활성화되었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여서 명목상으로는 부의 분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에, 의식주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생활, 여가 생활[53] 과 같이 인간적인 삶을 위한 기본적인 복지가 보장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파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소련 주거문화는 아파트가 주류였다. 시골과 중소도시의 경우에는 당연히 단독주택에서 살았지만 주요 도시의 경우 아파트가 지배적이었다.[54]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일명 코무날카라 불리는 공용주택이 지배적이라 한 가정에 방 하나를 쓰는것이 일반적이었지만[55] 흐루쇼프 이후로는 한 가구 당 한 주택이 기본이 되었다.
다만 대도시 지역의 경우에는 주택난이 상당했고, 아파트를 신청하고 받는데에는 몇년의 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아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단칸방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파트를 받는다 해도, 아파트의 넓이가 거대한 소련의 영토 넓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비좁은 편이었고. 이 때문에 도시화율이 높았던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의 출산율이 2명대 초반 대로 크게 낮은 요인이 되었다.[56] 소련 말기인 1990년 두샨베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벌어지던 시위도 주거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몇년씩 걸려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중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으로 인하여 이주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이 우선적으로 아파트를 배정받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어났다.[57] 그 대신에 아파트를 받으면 염가의 임대료와 관리비만 내면 되었기 때문에 부동산 비용은 매우 쌌고,[58] 집값과 임대료 감당이 힘든 구 소련권 서민들에게는 그래도 이때는 기다리면 염가에 집을 구할수있었다거나, 토끼집이라고 욕했지만, 소련이 망하니까 이 토끼집을 사거나 세들며 사는것도 돈이 많이 든다고 욕하면서 향수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소련이 땅이 위낙 넓기때문에 주택난이 왜 발생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사실 소련 주택난의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과 달리 소련은 자동차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59] 또한 소련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시골 간 인프라 격차가 심한 편이었다. 따라서 지방 인구가 취업이나 학업을 이유로 대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현상은 마찬가지로 발생했고, 그래서 농촌인구는 정체되는데 반해 도시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도심지와 근교 지역 아파트를 받을려는 수요가 필연적으로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때 대대적으로 아파트를 건설한 이후로도 주택난이 있었던것이었다. 다만 이러한 대도시 주택사정과 별개로 소련인들도 단독주택을 가지는 경우는 많았는데, 주로 별장용도로 썼다. 주로 국가에서 땅을 받은것이 주류였고, 남아도는 시골 주택을 상속, 임대한것도 있었다.
이런 주택난은 교통과 문화시설을 비롯한 비롯한 사회기반시설도 중요한 원인을 차지했다. 가령 자동차를 한 대 받을려면 몇 년에서 십 몇 년씩 걸렸다. 사실 소련은 서방 국가들처럼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60] 이었던 관계로 단순히 땅을 나눠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으로 소련은 계획경제의 특성을 활용해 거주지를 최대한 직장과 인접한 곳으로 배치하여 해결하였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르 코르뷔지에 등 현대건축의 영향을 받아 도시계획을 구상할 때 녹지 면적을 많이 조성한 편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구소련권 국가들이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음에도 경제적 상황이 비슷한 국가들에 비해 눈에 보이는 슬럼가가 별로 없어서 경제적 형편이나 도심 외관이 나아보인다는 평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아파트들의 모양새가 비슷비슷하여서 칙칙하다는 평도 듣기도 한다. 다만 소련 붕괴 이후 거주지 등록같은 거주이전 제약이 사라지자, 시베리아나 오지 지역에 정책적으로 조성된 도시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은 경제적, 사회적 여건을 이유로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유령도시가 대거 발생하였다.
소련인들은 별도의 세금 없이 의료 및 약제비까지 모두 무료로 진료받을 수 있었다. 특히 급할 때 치료는 물론이고 돈 많이 들어가는 수술도 무료로 받을 수 있어 접근성도 높았지만, 높은 의료 접근성에 비해 질은 다소 떨어졌다.[61] 소련이 붕괴된 직후 러시아가 극도의 혼란기에 있던 시절인 1990년대에 의료를 유료 서비스로 바꾸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러시아인이 속출하였다. 나중에 상황이 좀 안정되면서 오늘날의 러시아도 무상 의료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별도의 세금을 추가로 납입하며 약제비는 개인 부담이다.
소련은 사회통제를 중요시 여겼다. 특히 보안기관이었던 합동국가정치부(OGPU)가 내무인민위원회(NKVD)로 합병된 1930년대 중반에는 경찰관이 곧 비밀경찰관 그자체였다. 특히 대숙청 시기 NKVD는 소위 NKVD 트로이카라 하여 지역당 서기, 검사, 지역내무서장 3명만 있으면 신분지위를 막론하고 체포하여 즉결처분을 내릴 수 있었다. 트로이카의 활동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1936년 10월부터 1938년 11월 사이 약 150만명 가량이 체포되었으며, 그중 66만명 가량이 총살되었다.출처 (러시아어)
이러한 공포 통치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이후 스탈린 격하 운동을 겪으면서 막을 내렸다. 스탈린 시기 공포 통치를 견뎌내야 했던 공산당 간부들은 스탈린 사후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 분위기를 완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치안기관인 내무부(MVD)와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를 별도 부처로 독립시키고, KGB 또한 소련 정부 직속기관으로 변경하여 정부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후 소련 사회는 전반적으로 안정된 치안을 누렸다.
다만 어디까지나 대숙청 시기와 같이 공권력이 누리던 무소불위의 권력이 줄었을 뿐, 소련 사회는 여전히 많은 면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회였다. 특히 소련은 반정부시위에 시위진압경찰을 투입했던 서방권과는 달리, 당국에 불만을 표출하는 대중시위에 군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으로 대응한 사례가 많았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1957년 노보체르카스크 학살이 있으며, 1989년 트빌리시 시위 유혈진압과 이후 1991년 1월 리가, 빌뉴스에서 소련군과 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한 무력진압 시도는 당시 텔레비전 등을 통해 소련 전국에 보도되면서 이후 소련 해체를 가속화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치면서 사회가 불안정해진 1980년대 말기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범죄율이 급증했다. 소련 붕괴 전인 1990년에서 1991년 즈음에는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군대가 치안에 투입되어 거리에서 군인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중문화는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지만, 냉전시대 소련은 미국에는 밀렸을지언정 여타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 강국이었다. 소련은 발레와 음악, 문학 등 러시아 제국 시절 당시 부터 이어져온 전통을 유지하고 장려했다. 소련 영화의 경우 상업적으로는 미국 영화에 밀렸을지 몰라도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등 유수의 영화 감독들이 세계 영화사 발전에 한 획을 그었으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같은 걸출한 작곡가들이 계속 쏟아져나와 러시아 음악의 명맥은 끊기지 않았다. 오늘날 아직 중국 본토 출신 유명 작곡가들이 현대 음악계에 영향을 준 적도 없다는 점과 비교 가능하다. 소련의 애니메이션 역시 애니메이션 역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동시에 소련은 문화에 대한 검열과 감시가 심한 국가였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국가가 판단하기에 거슬리는 표현은 중죄를 선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혹독했지만, 이후 스탈린에 비판적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62] 하지만 문화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검열은 여전히 엄격했다. 예를 들어 당시 소련 입장에서 "이념적으로" 불순한 록, 펑크 음악가들은 검열에 신경쓰거나 해적판 음반으로 겨우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야 할 때가 많았다. 당시 소련의 검열이 다른 현실사회주의 국가보다는 여유롭다고 해도, 엄연히 창작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현실은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은유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풍자, 비판하거나, 더나아가 아예 서구권으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63]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문화계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그 대가로 소련 시절에 비해 대중 문화 수요의 질적 하락[64] 이 발생하였다. 소련 시절에는 나름 오페라나 순문학 같은 취미를 권장하던 편이었으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국가적 지원이 사라지면서 대중문화 수준이 질적으로 하락했다. 2000년대 들어 경제가 회복되면서 다시 회복할 조짐을 보였으나,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러시아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는 다시 소련식 관제문화로 회귀한다는 반발과 우려가 나오는 중이다.
소련은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스푸트니크)을 쏘아올린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에 개(라이카)[65] 를 보낸 나라이자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유리 가가린)와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발렌티나 테레시코바)를 배출한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달에 착륙(루나 9호)[66] 시킨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 유영(알렉세이 레오노프)을 한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 정거장(살류트 1호)을 만든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 최초로 금성에 착륙(베네라 7호)한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소련은 과학적 공산주의[67] 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과학기술을 우대했고, 엔지니어 및 과학자를 집중적으로 육성했기 때문에 기초과학, 우주과학 기술, 군사공학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소련은 군수분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한 항공우주공학 분야에서 미국과 우위를 다툴만큼 심혈을 기울였고, 이런 과학기술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는 1957년 세계 최초의 무인우주선 발사, 1961년 세계 최초 유인우주선 발사로 보답받았다. 소련은 붕괴하기 전까지 화성, 금성, 수성에도 탐사선을 보내고 소련 붕괴 직전에는 우주왕복선 프로젝트와 이를 수송하기 위한 세계 최대 규모 수송기 제작을 진행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 물리학, 수학, 군사기술에 있어서 소련은 학문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유망있는 인재를 발굴했고, 중공업은 우랄콤비나트 등 막대한 군수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발전시켰다.[68] 특히 핵물리학이나 화학, 천문학에 있어서 소련 과학자들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니콜라이 세묘노프는 소련 성립 이후 러시아에서 최초로 노벨화학상을 받기에 이른다. 소련 시절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경우가 총 4번 있었고 노벨화학상은 전술한 경우 한 번이 있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도 소련 시절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노벨물리학상을 2차례 더 받은 바가 있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3만 명에 달하는 소련의 과학자 및 엔지니어, 기술자들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현재 러시아의 기초과학 수준은 매우 침체된 상태다.
건축학도 발달해 있었다. 특히 소련이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기술은 건물 자체를 통째로 들어올려 옮기는 기술이었는데, 무려 지상에서 2m를 띄웠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게 더 싸기 때문에 그 기술도 많이 쇠퇴했다.
소련인들은 해외여행은 주로 불가리아, 쿠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루마니아를 비롯한 소련과 관계가 친밀한 공산국가나 인도같은 제3세계 국가들 위주로 갔다. 물론 당국에서 예술이나 학술적 목적으로 허락을 얻었을 경우 원칙적으로 1세계 국가로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소련 시절 일반 시민에게는 여권 발급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웠고, 정치적 망명을 두려워하여 설령 허가가 나도 관광 가이드라는 명목 아래 KGB 요원과 동행해야 되는 등 애로사항이 많았다.[69] 따라서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평범한 소련인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제1세계 국가로 여행가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70] 이 때문에 냉전 시기 소련인들의 대표적인 불만사항 중 하나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련인들이 선호했던 국내 관광지로는 주로 기후가 온화한 크림반도를 비롯해 흑해 연안이나, 캅카스, 발트 3국 해안가, 바이칼 호수 등이 있었다.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소련인들의 경우 중앙아시아를 이국적인 관광지로써 선호하기도 했다. 소련에서는 여행권을 주로 패키지 단위로 팔았는데, 일반인을 기준으로 시설이 좋은 리조트나 해변 호텔은 식비 포함해서 3주 머무는데 160~220루블이었고, 일반 호텔은 1달 숙박에 40루블이었다. 직장인의 경우 노동조합이나 지역당 내 공제를 통해 일정액을 직장에서 대신 부담해주었기 때문에 할인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노약자나 미혼모, 퇴역군인은 무료였다. 다만 인기휴양지는 인원제한이 있었기때문에 대개 몇 년에 한번씩 숙박권을 받아 갔다고 하며, 여의치 않으면 가까운 지역이나 별장에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소련은 냉전 시기 한국인들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적대국가로 지정되어 1990년 9월 한국과 소련이 정식 외교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여행금지국가였다. 이 시기 소련을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언론인이나 운동선수 또는 특수직 종사자 같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국인들이 소련을 방문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990년 9월 이후였으나, 불과 1년 뒤 소련이 해체되었다.
[71]
소련의 교육정책은 광대한 영토에 수백여 가지 민족[72] 이 공존하던 다민족 국가에서 소수민족과 러시아인 차이 할 것 없이 보통 교육을 실시하여 문맹을 1950년대에 완전 퇴치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비교하자면 같은 시대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아랍/베르베르 현지인 초등학생 취학률이 6%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다만 공산주의 국가 교육이 그렇듯이 사상 교육 관련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소련 학생들은 공산당의 직접 간섭을 받아야하는 인문학보다는 간섭이 비교적 적은 이공계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73]
소련의 교육 체계는 3단계로 구분되었다. 초등학교는 '시작' 단계로 불렸고, 3~4개의 과목을 교육했다. 중학교는 '불완전한 중등교육'으로 불렸고 7~8개의 과목으로 운영되었다. 중학교까지는 사실상 의무교육이었으며, 이 단계를 모두 마치는데는 10~11년이 걸렸다.
중등교육은 '2차 교육'으로 불렸다. 일반고등학교는 10개의 과목이 있었다. 또한 PTU라는 전문학교가 있었는데, 기계공, 미용사 등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술을 훈련시켰다. 중등교육을 마쳐야만 전문기술직이나 하급 관료가 될 수 있었다. 고등교육은 대학, 연구소, 사관학교를 일컬으며, 이 기관들은 VUZ라는 약자로 불렸다. 중등교육까지 마친 사람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전반적인 교육수준은 높았다고 평가되나, 교육내용이나 수업방식이 다소 보수적이고 딱딱한 면이 있었다고도 평가된다.
소련은 인민복지와 문화증진 차원에서의 체육을 많이 장려했고 스탈린 시절부터 노동과 국방을 위한 준비 같은 체력장 시스템을 도입해 인민의 체력관리에 주목했다.[74] 생활스포츠 수준도 높은 편이었으며, 도시에도 수영장이나 체육관, 운동장 같은 기본시설을 중요시하여 반드시 지었다. 이런 소련의 영향으로 지금도 러시아인들은 대체적으로 운동을 좋아한다. 학교에서도 중시하는데다 많은 대학교에서도 체육이 중요 과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예체능을 경시하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곤 한다.[75]다만 운동싫어하는 학생들은 체육수업 시간을 땡땡이 치기 일쑤였다고
소련 체육 인기 종목은 축구, 농구, 핸드볼, 아이스 하키 등이었다. 세미프로리그도 이들 종목 위주로 돌아갔다. 소련은 문화 복지 및 국위 선양 차원에서 운동만 전문적으로 경기하는 체육구단을 만들었다. 특히 소련에서는 민간기업이 스폰서로써 활동할 수 없는 대신, 군대나 보안기관, 철도청, 광업부같은 정부조직에서 구단을 후원했다. 이렇게 구축된 전문구단들은 소련 붕괴 이후에도 오늘날 옛소련 국가 프로스포츠에서 활동하는 주요 베이스가 되었다.[76]
건국 초창기 소련은 올림픽을 자본주의 축제로 여겨 출전하지 않고 대신 스파르탁 대회(Spartakiade)라는 체육대회를 따로 개최했다. 그러다가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이르러 미국과 긴장이 완화되면서 올림픽이 체제 선전 및 국위선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올림픽 등의 국제대회에 파견할 선수단을 신경써서 준비하는 한편 국가적으로 엘리트 체육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특히 소련은 학교 교육에서 미리 재능있는 스포츠 영재를 적극적으로 선발하여 국가체육계에 투입하고 막대한 혜택을 부여했다. 소련은 성적이 우수한 선수들에게 넓은 아파트를 분양하거나 청바지같은 서구권 상품을 착용하도록 허락하고, 해외로 출국할 수 있는 권리[77] 나 승용차도 상으로 부여했다.[78] 이 때문에 냉전 시기 운동선수는 소련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였다.
세계 체육사에서 소련은 굉장히 선전한 편인데, 올림픽의 경우 프랑스, 영국, 독일 ,중국이 각각 자국 홈에서 1위를 해본 것 말고는 미국의 1위 자리를 뺏어본건 소련, 독립국가연합뿐이었다. (6번,1번)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에도 소련의 기록이 체조, 레슬링, 역도, 카누, 배구, 핸드볼에서 아직도 1위를 기록하고 있다.[79] 다만 올림픽 선수들에게 경기력 향상을 이유로 약물을 투여하는 불법, 편법을 쓰는 경우가 횡행했다. 특히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KGB 차원에서 도핑 검사에 개입하여 검사 결과를 깨끗하게 조작하기도 했다.[80] 이러한 관행은 훗날 러시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2016년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 2022년 카밀라 발리예바 도핑 적발 사건 등 대규모 도핑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81]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РККА, 1918–1946)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ВС СССР, 1946–1991)이 있다.
육군은 전성기 시절엔 대규모 병력과 세계 1위의 기갑부대들을 자랑했고[82] , 해군은 미군에겐 밀렸지만 그래도 대적은 가능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군은 뒤떨어지는 레이더 공학 기술 때문에 대체로 미군에게 밀리는 편이었고 그래서 지상 기반 대공 미사일 시스템에 의존해야 했다.
핵전력으로는 1986년 핵탄두 45,000발을 보유, 미국의 핵탄두 보유 수량인 25,000발을 뛰어넘는, 사실상 미국을 압도하는 핵 전력 물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에게는 주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서방 매체에서는 반공의 영향으로 악의 제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냉전기에 제작된 미디어에서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007 시리즈등 첩보물에서 단골 악역으로 등장하며 레드 던처럼 아예 대놓고 악의 축으로 그리는 반공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에 제작된 매체라도 냉전기가 배경이라면 주인공은 대부분 서방측 인물이기 때문에 소련 등 동구권은 십중팔구 악역으로 그려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예외적으로 2차 대전기를 다루는 미디어에서는 서방이 소련과 동맹하여 공공의 적인 나치와 싸웠다는 역사 덕분에 선역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에너미 앳 더 게이트나 콜 오브 듀티처럼 소련에 대한 서방의 선입견에 따른 왜곡[83] 이 가미되어 안티히어로[84] 역할을 주로 맡고 있다. 그래도 당연하지만 극우 미디어물을 제외하면 무조건 악역, 동네북으로 나오는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는 달리 가끔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해서 훨씬 나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창작물의 소련 출신 캐릭터들은 무조건적인 악역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입체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로 묘사되는 빈도가 늘고 있다.
냉전과 제2차 세계 대전, 그 중에서도 동부 전선을 조금이라도 다룬다면 반드시 등장한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할리우드 영화이면서도 소련군 측을 주인공삼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다. 하지만 철저히 서방의 시각에서 소련을 묘사했기 때문에 영화초반 돌격장면 등 소련군에 대한 왜곡과 고증오류가 담겨있어 실제 구 소련 출신 참전용사들이 해당 영화를 보고 "우리가 저런 꼴로 싸우지는 않았다!"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블랙 코미디 영화 아이언 스카이 속편 엔딩에서 뜬금없이 화성 표면에 있는 낫과 망치 모양의 기지를 보여주면서 떡밥을 뿌렸다.
FPS 역시 동부전선이 배경이라면 반드시 등장하며,[85] 대표적인 등장하는 게임으로 레드 오케스트라와 스나이퍼 엘리트[86] 가 있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주로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등장하며,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적 내지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다만 비슷하게 미드에서 적성국으로 등장하는 나치 독일과는 달리 나사빠진 모습은 별로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어쩔 때는 미국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여주면서[97] 존재감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다.
비틀즈의 Back in the U.S.S.R.이란 곡도 있다. 링고 스타가 폴 매카트니의 훈계질에 빡쳐 밴드를 탈퇴해 폴 매카트니가 대신 드럼을 친 음악으로 유명한 곡이다. 물론 여기서는 소련 그런거 없고 소련 여자가 예쁘다면서 찬양하는 것이 가사의 전부다(...). 오히려 같은 앨범에 수록된 Piggies가 비틀즈 멤버들의 정치적인 성향을 좀 더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코믹스 만화 왓치맨에서는 실제 역사대로 미국과의 냉전을 벌이고 있으나 미국이 닥터 맨하탄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손에 넣은[100] 이후부터는 베트남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미국의 거만하고 무례한 태도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며 동맹국들 사이에서 위신이 추락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끝이 없을 것 같은 평화와 번영 속에서 흥청대는 동안 와신상담하며 균형이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닥터 맨하탄이 미국 대중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어 지구를 등지고 화성에 은둔하자 즉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서독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초강수를 둔다. 미국이 닥터 맨하탄만 믿고 대비를 방만하게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펜타곤의 상호확증파괴 시뮬레이션은 NATO가 간신히 모스크바를 파괴할 동안 서유럽과 미국은 방사능 황무지가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보여준다. 물론 소련도 서방과 함께 공멸하는 것은 원치 않았고 이에 어색한 탐색전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뜻밖에도 뉴욕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파괴되는 대사건[스포일러] 이 벌어져 소련이 미국에 구호물자와 구조 인력을 지원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빠르게 해동되어 냉전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 실제 역사와는 반대로 뉴욕의 파괴로 국력을 심하게 소진한 미국이 소련에게 저자세로 타협한 듯 하다.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러시아 선수들을 언급할 때 소련 선수들이라고 하는 바람에 나머지 멤버들한테 마구 까인 바 있다. 비교적 최근에 멸망한 나라이다 보니, 중장년층과 심지어 1980년대 후반 생들 중에서도 무의식중에 러시아를 소련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격동기의 근현대사를 겪으신 노년의 어르신들은 오히려 러시아란 단어가 더 낯설기도 하고.[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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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5] 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6]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약칭 소련(蘇聯)은 20세기 유라시아 북부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후 건국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7] 로, 냉전 시절 제2세계의 종주국이었다.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되어 만 69년이 되기 직전인 1991년 12월 26일에 해체되었고, 해체 시점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약 2,240만 km²)[8] 와 3번째로 많은 인구(약 2억 9,000만 명)[9] 를 가진 국가였다. 현대 러시아 연방이 과거 소속되어 있었던 상위 국가였으며[10] , 냉전 시기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강대한 국력을 지녔던 국가로 평가받는다.[11][12]
2.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2.2. 국기[편집]

2.3. 국장[편집]

2.4. 국가[편집]

소련의 국가는 총 2가지가 있다.
- 인터내셔널가 (1922~1944)
- 소비에트 연방 찬가 (1944~1992)
3. 역사[편집]

4. 지리[편집]
소련은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큰 국가였다. 현재의 러시아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지만, 소련은 그 러시아와 가장 큰 내륙국인 카자흐스탄을 포함해 총 15개국이 합쳐진 어마어마한 영토를 자랑했다. 호주보다 2.9배, 브라질보다 2.6배, 캐나다, 미국, 중국의 2.3배 정도 더 넓은 나라가 소련이었으며, 현재의 러시아 연방도 당시 소련 면적의 76%에 불과하다. 인류 역사상 네 번째로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였으며 역사상 소련보다 더 넓은 나라로는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이 있었다.[15] 영향권까지 고려한다면, 몽골 제국이 보유한 영토와 맞먹을 정도의 광대한 크기였다.
지구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여 북아메리카 크기에 버금갈 정도였다. 다만 거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쪽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매우 적었으며 모스크바를 비롯한 우랄 산맥의 서쪽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랄 산맥 동쪽에도 경제가 발달하거나 공업지대의 도시(이르쿠츠크, 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도 있었으나 경작지는 11%에 불과했으며[16] 41%는 타이가 지대였고 16%는 목장 등, 나머지는 툰드라와 동토, 산악 지대도 있었고 건조한 지역도 존재했다.
국토가 넓은 나라답게 접경국도 많았는데 서쪽으로는 노르웨이,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17] , 헝가리까지 6개국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터키, 이란, 아프가니스탄, 몽골, 중국, 북한까지 6개국과 국경을 접했다.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과도 접경국이었다.[18] 파키스탄과도 와칸 회랑을 두고 15km 정도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있었으며 일본과도 쿠릴 열도 방면에서 매우 가까웠다.
거대한 영토 덕분에 자원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준에 속했다. 시베리아 지역은 비록 춥고 척박해서 개발이 안 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대신, 석유, 철, 망간, 천연가스, 금, 아연, 니켈 등 다양한 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소련의 경제 역시 현재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자원에 상당히 의존한 편이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석유 덕을 엄청나게 많이 본 편이었지만,[19] 1986년 이후 저유가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소련의 최고봉은 현 타지키스탄의 파미르 고원에 위치한 공산주의 봉으로, 높이는 무려 7,495m인데 세계 50위를 자랑한다. 참고로 50위라고 크게 안 높아 보인다면 매우 큰 오산이다. 7,495m라는 높이는 세계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높이이며, 50위까지 밀린 건 단지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에 밀집된 고봉들이 상위권을 싹쓸이해갔기 때문. 이 산은 소련 내외의 훌륭한 산악인에게 수여되는 눈표범 상의 수상 조건 중 하나이기도 했으며, 소련 해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이스모일 소모니 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5. 인문환경[편집]
5.1. 인구[편집]

1991년 7월의 소련 인구는 2억 9,304만 7,571명으로, 당시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그러나 그동안 미국의 인구가 폭풍성장하여 3억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2020년 현재는 옛 소련 구성국들의 인구를 모두 합해도 미국에 밀리는 4위권이다.
소련은 다민족국가로, 민족 수가 수백여 개에 달했었다.[20] 1989년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의 51.4%인 1억 4,516만명이었으며,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4,419만명), 우즈베크인(1,670만명), 벨라루스인(1,004만명), 카자흐인(814만명) 순이었다. 별도의 자치지역조차 없었던 독일인과 유대인[21] 도 각각 204만명, 138만명이나 되었다. 참고로 고려인은 약 50만명.
대략적으로 보면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을 포함한 동슬라브 민족이 70%를 차지했다. 12%는 튀르크계 민족, 기타 10%였다. 2011년 통계에 따르면 구소련에 해당하던 15개국 인구 총합은 2억 8,767만 4,254명 가량으로 오히려 줄었다. 소련 해체 이후 구소련 구성국이 모두 경제위기를 겪으며 국외이민이 증가하거나 출산율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5.2. 언어[편집]

5.3. 종교[편집]

5.4. 교통[편집]
소련은 자동차 보급률이 비교적 뒤떨어졌던 편이었다. 같은 공산권인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 비해서도 자동차 보급률이 낮았다.
소련 내 자동차 보급률이 낮은 이유는 자동차 생산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시절까지 보통 승용차는 주로 공무용으로 쓰이던 시절이었고, 일반인들이 몰 수 있는 차량은 콜호즈나 지역 사업체 소속 화물차같은 차량이 대다수였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등 지도자들이 민간경제 개선 차원에서 개인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 판매가 허가되었다. 하지만 연간 생산량이 20만대를 겨우 넘기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 내 자가용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었고, 차를 구매한 사람도 몇년치 급여에 해당되는 돈을 현찰로 낸 다음에 몇 년 씩 기다려서 받았다. 따라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초기때에는 자동차 면허를 가진 사람도 차를 필요할때 대여해서 쓰는 수준이었고, 이 때문에 당시에는 렌트카 시스템이 발달되었다.
이후 1970년 소련이 이탈리아 피아트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피아트 124를 기반으로 한 라다 쥐굴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자동차 생산량이 연간 200만대를 넘기면서 개인용 승용차의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련의 자동차 수요를 다 채워주기에는 역부족으로 자동차를 사려면 몇년씩 대기해야되는것은 여전했다. 이렇게 자동차의 생산량을 늘렸음에도 장시간 대기문제로 불만이 커져나가면서, 페레스트로이카기인 1985년에 외제 중고차의 수입이 허가되었다. 1980년대 말기에는 외제 중고차들이 소련 전역에 널리 퍼지면서 자동차 보급률도 급속히 상승했지만 그럼에도 소련 붕괴직전에도 자동차 보급률은 2가구당 1대꼴이었다.
자동차 가격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싼 경차인 자포로제츠는 일반인의 1~2년치 봉급 수준이었다. 중형차인 라다 쥐굴리는 3-4년치 봉급, 대형차인 가즈 볼가는 구입하려면 5~6년치 봉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평범하게 구입하긴 힘들었다.[22]
사실 원래 소련의 생활비가 낮아 평균 저축률은 높았기 때문에 자동차 보급이 안될 정도는 아니었다.[23] 그럼에도 자동차 보급이 늦어졌던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재고가 없어 신청을 한 뒤 몇 년 정도 순번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수입차는 공산권이나 제3세계 국가에서 생산된 분을 제외하면 수입이 제한되어있었고, 공산권에서 생산된 차라도 중고차는 1985년 이전까지 수입이 제한되어있었다. 이렇게 국산차로는 수요를 벌충하기에 모자랐고 수입차의 수입도 제한되어 있었으니 자가용 자동차의 보급률이 그에 비례해 떨어졌다.[24] 이러다보니 사회초년생들이 자동차를 소유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를 소유하면 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자리잡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차를 빨리 구하고싶은 사람은 보통 중고차를 구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중고차 매매가 엄청나게 활성화 되었다.[25]
승용차에 비해 오토바이는 일찍이 대중화되어 있어서 1950년대 이래로 도시에서는 서민들의 교통수단 취급받았고, 노면전차나 지하철, 무궤도 전차같은 대중교통망이 잘 깔려있던 대도시, 중도시와 달리 대중교통망이 빈약한 지방 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에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것이 일상적이었다. 또는 별장을 오갈때나 여행을 갈때에도 버스를 전세내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자동차 보급률이 높지 않았던 이유에는 도로망 부실도 적잖은 요인을 차지했다. 소련은 지리상 여건이나 기반시설 유지보수비용 등 여러가지 이유로 도로교통에 있어 자동차보다 철도교통을 선호했다. 따라서 바이칼-아무르 철도 등 철도 노선에 주기적으로 투자한 데 반하여 라스푸티차나 부란같은 기후 특성으로 인해 적잖은 유지보수비와 주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전국적인 도로망 구축에는 비교적 소극적이었다. 여기에 계획경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통제를 중요시한 소련 입장에서 개인의 자가용이나 화물차가 중심이 되는 도로교통보다는 철도교통이 통제하기 용이한 이유도 있었다. 이는 소련 입장에서 당장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투자비용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었다 할 지라도, 장기적으로 물류유통체계를 낙후시키는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소련 내내 이어진 만성적인 물자부족의 원인이 되었다.
이처럼 자동차 보급률이 떨어진 데 비해 도시철도나 철도가 발달하였다. 특히 노면전차망은 매우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서방국가애서 노면전차를 잇따라 폐선하는 동안 왠만한 중소도시에서도 노면전차들이 건설되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특히 지하철은 인구 100만 이상 대도시에 건설되었는데 각 공화국 수도를 중심으로 건설했지만 지하철을 방공호 용도를 염두에 두고 깊게 건설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건설기간이 다소 긴 편이었다. 이 때문에 소련이 붕괴된 이후로 재정난 때문에 건설이 중단되거나 뒤늦게 개통되는 경우가 많았다. 소련 시기 건축된 지하철로는 모스크바 지하철이나 레닌그라드 지하철, 키예프 지하철, 바쿠 지하철, 타슈켄트 지하철, 예레반 지하철, 트빌리시 지하철등이 있다.
항공의 경우 소련 민간항공부가 아에로플로트라는 이름으로 소련 전역의 민간항공노선을 관리하여 운영했다. 소련 시절 아에로플로트는 소련 정부가 관리하는 국영기관으로써 소련 전역의 민항노선을 관리하였다. 당시 국토가 넓었던 소련 특성 상 항공 교통은 대중교통과 같은 교통수단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다만 해외로 나가는 노선은 정치적 망명 등을 고려하여 쉽게 이용하기 어려웠다.
6. 행정구역[편집]
소련은 국명으로나 헌법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국가 연합 체제를 천명했기 때문에[27] 소련이라는 국가연합에 15개의 국가들이 가맹해 있는 체제였다.[30] 각 공화국들은 별도의 헌법, 의결기구, 그리고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있었으며, 이들의 의원들이 상위 기구인 소련 최고회의 혹은 소련 공산당에 진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조지아 출신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31]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각 공화국 영역은 독립국의 국경이 되었으나 이것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원래 러시아 주민들이 살던 곳을 행정 문제 등으로 인하여 다른 공화국의 영토로 만들거나(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 각 공화국의 경계 설정에 대해 민족적 구분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인구에 맞추어서 설정하거나, 스탈린 시절에는 여러 민족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등[32] 문제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계속 러시아 주민들을 지역개발 등의 이유로 타 공화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도 추진했다.[33] 물론 소련은 "설마 우리가 망하겠어?"라는 생각이었고, 대외적 관측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결국 소련 해체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소련 당시의 행정구역 변경과 민족 이주의 영향으로 인해 소속되었던 공화국들 간 민족 갈등, 영토 분쟁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전쟁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6.1. 구성국[편집]
1936년 이전에는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도 존재했지만, 1936년에 그루지야 SSR, 아르메니아 SSR, 아제르바이잔 SSR의 세 개의 SSR로 분리되었다. 1936 재정된 소련 헌법(일명 스탈린 헌법)에 따라 소련 붕괴 전까지는 러시아가 소련의 유일한 SFSR로 남았다.
사실 소련의 국명을 직역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이다. 즉 일반적인 연방제 국가가 아니라 국가간 연합 체제이기도 했으므로, 산하에 연방 국가가 가입하는것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소련을 '연방제' 국가로 볼 경우에는 "연방 국가 안의 연방 국가" 가 있는 경우로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소련 구성국에는 연방을 탈퇴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공화국들의 숫자를 연대별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 밖에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던 공화국들은 다음과 같다.
- 극동 공화국 (1920~1922)
- 호라즘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1920~1924)
- 부하라 인민 소비에트 공화국 (1920~1924)
- 투르키스탄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8~1924)
-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0~1922)
- 자캅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1920~1936)
- 갈리치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20)
- 베사라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9~1924)
- 리투아니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9)
- 오데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18)
-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1918)
-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40~1956)[38]
- 트란스니스트리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90~1991)[39]
- 타타르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90~1991) [40]
6.2. 자치구역[편집]
헌법에 따라 구성국(SFSR/SSR)으로부터 (명목상의) 자치 권한을 부여받은 공화국들로, 러시아나 캅카스 지역처럼 민족 구성이 복잡한 공화국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구성국과 자치구역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연방 구성국은 독자적인 공용어나 헌법,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자치구역은 소속국이나 소속지역의 행정을 따르면서 일정 수준 재량권을 가진 지방에 가까웠다. 즉, 이론 상으로는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연방을 구성하는 구성국(SFSR, SSR 등)과 구성국 정부로부터 통치를 받는 주(Oblast, Krai 등)의 중간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1922년 소련 건국 초창기, 소련은 당시 비러시아계 민족에게 영토별로 민족국가(Nation)을 부여하려 했다. 따라서 소련 각지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하면서, 당시 민족별 거주지를 행정구역 경계를 설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러 민족이 같이 거주하는 영토(대표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당시 행정당국의 편의대로 설정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이후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면서, 볼가 독일인들처럼 잠재적 적국과 연관되어 있거나 체첸인같이 당국에 반항적인 성향의 소수민족을 고의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이주시켜 당국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탄압했다. 이 때 고려인 강제 이주도 이러한 맥락으로 시행되었다.
소련이 무너진 후에도 대다수 자치구역은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물론 공산당 1당 독재 시절에 여러가지 이유로 경계선을 민족분포를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그은데다가 민족 분포를 고려했다해도 스탈린 시절의 강제 이주로 민족 분포가 뒤바뀐 사례도 있기 때문에[51] 체첸이나 남오세티야, 나고르노-카라바흐, 트란스니스트리아, 크림반도의 경우처럼 결국 전쟁 등의 유혈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소련 시절에는 이러한 민족들이 대부분 동일한 "소련인" 의 정체성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었기에 크게 충돌을 빚지 않았고, 소련 당국 또한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로써는 해당 지역에 살고 있는, 즉 소련 시절을 겪은 계층들 중 일부는 이러한 민족 분쟁에 대하여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7. 정치[편집]

소련은 헌법 상 연방제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했지만 실제로는 일당제 중앙집권국가에 가까웠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을 거치면서 극도로 전체주의적이면서도 파시즘적인 면모를 띄게 되었고, 이러한 통치시스템은 스탈린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전후 북한 (김일성)이나 알바니아 (엔베르 호자), 루마니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같은 사회주의 1인독재국가를 형성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는 탈스탈린화를 내세우면서 소련 사회의 전체주의적인 요소와 1인숭배를 제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소련 사회는 스탈린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근본적으로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독재적인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는 1980년대 중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후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지속된다.
냉전 시기 소련의 정치체제는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중국과 북한, 쿠바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일당제 정치체계의 기반을 확립했다.
7.1. 정당[편집]

7.2. 정부[편집]

7.3. 외교[편집]

8. 경제[편집]

9. 사회[편집]
9.1. 복지[편집]
복지제도는 공산국가라는 특성답게 잘 갖추어져 있었다. 탁아소는 전국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임산부에 대한 배려도 매우 잘 되어 있었고[52] , 아이를 기르는데에도 보조금을 충분히 지급해주어 적어도 아이를 기르는데 부담이 크지 않았다.
"노동자"의 나라답게 노동자들의 복지도 굉장히 잘 되어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에는 "새나토리움"(Санаторий)이라는 시설들이 있었는데, 이는 일종의 복지기관으로 노동자들이 휴식과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휴가도 충분히 보장되었는데, 단순히 휴가를 보장하는 수준을 넘어 휴가 비용까지 국가에서 보조해주었고, 필요하다면 별장(다챠)도 공짜로 지급되었다. 이러한 여유로운 휴가제도 덕택에 여름 내내 텃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휴식을 취하는 별장(다챠)문화가 활성화되었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여서 명목상으로는 부의 분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기에, 의식주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생활, 여가 생활[53] 과 같이 인간적인 삶을 위한 기본적인 복지가 보장되었다.
9.2. 주거[편집]

소련 주거문화는 아파트가 주류였다. 시골과 중소도시의 경우에는 당연히 단독주택에서 살았지만 주요 도시의 경우 아파트가 지배적이었다.[54]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일명 코무날카라 불리는 공용주택이 지배적이라 한 가정에 방 하나를 쓰는것이 일반적이었지만[55] 흐루쇼프 이후로는 한 가구 당 한 주택이 기본이 되었다.
다만 대도시 지역의 경우에는 주택난이 상당했고, 아파트를 신청하고 받는데에는 몇년의 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아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단칸방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아파트를 받는다 해도, 아파트의 넓이가 거대한 소련의 영토 넓이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비좁은 편이었고. 이 때문에 도시화율이 높았던 러시아 서부와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의 출산율이 2명대 초반 대로 크게 낮은 요인이 되었다.[56] 소련 말기인 1990년 두샨베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벌어지던 시위도 주거난으로 아파트를 받는데 몇년씩 걸려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중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으로 인하여 이주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이 우선적으로 아파트를 배정받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어났다.[57] 그 대신에 아파트를 받으면 염가의 임대료와 관리비만 내면 되었기 때문에 부동산 비용은 매우 쌌고,[58] 집값과 임대료 감당이 힘든 구 소련권 서민들에게는 그래도 이때는 기다리면 염가에 집을 구할수있었다거나, 토끼집이라고 욕했지만, 소련이 망하니까 이 토끼집을 사거나 세들며 사는것도 돈이 많이 든다고 욕하면서 향수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소련이 땅이 위낙 넓기때문에 주택난이 왜 발생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사실 소련 주택난의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과 달리 소련은 자동차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59] 또한 소련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시골 간 인프라 격차가 심한 편이었다. 따라서 지방 인구가 취업이나 학업을 이유로 대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현상은 마찬가지로 발생했고, 그래서 농촌인구는 정체되는데 반해 도시인구는 꾸준히 증가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도심지와 근교 지역 아파트를 받을려는 수요가 필연적으로 높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때 대대적으로 아파트를 건설한 이후로도 주택난이 있었던것이었다. 다만 이러한 대도시 주택사정과 별개로 소련인들도 단독주택을 가지는 경우는 많았는데, 주로 별장용도로 썼다. 주로 국가에서 땅을 받은것이 주류였고, 남아도는 시골 주택을 상속, 임대한것도 있었다.
이런 주택난은 교통과 문화시설을 비롯한 비롯한 사회기반시설도 중요한 원인을 차지했다. 가령 자동차를 한 대 받을려면 몇 년에서 십 몇 년씩 걸렸다. 사실 소련은 서방 국가들처럼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60] 이었던 관계로 단순히 땅을 나눠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으로 소련은 계획경제의 특성을 활용해 거주지를 최대한 직장과 인접한 곳으로 배치하여 해결하였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르 코르뷔지에 등 현대건축의 영향을 받아 도시계획을 구상할 때 녹지 면적을 많이 조성한 편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구소련권 국가들이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음에도 경제적 상황이 비슷한 국가들에 비해 눈에 보이는 슬럼가가 별로 없어서 경제적 형편이나 도심 외관이 나아보인다는 평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아파트들의 모양새가 비슷비슷하여서 칙칙하다는 평도 듣기도 한다. 다만 소련 붕괴 이후 거주지 등록같은 거주이전 제약이 사라지자, 시베리아나 오지 지역에 정책적으로 조성된 도시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은 경제적, 사회적 여건을 이유로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유령도시가 대거 발생하였다.
9.3. 의료[편집]
소련은 무상의료가 실질적인 형태로 구현된 인류 역사상 유일한 국가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공공보건인민위원부장에 취임한 니콜라이 세마시코(Nikolai Semashko, 1874~1949)의 주도 아래 국가 주도 의료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소련은 공중보건에 관심을 기울여 결핵, 티푸스, 소아마비같은 질병을 예방하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1978년에서는 알마아타에서 공중보건 증진을 촉구하는 알마아타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모든 국민은 건강 보호를 요구할 자격이 있으며 소련의 모든 의료 기관에 무료로 입장할 권리가 있다.
소련 헌법(1977년 브레즈네프 헌법) 제42조
소련인들은 별도의 세금 없이 의료 및 약제비까지 모두 무료로 진료받을 수 있었다. 특히 급할 때 치료는 물론이고 돈 많이 들어가는 수술도 무료로 받을 수 있어 접근성도 높았지만, 높은 의료 접근성에 비해 질은 다소 떨어졌다.[61] 소련이 붕괴된 직후 러시아가 극도의 혼란기에 있던 시절인 1990년대에 의료를 유료 서비스로 바꾸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러시아인이 속출하였다. 나중에 상황이 좀 안정되면서 오늘날의 러시아도 무상 의료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별도의 세금을 추가로 납입하며 약제비는 개인 부담이다.
9.4. 치안[편집]
소련은 사회통제를 중요시 여겼다. 특히 보안기관이었던 합동국가정치부(OGPU)가 내무인민위원회(NKVD)로 합병된 1930년대 중반에는 경찰관이 곧 비밀경찰관 그자체였다. 특히 대숙청 시기 NKVD는 소위 NKVD 트로이카라 하여 지역당 서기, 검사, 지역내무서장 3명만 있으면 신분지위를 막론하고 체포하여 즉결처분을 내릴 수 있었다. 트로이카의 활동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1936년 10월부터 1938년 11월 사이 약 150만명 가량이 체포되었으며, 그중 66만명 가량이 총살되었다.출처 (러시아어)
이러한 공포 통치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이후 스탈린 격하 운동을 겪으면서 막을 내렸다. 스탈린 시기 공포 통치를 견뎌내야 했던 공산당 간부들은 스탈린 사후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 분위기를 완화하고자 했다. 따라서 치안기관인 내무부(MVD)와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를 별도 부처로 독립시키고, KGB 또한 소련 정부 직속기관으로 변경하여 정부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후 소련 사회는 전반적으로 안정된 치안을 누렸다.
다만 어디까지나 대숙청 시기와 같이 공권력이 누리던 무소불위의 권력이 줄었을 뿐, 소련 사회는 여전히 많은 면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회였다. 특히 소련은 반정부시위에 시위진압경찰을 투입했던 서방권과는 달리, 당국에 불만을 표출하는 대중시위에 군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으로 대응한 사례가 많았다. 이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례로는 1957년 노보체르카스크 학살이 있으며, 1989년 트빌리시 시위 유혈진압과 이후 1991년 1월 리가, 빌뉴스에서 소련군과 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한 무력진압 시도는 당시 텔레비전 등을 통해 소련 전국에 보도되면서 이후 소련 해체를 가속화시킨 시발점이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치면서 사회가 불안정해진 1980년대 말기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범죄율이 급증했다. 소련 붕괴 전인 1990년에서 1991년 즈음에는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에서조차 군대가 치안에 투입되어 거리에서 군인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정도였다.
10. 문화[편집]

대중문화는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지만, 냉전시대 소련은 미국에는 밀렸을지언정 여타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 강국이었다. 소련은 발레와 음악, 문학 등 러시아 제국 시절 당시 부터 이어져온 전통을 유지하고 장려했다. 소련 영화의 경우 상업적으로는 미국 영화에 밀렸을지 몰라도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등 유수의 영화 감독들이 세계 영화사 발전에 한 획을 그었으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같은 걸출한 작곡가들이 계속 쏟아져나와 러시아 음악의 명맥은 끊기지 않았다. 오늘날 아직 중국 본토 출신 유명 작곡가들이 현대 음악계에 영향을 준 적도 없다는 점과 비교 가능하다. 소련의 애니메이션 역시 애니메이션 역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동시에 소련은 문화에 대한 검열과 감시가 심한 국가였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국가가 판단하기에 거슬리는 표현은 중죄를 선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혹독했지만, 이후 스탈린에 비판적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62] 하지만 문화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검열은 여전히 엄격했다. 예를 들어 당시 소련 입장에서 "이념적으로" 불순한 록, 펑크 음악가들은 검열에 신경쓰거나 해적판 음반으로 겨우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야 할 때가 많았다. 당시 소련의 검열이 다른 현실사회주의 국가보다는 여유롭다고 해도, 엄연히 창작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현실은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은유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풍자, 비판하거나, 더나아가 아예 서구권으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63]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문화계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그 대가로 소련 시절에 비해 대중 문화 수요의 질적 하락[64] 이 발생하였다. 소련 시절에는 나름 오페라나 순문학 같은 취미를 권장하던 편이었으나,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국가적 지원이 사라지면서 대중문화 수준이 질적으로 하락했다. 2000년대 들어 경제가 회복되면서 다시 회복할 조짐을 보였으나,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러시아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는 다시 소련식 관제문화로 회귀한다는 반발과 우려가 나오는 중이다.
10.1. 과학기술[편집]
소련은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스푸트니크)을 쏘아올린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에 개(라이카)[65] 를 보낸 나라이자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유리 가가린)와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발렌티나 테레시코바)를 배출한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달에 착륙(루나 9호)[66] 시킨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 유영(알렉세이 레오노프)을 한 나라이자 세계 최초로 우주 정거장(살류트 1호)을 만든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 최초로 금성에 착륙(베네라 7호)한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소련은 과학적 공산주의[67] 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과학기술을 우대했고, 엔지니어 및 과학자를 집중적으로 육성했기 때문에 기초과학, 우주과학 기술, 군사공학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소련은 군수분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한 항공우주공학 분야에서 미국과 우위를 다툴만큼 심혈을 기울였고, 이런 과학기술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는 1957년 세계 최초의 무인우주선 발사, 1961년 세계 최초 유인우주선 발사로 보답받았다. 소련은 붕괴하기 전까지 화성, 금성, 수성에도 탐사선을 보내고 소련 붕괴 직전에는 우주왕복선 프로젝트와 이를 수송하기 위한 세계 최대 규모 수송기 제작을 진행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 물리학, 수학, 군사기술에 있어서 소련은 학문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유망있는 인재를 발굴했고, 중공업은 우랄콤비나트 등 막대한 군수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발전시켰다.[68] 특히 핵물리학이나 화학, 천문학에 있어서 소련 과학자들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니콜라이 세묘노프는 소련 성립 이후 러시아에서 최초로 노벨화학상을 받기에 이른다. 소련 시절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경우가 총 4번 있었고 노벨화학상은 전술한 경우 한 번이 있으며 소련 붕괴 이후에도 소련 시절 쌓은 실적을 바탕으로 노벨물리학상을 2차례 더 받은 바가 있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3만 명에 달하는 소련의 과학자 및 엔지니어, 기술자들이 해외로 이주하면서 현재 러시아의 기초과학 수준은 매우 침체된 상태다.
건축학도 발달해 있었다. 특히 소련이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기술은 건물 자체를 통째로 들어올려 옮기는 기술이었는데, 무려 지상에서 2m를 띄웠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게 더 싸기 때문에 그 기술도 많이 쇠퇴했다.
10.2. 관광[편집]
소련인들은 해외여행은 주로 불가리아, 쿠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루마니아를 비롯한 소련과 관계가 친밀한 공산국가나 인도같은 제3세계 국가들 위주로 갔다. 물론 당국에서 예술이나 학술적 목적으로 허락을 얻었을 경우 원칙적으로 1세계 국가로 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소련 시절 일반 시민에게는 여권 발급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웠고, 정치적 망명을 두려워하여 설령 허가가 나도 관광 가이드라는 명목 아래 KGB 요원과 동행해야 되는 등 애로사항이 많았다.[69] 따라서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 평범한 소련인들이 관광을 목적으로 제1세계 국가로 여행가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70] 이 때문에 냉전 시기 소련인들의 대표적인 불만사항 중 하나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소련인들이 선호했던 국내 관광지로는 주로 기후가 온화한 크림반도를 비롯해 흑해 연안이나, 캅카스, 발트 3국 해안가, 바이칼 호수 등이 있었다.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소련인들의 경우 중앙아시아를 이국적인 관광지로써 선호하기도 했다. 소련에서는 여행권을 주로 패키지 단위로 팔았는데, 일반인을 기준으로 시설이 좋은 리조트나 해변 호텔은 식비 포함해서 3주 머무는데 160~220루블이었고, 일반 호텔은 1달 숙박에 40루블이었다. 직장인의 경우 노동조합이나 지역당 내 공제를 통해 일정액을 직장에서 대신 부담해주었기 때문에 할인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노약자나 미혼모, 퇴역군인은 무료였다. 다만 인기휴양지는 인원제한이 있었기때문에 대개 몇 년에 한번씩 숙박권을 받아 갔다고 하며, 여의치 않으면 가까운 지역이나 별장에 머무는 경우도 많았다.
소련은 냉전 시기 한국인들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적대국가로 지정되어 1990년 9월 한국과 소련이 정식 외교관계를 맺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여행금지국가였다. 이 시기 소련을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언론인이나 운동선수 또는 특수직 종사자 같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국인들이 소련을 방문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990년 9월 이후였으나, 불과 1년 뒤 소련이 해체되었다.
10.3. 교육[편집]
[71]
소련의 교육정책은 광대한 영토에 수백여 가지 민족[72] 이 공존하던 다민족 국가에서 소수민족과 러시아인 차이 할 것 없이 보통 교육을 실시하여 문맹을 1950년대에 완전 퇴치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비교하자면 같은 시대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아랍/베르베르 현지인 초등학생 취학률이 6%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다만 공산주의 국가 교육이 그렇듯이 사상 교육 관련한 문제가 없지 않았다. 소련 학생들은 공산당의 직접 간섭을 받아야하는 인문학보다는 간섭이 비교적 적은 이공계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73]
소련의 교육 체계는 3단계로 구분되었다. 초등학교는 '시작' 단계로 불렸고, 3~4개의 과목을 교육했다. 중학교는 '불완전한 중등교육'으로 불렸고 7~8개의 과목으로 운영되었다. 중학교까지는 사실상 의무교육이었으며, 이 단계를 모두 마치는데는 10~11년이 걸렸다.
중등교육은 '2차 교육'으로 불렸다. 일반고등학교는 10개의 과목이 있었다. 또한 PTU라는 전문학교가 있었는데, 기계공, 미용사 등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술을 훈련시켰다. 중등교육을 마쳐야만 전문기술직이나 하급 관료가 될 수 있었다. 고등교육은 대학, 연구소, 사관학교를 일컬으며, 이 기관들은 VUZ라는 약자로 불렸다. 중등교육까지 마친 사람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전반적인 교육수준은 높았다고 평가되나, 교육내용이나 수업방식이 다소 보수적이고 딱딱한 면이 있었다고도 평가된다.
10.4. 스포츠[편집]
소련은 인민복지와 문화증진 차원에서의 체육을 많이 장려했고 스탈린 시절부터 노동과 국방을 위한 준비 같은 체력장 시스템을 도입해 인민의 체력관리에 주목했다.[74] 생활스포츠 수준도 높은 편이었으며, 도시에도 수영장이나 체육관, 운동장 같은 기본시설을 중요시하여 반드시 지었다. 이런 소련의 영향으로 지금도 러시아인들은 대체적으로 운동을 좋아한다. 학교에서도 중시하는데다 많은 대학교에서도 체육이 중요 과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예체능을 경시하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곤 한다.[75]
소련 체육 인기 종목은 축구, 농구, 핸드볼, 아이스 하키 등이었다. 세미프로리그도 이들 종목 위주로 돌아갔다. 소련은 문화 복지 및 국위 선양 차원에서 운동만 전문적으로 경기하는 체육구단을 만들었다. 특히 소련에서는 민간기업이 스폰서로써 활동할 수 없는 대신, 군대나 보안기관, 철도청, 광업부같은 정부조직에서 구단을 후원했다. 이렇게 구축된 전문구단들은 소련 붕괴 이후에도 오늘날 옛소련 국가 프로스포츠에서 활동하는 주요 베이스가 되었다.[76]
건국 초창기 소련은 올림픽을 자본주의 축제로 여겨 출전하지 않고 대신 스파르탁 대회(Spartakiade)라는 체육대회를 따로 개최했다. 그러다가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이르러 미국과 긴장이 완화되면서 올림픽이 체제 선전 및 국위선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올림픽 등의 국제대회에 파견할 선수단을 신경써서 준비하는 한편 국가적으로 엘리트 체육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특히 소련은 학교 교육에서 미리 재능있는 스포츠 영재를 적극적으로 선발하여 국가체육계에 투입하고 막대한 혜택을 부여했다. 소련은 성적이 우수한 선수들에게 넓은 아파트를 분양하거나 청바지같은 서구권 상품을 착용하도록 허락하고, 해외로 출국할 수 있는 권리[77] 나 승용차도 상으로 부여했다.[78] 이 때문에 냉전 시기 운동선수는 소련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였다.
세계 체육사에서 소련은 굉장히 선전한 편인데, 올림픽의 경우 프랑스, 영국, 독일 ,중국이 각각 자국 홈에서 1위를 해본 것 말고는 미국의 1위 자리를 뺏어본건 소련, 독립국가연합뿐이었다. (6번,1번)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에도 소련의 기록이 체조, 레슬링, 역도, 카누, 배구, 핸드볼에서 아직도 1위를 기록하고 있다.[79] 다만 올림픽 선수들에게 경기력 향상을 이유로 약물을 투여하는 불법, 편법을 쓰는 경우가 횡행했다. 특히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KGB 차원에서 도핑 검사에 개입하여 검사 결과를 깨끗하게 조작하기도 했다.[80] 이러한 관행은 훗날 러시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면서 2016년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 2022년 카밀라 발리예바 도핑 적발 사건 등 대규모 도핑 논란의 원인이 되었다.[81]
10.5. 공휴일[편집]
11. 군사[편집]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РККА, 1918–1946)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ВС СССР, 1946–1991)이 있다.
육군은 전성기 시절엔 대규모 병력과 세계 1위의 기갑부대들을 자랑했고[82] , 해군은 미군에겐 밀렸지만 그래도 대적은 가능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군은 뒤떨어지는 레이더 공학 기술 때문에 대체로 미군에게 밀리는 편이었고 그래서 지상 기반 대공 미사일 시스템에 의존해야 했다.
핵전력으로는 1986년 핵탄두 45,000발을 보유, 미국의 핵탄두 보유 수량인 25,000발을 뛰어넘는, 사실상 미국을 압도하는 핵 전력 물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에게는 주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12. 대중매체에서[편집]
서방 매체에서는 반공의 영향으로 악의 제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냉전기에 제작된 미디어에서는 그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007 시리즈등 첩보물에서 단골 악역으로 등장하며 레드 던처럼 아예 대놓고 악의 축으로 그리는 반공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에 제작된 매체라도 냉전기가 배경이라면 주인공은 대부분 서방측 인물이기 때문에 소련 등 동구권은 십중팔구 악역으로 그려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예외적으로 2차 대전기를 다루는 미디어에서는 서방이 소련과 동맹하여 공공의 적인 나치와 싸웠다는 역사 덕분에 선역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에너미 앳 더 게이트나 콜 오브 듀티처럼 소련에 대한 서방의 선입견에 따른 왜곡[83] 이 가미되어 안티히어로[84] 역할을 주로 맡고 있다. 그래도 당연하지만 극우 미디어물을 제외하면 무조건 악역, 동네북으로 나오는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는 달리 가끔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해서 훨씬 나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창작물의 소련 출신 캐릭터들은 무조건적인 악역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입체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로 묘사되는 빈도가 늘고 있다.
12.1. 영화[편집]
냉전과 제2차 세계 대전, 그 중에서도 동부 전선을 조금이라도 다룬다면 반드시 등장한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할리우드 영화이면서도 소련군 측을 주인공삼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다루었다. 하지만 철저히 서방의 시각에서 소련을 묘사했기 때문에 영화초반 돌격장면 등 소련군에 대한 왜곡과 고증오류가 담겨있어 실제 구 소련 출신 참전용사들이 해당 영화를 보고 "우리가 저런 꼴로 싸우지는 않았다!"고 역정을 냈다고 한다.
블랙 코미디 영화 아이언 스카이 속편 엔딩에서 뜬금없이 화성 표면에 있는 낫과 망치 모양의 기지를 보여주면서 떡밥을 뿌렸다.
12.2. 게임 & 애니메이션[편집]
FPS 역시 동부전선이 배경이라면 반드시 등장하며,[85] 대표적인 등장하는 게임으로 레드 오케스트라와 스나이퍼 엘리트[86] 가 있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에서는 원래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이스턴 프론트 모드에서 주역으로 등장한다. 거기에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는 아예 배경이 독소전쟁이다. 그러나 2의 경우 소련군 캠페인에서 소련군을 나치 독일보다도 악으로 묘사해서 논란이 심하다.
- 벽람항로에 소련을 모티브로 한 세력인 노스 유니온(북방 연합)이 등장한다. 모티브답게 소속 인원들이 전부 하얀 털코트를 입고 있다.
- 월드 오브 탱크와 워 썬더 에서는 소련 국가가 등장하며 대전기 및 냉전기 장비들이 등장한다. 은근슬쩍 소련장비를 버프하고 미국 영국을 너프하는 등 소련 밀어주기를 하고 있다.[87] 물론 최근에는 강력한 골탱의 등장으로 소련의 위세는 많이 꺾인 편이다.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사의 게임 HOI시리즈에서는 배경이 배경인만큼 1936년부터 1944년까지 빠지지 않고 플레이어블 국가로 등장한다. 아무래도 국력이 국력이다보니 게임에서의 성능은 미국과 투탑급이다. 물처럼 쏫아나는 인력으로 독일을 상대로 인해전술을 선사하는데 가히 충격과 공포 수준이다. 다만 게임의 밸런스를 위해 공업력이나 테크는 현실에 비해 딸리게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저 정도이다.근데 문제는 나치 독일에 쳐발린다.
- 심슨 가족 시즌 9의 영화 크림슨 타이드를 패러디한 에피소드에선 러시아 연방이 위장이었고 소련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성 바실리 성당에 낫과 망치 소련깃발이 걸리고 퍼레이드는 장갑차들로 가득차고 소련 보병들이 길을 행진한다. 또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좀비가 되어 관을 깨고 뛰쳐나온다. 나오자마자 하는 말이 "자본주의를 쳐부수자."
- 애니메이션 걸즈 & 판처에 등장하는 학교 중 하나이자 전차도 4대 강호 중 하나이며 현립 오아라이 여학원의 제 63회 전국 전차도 대회 준결승전 상대였던 프라우다 고교의 모티브가 되었다. 학교 이름 자체 부터 러시아의 일간지 프라우다에서 따온 명칭이고 학교의 엠블렘도 소련 국장의 패러디다. 별이 가위로, 낫과 망치가 제도용 자로 바뀐게 포인트다. 학원함도 키예프급 항공모함이고 보유/사용 전차들도 모두 소련제 전차들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전차도 부 대장 카츄샤도 강철의 대원수와 닮은 점이 많다.
-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 AKIRA 에서 원작 만화 후반부에 네오도쿄에 해군 및 해병대 병력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인 미국과 함께 세계를, 나아가 국제사회의 질서를 양분하는 UN상임이사국에 함께 속해 있는 국가로 나온다. 설정상 일본 간토 지구 폭격 이후로 제3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및 북대서양 조약기구, 기타 나토 동맹국들과 비핵전 대전쟁을 벌이며 끝내 승부를 가르지 못하자 서로 휴전 선언을 하고 전쟁을 끝내 다시금 평화 공존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후반부에 네오도쿄의 통제권을 잃은 일본 정부가 교토로 이전함에 따라 홋카이도를 재빠르게 점거하며, 일본 국방군과 소련 해군이 해상대치 중이라는 언급만 되며, 후반부 등장인물 중 초상능력학 연구 과학자인 두브로브스키 박사가 미 함대에 설치된 "주버나일 A"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시리즈에서는 아인슈타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히틀러를 지워버렸기 때문에 소련이 공산화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나치 독일의 포지션이 되고 미국, 유럽 등 자유 진영이 연합군이 되어 소련군의 공산주의 야욕에 대항을 한다.
- 메트로 유니버스의 붉은 라인은 이 소련의 후신을 자처하는 세력이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상징을 내세우는[88] 메트로 내 다른 세력들과 달리 CCCP가 새겨진 구소련의 깃발을 그대로 쓴다. 소련의 국가 중 하나였던 인터내셔널가의 러시아어판을 부르고 다니는 건 덤. 여담이지만 최후의 승자로 볼 수도 있는 세력이기도 하다.[89]
- 폴아웃 시리즈에서는 대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존재하여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언급된 게 없다. 아마 독자적인 유전을 보유한 덕분에 대륙이 자원 부족문제를 겪을 때도 생존이 가능했던 것 같다.[90]
-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장기에프가 소련 대표로 나온다. 장기에프와의 대전 장소도 소련(USSR)으로 나온다.[91]
- 워게임 시리즈에선 당연히 레드 포 세력의 리더로 등장.
- 울펜슈타인 시리즈 세계관에선 이상할 정도로 강해진 나치 제국에게 완벽한 패배를 당해 멸망했으며, 미국과 함께 매체 속 악역으로나 등장하는 등 현실에서 나치가 당하는 비난과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 Workers & Resources: Soviet Republic에서는 플레이어가 소련의 계획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주제이다. 다만 실제 러시아는 아니고 가공의 동유럽 국가이다. USSR은 따로 등장한다.
- 크레믈린의 위기에선 소련의 서기장이 되어 소련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 Warhammer 40,000에서는 소련에서 발사한 로켓을 본뜬 장난감이 4만 년이 지나서도 남아 감상평을 남기게 된다. C.C.C.P라는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로켓의 구조가 너무 원시적이라는 식이다. #
- Atomic Heart에서는 미국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개입하지 않아 나치 독일에 홀로 대항하기 위해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한 평행세계의 소련이 게임의 주 무대이다.
- 인리스티드에서도 모스크바 전투캠페인의 연합군 진영에 있다. 하지만 소련군 기갑하면 떠오르는 t-34가 없다.[92] 그래도 IL-2 같은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장비들도 많고, 모신 나강도 나온다.
- 콜 오브 듀티 시리즈
- 콜 오브 듀티 1부터의 2차 대전 타이틀들.
미국, 영국과 함께 주인공 격으로써 나치 독일과 싸운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싸우는 병사들이 인상적이며, 러시아어를 안쓴다.[93]
21세기가 배경이라 당연히 등장하지 않지만, 작중 메인 적 세력인 국수주의파의 상징이 낫과 망치다. 또한 소련 붕괴의 결정타를 날린 어떤 유명한 폐허도 작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94]
시리즈 처음으로 적국으로 등장. 2차 대전 시리즈의 용맹함은 어따 팔아먹었는지 필요 없어진 병사들을 토사구팽하려질 않나, 적국에 생화학 테러를 감행하려고까지 하는 비겁하고 추악한 나라로 묘사된다.
- HOI에서는 소비에트 연방으로 사실적으로 나타나고 부하린 루트,백군 루트로 가면 반란을 일으켜 소비에트 연방에서 다른 나라로 운영도 가능하다 그리고 독소전이벤트도 있다
- 체인소 맨 에서 등장한다. 작중 배경은 1997년도로 현실에선 이미 소련이 붕괴한 시점이지만 작중에선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다.
12.3. 드라마[편집]
미국 드라마에서는 주로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등장하며,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적 내지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다만 비슷하게 미드에서 적성국으로 등장하는 나치 독일과는 달리 나사빠진 모습은 별로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어쩔 때는 미국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여주면서[97] 존재감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다.
- 기묘한 이야기 시즌 3에서는 마인드 플레이어 다음가는 주적으로 등장한다. 미국보다 먼저 뒤집힌 세계를 연구하고 있었으나 그 넓은 국토 내에서 제대로 된 '관문'을 찾지 못했고 결국 외국으로 눈을 돌리다가 이미 문이 열린 적이 있었던 호킨스 마을에 비밀 기지를 세워서 다시 관문을 열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연구기지를 FBI의 눈에 들키지 않고 운영한 것이나, 마지막화의 쿠키 영상을 보면 미국 연구기관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데모도그까지 길들이는 등 만만치 않은 능력을 보여준다. 다만 암호 통신을 보내다가 더스틴 일행에게 감청당하고 암호가 뚫리는가 하면 비밀스러워야할 적성국의 아지트에서 버젓히 소련군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등[98] 은근히 허당스러운 모습도 보여준다. 시즌 4에서도 등장할 확률이 크다.
- 아폴로 계획보다 먼저 소련이 달착륙에 성공했다는 배경의 Apple TV+의 미국 드라마 포 올 맨카인드에서도 달착륙은 물론 최초로 여성을 달까지 보내고 달 기지까지 노리면서 주인공인 NASA를 계속 긴장시킨다. 일단 미국이 달의 얼음지대에다가 먼저 달 기지를 짓고 여성 우주비행사까지 배출하면서[99] 소련을 따라잡았으나, 소련 또한 미국의 기지 인근에다가 달 기지를 지으며 우주 경쟁을 계속하고 있다.
12.4. 기타[편집]
비틀즈의 Back in the U.S.S.R.이란 곡도 있다. 링고 스타가 폴 매카트니의 훈계질에 빡쳐 밴드를 탈퇴해 폴 매카트니가 대신 드럼을 친 음악으로 유명한 곡이다. 물론 여기서는 소련 그런거 없고 소련 여자가 예쁘다면서 찬양하는 것이 가사의 전부다(...). 오히려 같은 앨범에 수록된 Piggies가 비틀즈 멤버들의 정치적인 성향을 좀 더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코믹스 만화 왓치맨에서는 실제 역사대로 미국과의 냉전을 벌이고 있으나 미국이 닥터 맨하탄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를 손에 넣은[100] 이후부터는 베트남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미국의 거만하고 무례한 태도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하며 동맹국들 사이에서 위신이 추락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끝이 없을 것 같은 평화와 번영 속에서 흥청대는 동안 와신상담하며 균형이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닥터 맨하탄이 미국 대중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어 지구를 등지고 화성에 은둔하자 즉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서독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초강수를 둔다. 미국이 닥터 맨하탄만 믿고 대비를 방만하게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펜타곤의 상호확증파괴 시뮬레이션은 NATO가 간신히 모스크바를 파괴할 동안 서유럽과 미국은 방사능 황무지가 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보여준다. 물론 소련도 서방과 함께 공멸하는 것은 원치 않았고 이에 어색한 탐색전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동안 뜻밖에도 뉴욕이 외계인의 침공으로 파괴되는 대사건[스포일러] 이 벌어져 소련이 미국에 구호물자와 구조 인력을 지원하는 등 군사적 긴장이 빠르게 해동되어 냉전은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다. 실제 역사와는 반대로 뉴욕의 파괴로 국력을 심하게 소진한 미국이 소련에게 저자세로 타협한 듯 하다.
무한도전에서 박명수가 러시아 선수들을 언급할 때 소련 선수들이라고 하는 바람에 나머지 멤버들한테 마구 까인 바 있다. 비교적 최근에 멸망한 나라이다 보니, 중장년층과 심지어 1980년대 후반 생들 중에서도 무의식중에 러시아를 소련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격동기의 근현대사를 겪으신 노년의 어르신들은 오히려 러시아란 단어가 더 낯설기도 하고.[101]
13. 관련 자료[편집]
[1] 국명을 직역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Союз의 뜻은 연맹, 연합으로 유럽연합도 Союз로 번역된다. 1991년 주한소련대사관에서도 쓰인 표현이며 북한에서는 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이 공식 국명이다.[2]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가 사용 중이다.[3] Soviet Union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러시아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IATA 코드가 그것. 소련 해체 직후의 러시아 연방도 이 코드를 잠시 사용한 적이 있다.[4] 이후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이 이 국제 전화 코드를 사용하게 된다.[5] 1990년 한소수교 이전부터 일본을 거쳐 들어온 번역으로 1990년 한소수교 이래 소련이 이 국명의 사용을 인정하면서 보편적으로 많이 쓰이는 표기이다.[6] 러시아어의 'Союз'는 영어로 Union, 즉 연방이 아닌 연맹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 단어이다. 연방은 Federation이다. 러시아어로는 주권국가연맹도 Союз, 유럽연합도 Союз로 번역한다. 소련이 자국의 러시아어 국호에 'Федератия'(연방)을 쓰지 않고 'Союз'(연맹, 연합)를 사용하며, 행정구역 문단과 소련/국호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소련이 형식적으로는 연방이 아닌 국가 연합의 형태를 띠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1년 주한소련대사관에서도 자국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으로 표현하였다.[7] 참고로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는 프랑스의 파리 코뮌이다. 짧은 기간이고 기존 정부를 대체한 것도 아니지만 이는 소련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8]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손꼽히는데, 대영제국과 몽골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이어 역사상 4번째로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가 소련이다.[9] 1위와 2위는 지금도 그렇듯 당연히 중국과 인도였다.[10] 소속 당시에는 러시아 SFSR이라는 국명으로 존재하였다.[11] 오늘날 러시아 연방도 강대국이긴 하나 소련 시절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상당히 쇠퇴하였으며, 현재 러시아의 강대국 지위는 소련 시절 국력을 바탕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의 전신인 러시아 제국도 소련만큼의 위상과 국력은 지니지 못했다.[12]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전세계 오대양 육대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진정한 초강대국의 정의에 부합하는 국가는 아직까지도 미국과 소련 둘 뿐이다.[13] 가사에서 스탈린 찬양 가사가 삭제되었다.[14] 폴란드 침공부터.[15] 소련은 20세기 초엽 혁명 직전의 러시아 제국보다도 작았다. 즉, 제정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게 팔기 이전은 말할 것도 없다. 핀란드와 폴란드 동부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 기존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폴란드와 핀란드가 뚝 떨어져 나갔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서쪽 지역도 폴란드로 넘어가 버렸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하면서 영토의 상당수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16] 그 11%밖에 안 된다는 경작지 넓이도 환산해 보면 콩고민주공화국과 알제리 넓이에 필적한다.[17] 정확하게는 오늘날 슬로바키아 쪽이 소련과 접한다.[18]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이 사할린 섬의 남부, 소련이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괴뢰국인 만주국이 사실상 일본 제국의 영토에 가까웠음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길게 접하고 있던 셈이다. 실제로 만주국 국경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의 충돌이 자주 있었으며, 그 충돌이 크게 번진 것이 할힌골 전투이다.[19] 소련의 원유 생산량은 1974년 미국을 추월하고 세계 1위가 되었다.[20] 오늘날 러시아만 해도 새로 이민 온 인구를 제외하고도 180~200여 가지 민족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21] 독일인들은 소련 초기에 볼가강 유역에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으나 스탈린 시기에 인구의 대다수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되면서 사라졌고, 유대인들은 명목상의 자치구역을 가지고 있었기는 했지만 땅이 척박하고 추워서 정작 유대인들은 얼마 살지 않았다. 그래도 유대인 자치주는 현재까지도 남아있기는 하다.[22] 그래서 당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당 간부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계층인 경우가 많았다.[23] 비슷한 사례로 한국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고급차 1대가 아파트 1채 값에 달하는 금액이었고, 서민차로 출시한 대우 티코도 첫 출시 당시인 1991년에 약 300만원~400만원대였는데 당대 저임금 노동자들의 1년 봉급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이니 큰 차이가 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24] 자가용 1대를 구할려면 10년씩이나 걸린다는 농담도 실제 현실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25] 아니면 복권 경품으로도 자동차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 경우 순번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서 대부분의 당첨자들은 돈보다는 자동차를 받았다.[26] 굵은 선 안쪽이 소련 당시의 영역이며, 분홍색 지역은 러시아로, 나머지 지역은 현재 독립한 국가들로 귀속되었다.[27] 소련 국명을 직역해보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이다.[28] 체코와 슬로바키아 간의 연합.[29]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의 연합.[30] 이와 비슷하게 동유럽 국가들 중 최상위 행정구역을 '공화국'으로 지칭한 나라로는 체코슬로바키아[28] , 유고슬라비아[29] 가 있었다. 사실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모두 지역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지역들이 연합하여 성립된 국가였다. 특히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들은 미국과는 달리 이전부터 그 나름의 체제와 정부,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던 것을 연방이라는 형태로 묶어서 더 큰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원래부터 그냥 갈라서면 남남인 상황이었다. 소련도 해체 뒤에 각 국가들이 남남이 되었는데, 하필 민족주의의 대두 때문에 소련 시절에는 문제가 없던 공화국 별 민족 문제가 심각하게 커져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문제가 번지게 되었다.[31] 출생 자체는 러시아 쿠르스크에서 했지만, 주요 정치경력을 우크라이나 공산당에서 시작하였다. 쿠르스크 주는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과 바로 붙어있어 우크라이나와 가까웠다.[32] 고려인의 경우가 대표적이고, 이외에도 체첸인이나 크림 타타르, 불가 독일인, 칼미크인들도 타 지역으로 강제이주당했다.[33] 물론 이것도 인구가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에 러시아 출산율이 1.9-2.0명 대 수준으로 떨어져서(물론 소련 전체의 출산율은 중앙아시아와 캅카스 일대 공화국의 출산율이 높은 덕택에 2명대 중반정도의 수준을 유지했다.) 시베리아 개발도 하기 힘든 수준이 되자 이주를 권유하는 정책을 중단했다. 그렇지만 타 공화국으로 이주한 이들이 곧바로 러시아로 돌아온 건 아니라서 여전히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카자흐스탄,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의 러시아인 비율은 상당한 편이고, 소련 붕괴 이후에 상당수 러시아계 주민들이 러시아로 복귀했음에도 여전히 남은 러시아인들이 많은 편이다.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도 민족 갈등의 요소가 되고 있다.[34] 소련 정부와 수도 공유[35] 1934년 수도를 하리코프에서 키예프로 이전[36] 소련이 존재했던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벨라루스'가 아니라 '백러시아'로 불렀다. 소련 붕괴 이후 '벨로루시'를 거쳐 벨라루스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하지만 백러시아라는 표현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벨라루스를 러시아어로 표기하면 Белоруссия인데 앞에 붙는 Бело는 Белая에서 따온 것으로 '하얀', 즉 '백'의 뜻이다. 뒤에 붙는 руссия는 Россия에서 따온 것으로 러시아를 뜻한다. 즉 이 두 단어를 합쳐 벨라루스(키릴자로는 벨라루씨야)라 하는데 뜻이 서술되었듯 백러시아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말에 있어서는 오히려 백러시아가 더 적절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독일어와 중국어로는 여전히 'Weißrussland', '白俄罗斯' 즉 '백러시아'라고 쓴다.[참고1] A B C D E 중앙아시아 5국에는 공화국 이름에 '~스탄'을 붙이지 않고 '민족명 + 공화국'으로 불렀다.[37] 1930년에 수도를 사마르칸트에서 타슈켄트로 이전[참고2] A B C 미국 등 몇몇 서방 국가는 해당 국가를 불법 점령 중인 영토로 간주, 소련의 적법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발트 3국 점령 참조.[참고] 미국 등 몇몇 서방 국가는 해당 국가를 불법 점령 중인 영토로 간주, 소련의 적법한 영토로 인정하지 않았다. 발트 3국 점령 참조.[38] 겨울전쟁으로 얻은 카렐리야 동부에 세워졌다. 1956년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자치 공화국으로 흡수되면서 소멸되었다. 현 카렐리아 공화국.[39]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분리 선언. 몰도바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았다.[40]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분리 선언. 러시아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았다.[41] 소련 해체 당시(1991년) 기준이다.[42] 1990년 10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43] 1991년 7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44] 1990년 11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45] 1956년 7월 성립. 상술한 카렐리야-핀란드 SSR이 러시아에 병합되면서 탄생했다.[46] 1991년 7월 성립. 이전에는 자치주.[47] 1924년 해체[48] 1925년 해체.[49] 1941년 해체[50] 나히체반 주민들은 본국인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주민들과 동족인데도 자치공화국이 된 점에서 특이한 사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어서인 듯. 정작 이민족인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는 한 등급 낮은 자치주였다.[51] 물론 스탈린 시절에 강제이주 당한 소수민족 가운데 상당수는 스탈린이 격하되고 나서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기는 했다만 전부 되돌아온 것이 아닌데다가, 되돌아온다 해도 이미 타 민족이 거기에 눌러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52] 임산부-어린이 전용좌석이 형식적이었지만 법적으로 효력을 가졌던 국가였다 [53] 장기 근로자의 경우에는 여름 별장도 주어졌다.[54] 물론 소련 도시민이라고 해서 단독주택 생활을 아예 안한것은 아니고, 따로 단독주택을 가지는 경우는 많았지만 휴가철에 별장 용도로 소유한 것이다.[55] 혁명 직후 운이 좋았던 경우 귀족들이 버리고 간 대주택 안에 여러 가구가 방을 배정받은 경우도 흔했다.[56] 이 당시 도시인구가 많은 유럽권 공화국들이 아이를 많이 낳지 않은데 반해 농촌인구가 많은 중앙아시아권이나 캅카스, 몰도바는 출산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이러한 출산율의 불균형은 1960년대부터 소련 당국에서 골칫덩어리로 여겨졌다. 다만 유럽권 공화국이라 해도 주택사정이 널널한 농촌은 출산율이 2명대 중반~3명대를 기록했기 때문에 1명대 중후반대인 도시지역에 비해 크게 높아 이 당시에 인구증가는 그럭저럭 이루어져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로 농촌의 출산율도 급감하면서 인구감소 문제가 초래된것. 이 당시에 유럽권 공화국 도시주민들을 대상으로 소련 당국에서 여론조사를 여러번 실시했다. 사실 이를 반영해서 소련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의 넓이는 넓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집의 크기가 커졌다해도 주민들의 구미에 맞는 수준은 아니었다.[57] 당시 아르메니아인 난민들은 아르메니아로 되돌아가던 상황이었다.[58] 1980년대 소련 가계소득 대비로 임대료와 관리비가 차지했던 비율은 1980년대 기준으로 3%로, 왠만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공공임대주택 시스템이 발달된 국가들보다도 소득대비 임대료가 훨씬 낮았다.[59] 미국 또한 치안 문제때문에 대도시 주거에 집착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대신 대중교통 체계가 부실한 경우가 많아 교통체증 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대도시라 하더라도 교통이 편리할 경우 집값이 비싼 편이다.[60] 대다수 구소련권 국가에서 1가구 1자동차 소유가 보편화된 것은 21세기이고, 그나마도 경제 사정 상 중고차를 수입해 타는 경우가 많다.[61] 특히 지역간 격차가 큰 문제로 손꼽혔다. 물론 이 문제는 어느정도 국토가 넓은 나라라면 다들 겪는 문제라 특이한것이 아니지만, 소련은 그 정도가 상당히 심한 편이었다. 가령 영아사망률의 경우에도 도시화율이 높은 발트 3국은 선진국 수준의 양호한 수치를 보였지만. 농촌에 주거하는 비율이 높은 중앙아시아권 국가들은 영아사망률이 개도국 수준으로 높게 나오는 식이었다.[62] 오늘날 소련 수용소의 현실을 고발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당시 소련에서 출판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63] 대표적인 사례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영화 백야로 유명한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이 있다.[64] 한국만 해도 케이블 TV가 보급되기 이전 다큐멘터리 등등의 시청률이 높았다가 케이블 TV 보급 이후 채널 선택권이 폭증하면서 결과적으로 교양 관련 프로그램 시청률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하락하는 문제 등이 발생했었다.[65] 우주에 나간 최초의 생물은 아니다. 그 전에도 초파리를 인공위성에 띄워 보냈었기 때문. 정확하게는 그때까지만 해도 라이카가 우주에 나간 최초의 생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나중에 우주경계선을 정의하면서 바뀌었다.[66] 이보다 앞선 루나 2호는 착륙이라기보다는 충돌시킨 것이다.[67] 애초에 공산주의의 옛날 이름이 '과학적 사회주의'였고 유물론 철학을 중시한 자연 변증법이라는 책까지 나올 정도로 과학성을 중요시했다.[68] 다만 미국과 유럽에서 매우 발전되어 있던 분야인 전기, 전자공학과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는 그다지 성과가 좋지 못했다.[69] 그럼에도 냉전 시기 예술가나 운동선수를 비롯해 해외여행이 가능했던 고급 인력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워낙 많았다.[70] 쉬운 예를 들자면 1989년 여행자유화 이전 일반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갈 때 난이도가 당시 소련인들이 해외여행을 갈 때 난이도와 비슷했다.[71] 1987년 디즈니에서 제작한 소련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소련 교육의 모습을 볼 수 있다.[72] 오늘날 러시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민족집단만 180여 가지이다.[73] 출처: 러시아의 역사 4판(1977) / 니콜라스 랴자노프스키 저[74] 물론 국민의 체력은 전시에는 전투력과 연관된다는 것도 감안했을 것이다. [75] 당연히 시험으로 체조나 턱걸이 같은 걸 해야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외국인이면 빼주는데, 체육시험은 대부분의 한국학생이 통과하기 힘들다. 그래도 수업 자체는 수강해야 하는 편.[76] 대표적으로 축구에서는 오늘날 독립국가연합에서 최상위권 팀으로 분류되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디나모 키이우 등이 있다.[77]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소련에서는 일반인이 동구권을 제외한 해외에 출장 및 여행을 가기 매우 어려웠다.[78] (출처) Sports Psychologists and the Soviet Athlete, Herb Weinberg, March 12, 1978, New York Times[79] 참고. 네이버 하계올림픽 우승국 참고[80] (출처) The 1980 Olympics Are The 'Cleanest' In History. Athletes Recall How Moscow Cheated The System, Aleksei Aleksandrov, July 22, 2020.[81] 사실 2000년대 전까지 소련 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동독 등 당시 체육계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이던 국가들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다만 미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 미국 체육계 내부인사들이 올림픽에서 도핑이 이루어진 사실을 폭로하면서 미국반도핑기구(USADA)가 국제표준에 맞추어 독립기구로 발족하면서 도핑심사를 강화해 갔다면, 러시아에서는 소련 시절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아 연방보안국 차원에서 국가적인 도핑 프로그램을 주도하고 심지어 러시아반도핑기구 차원에서 도핑 프로그램을 은폐하다가 결국 내부자 고발에 의해 실상이 폭로되었다.[82] 다만 그 명성에 비하면 보급 역량은 굉장히 형편없었다.[83] 사실상 자살돌격이나 다름없는 우라돌격이나 후퇴하는 병사를 즉결처형하는 정치장교 등.[84] 악역과 싸우긴 하지만 선하지 않은 존재[85] 소련총도 많이나온다 예시로 AK-47[86] 2차 대전기 배경임에도 특이하게 적으로 등장한다.[87] 월드 오브 탱크를 만든 워게이밍넷, 워썬더를 만든 가이진 둘 다 옛 소련 지역에 있는 회사이다. 특히 가이진은 돈바스 전쟁에서 노보로시야를 후원했다는 의혹이 있다.[88] 제4제국은 하켄크로이츠를 변형한 깃발을 쓰며, 한자 동맹은 링라인이라는 정식 명칭에 걸맞게 갈색 원을, 주인공 세력인 레인저는 메트로의 M에서 따온 문양을 상징으로 쓴다.[89] 메트로: 라스트 라이트의 D6 전투에서 크게 패해 세력이 위축되었으나 여전히 4제국과 기타 공동체보단 크고, 레인저를 거의 반 몰락 상태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가장 위험한 적수였던 한자 동맹은 잔존 러시아 정부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붉은 라인에 관심이 멀어졌기 때문이다.[90] 따로 생각해 보면 다른 냉전 매체에서 다루는 것과 달리 매우 굴욕적인 모습이다. 더럽게 큰 땅덩어리와 여러 공산주의 국가를 주도했던 국가인데 해당 시리즈에서는 중국한테 밀려서 2인자 공산주의 국가로 물러났고 다른 나라가 전쟁으로 난장판이 되던 시기에도 언급조차 없다.[91] 스트리트 파이터 2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그 당시에는 소련이었다.[92] t-34는 이미 1940년부터 생산했었다.[93] 당연하겠지만 게임적 허용이다. 애초에 그렇게 따지려면 외계 세력들 명칭에 영어식 명칭을 쓰는 것도 문제삼아야 한다,하프라이프 시리즈의 콤바인이라던가, 헤일로 시리즈의 코버넌트도 고유명사로 바꿔야 한다는 소리이다.[94] 참고로 프리피야트 캠페인에서 PPSh-41을 든 소련군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95] 단, 정사는 아니다.[96] 아직 연방이 되기전 볼셰비키 정부였을 때다.[97] 특히 정보 체제만큼은 언제나 소련이 미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지금의 중국보다도 더.[98] 이걸 보고 스티브 해링턴은 레드 던 드립을 쳤다.[99] 이 때문에 현실의 역사보다 성평등이 더욱 가속화했다. NASA의 수장이 베르너 폰 브라운박사의 제자인 여성이고, 흑인 여성 우주비행사도 등장한다. 어찌보면 체제경쟁의 의도치 않은 순기능이었던 셈.[100] 사실 닥터 맨하탄은 언제든 원하는대로 할 수 있고 미국을 떠나 소련에 붙는다 하여도 그것에 대해서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고 아예 소련이고 미국이고 집어치우고 지구를 통째로 불태우고 얼리고 짜부려뜨려도 인간들은 저항할 방법이 전혀 없으니 손에 넣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일단 미국 대중이 믿는대로 표현하자면 그랬다.[스포일러] 상호확증파괴 핵전쟁을 막고자 했던 오지만디아스의 음모였다.[101] 그렇게 된 이유중 하나가 과거 소련이 존재했던 시절에도 서방권에서 소련을 지칭할 때 러시아라고 대신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은연중에 러시아=소련 이렇게 된 것도 있다. 영화 록키 4를 보면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에, 소련 선수와 경기를 하는 모습인데도 '러시아'라고 지칭하는 예가 많다. 특별히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집어서 이야기할 상황이 아닌, 소련을 지칭할 때 인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