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조귀 (문단 편집) == 죽음 == 1852년 8월 말, 소조귀는 태평천국의 기지인 천저우에서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창사를 점령하려 했다. 그들은 9월에 창사에 도착했고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포위가 약간 진행되는 상황에서 소조귀는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전방에 나서서 자신의 머리 위로 거대한 깃발을 게양했다. 이건 지휘관의 위치를 알려준 셈이나 다름없었고, 창사의 성벽에서 발사된 대포알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 소조귀는 부상으로 인해 9월 말 사망하고, 창사 공략은 11월에 완전히 좌절되었다. 소조귀의 죽음을 불러온 행동은 중국의 역사가들에게 "영웅주의도 아닌 '멍청한 충성심과 용기'의 또다른 예시"라며 까이게 된다.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홍수전은 그의 명성을 높이기를 계속했다. 홍수전은 또한 그에게 "우대사(雨大師)"를 추서했다. 그의 두 아들 중 하나가 이 작위를 이어받고 난징 함락 후 죽기까지 예서왕(裔西王)으로 칭해졌다. 두 아들 모두 예수의 조카이자 하느님의 손자로 취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