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기정 (문단 편집) === [[1936 베를린 올림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qthKw1zFnZ8)]}}}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REKY3dgPnMA)]}}} || ||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당시 [[나치 독일]]의 기록 영상[* 5분 53초 경부터 손기정이 경기장에 1등으로 진입하고, 관중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나온다. 6분 53초 경에 남승룡이 입장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편 씁쓸하게도, 해설위원은 '일본의 기테이 손', 그리고 '또 다른 일본인 선수, 남'이라고 외친다.] || 당시 일본으로 송출한 단파 라디오 방송 중계 녹음본[* 위 독일 방송의 영상에 소리를 덧씌웠다.(한국어 자막 있음)] ||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 당시 일본은 곧 벌어지는 [[중일전쟁|중국과의 전쟁]]에서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있었다. 즉 한반도도 일본이고 거기 사는 사람들도 모두 일본인이라는 사상인데 그 사상대로면 '순수 일본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상의 모순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된다.] 대표팀으로 발탁한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수작을 부렸다.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가 열렸고, 이것도 모자라 일본 측에서는 이 둘을 탈락시키기 위해 일본 선수 스즈키 히로시게, 타마오 시와쿠를 후보로 추가시켰다. 그러나 그렇게 꼼수를 부리고도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이 둘을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가는 반칙까지 저질렀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분노하며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하고 달렸다고 한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다.[*한편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2차 선발전에서 남승룡이 3위를 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는 후술하는 일본 선수의 지름길 주파를 남승룡이 목격하여서 분노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여담으로 지름길로 왔으면서도 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들에게 남승룡은 뺨따귀까지 날리며 격분했다고. 시원시원하고 활발한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했을 정도면 화가 얼마나 났을지 짐작할 수가 있다. 어쨋건 2차 예선에서 현지 적응에 실패하여 컨디션 난조를 보인 스즈키[* 이후 스즈키는 10000m 종목으로 대체 출전하였으나 기록을 내지 못하였고, 이후 군에 소집되어 2차 세계대전 종전기인 1945년 필리핀에서 전사하였다.]가 기권하며 1936년 일본 대표팀 마라톤 출전선수 손기정, 남승룡, 타마오 시와쿠 3인으로 결정되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대일본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 둘이서 별 말 없이 실력으로 찍어내려 주니 그런 의견은 쏙 들어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기정출발사진.jpg|width=100%]]}}} || ||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출발 사진. 맨 왼쪽에서 달리는 382번 선수가 손기정이다. || 이후 8월 9일 열린 올림픽 본선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 기존기록은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사발라 선수가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세운 2시간 31분 36초.][* 세계신기록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올림픽 기록이 맞다. 사실 손기정은 당시 세계 기록 (2시간 26분 42초)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마라톤]]은 신기록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고 최고기록으로 표기한다. 마라톤은 기온과 습도, 바람 등의 여건이 대회마다 다르고, 급경사코스와 직선코스가 다르며, 거리에서도 오차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다른 육상 종목 기록이 갖고 있는 엄밀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라톤에서는 ‘신기록’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최고 기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코스 거리, 출발지와 결승점 간 표고차, 출발지와 결승점 간 직선거리 등을 규정함으로써 나름대로 기록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이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사실, 손기정의 금메달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남승룡도 막판에 스퍼트를 내면서 무려 30명을 추월하여 3위로 골인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대표팀으로 함께 출전한 유일한 일본인이었던 타마오 시와키는 현지 트레이닝 도중 생긴 물집으로 인해 완주에 실패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기정골인직후모습.jpg|width=100%]]}}} || || 골인 직후 모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기정금메달.jpg|width=100%]]}}} || || 손기정이 받은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등록문화재]] 제489호)[* 현재와 같이 메달에 목걸이를 달아서 목에 걸 수 있게 만든 것은 [[1960 로마 올림픽]] 때 시작되었고, 당시에는 큼직한 동전 형태로 상자에 넣어 주었다. 아래 시상식 사진에서 선수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메달상자이다.] || 손기정은 금메달을 받은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다. 그는 이 순간을 "160cm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히틀러의 신장은 175cm 이고, 손기정의 신장은 170cm 정도로 추정되므로 실제로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 서양 사람들과의 체격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자신의 신장을 줄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 손기정은 80대 고령의 나이에도 170cm의 황영조와 키가 비슷했다. 다만 이후 본인이 기고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601230020920501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1-23&officeId=00020&pageNo=5&printNo=16709&publishType=00020|글]]에 의하면 서양인 치고는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고 회고했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손기정은 '''[[한민족]] 인물 중에서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대면한 유일한 인물'''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기정편지.jpg|width=100%]]}}} || 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당시 한글 표기로는 '슬푸다')라는 석 자가 쓰여 있어,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기정_1936.jpg|width=100%]]}}} || 시상식 사진을 보면 1위와 3위로 각각 단상에 올라선 손기정과 [[남승룡]]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손기정은 묘목[* 1982년 서울시기념물로 지정될 때 밝혀지길 이 묘목은 월계수가 아니고 대왕참나무이다. 모교인 [[양정중학교]], [[양정고등학교(서울)|양정고등학교]]의 교정에 심어졌으며 양정중고가 [[목동(서울)|목동]]으로 이전한 후 만들어진 손기정 공원에 남아있다. 현재는 거목으로 자랐고, [[서울시]]기념물 5호 [[손기정월계관기념수|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로 보호받고 있다.]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남승룡은 어떻게 해서든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려 일장기를 가리고자 했다. 인생에서 가장 기뻐해야할 날에 오히려 슬픔에 사무친 나라 잃은 두 청년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콧날이 시큰해질만한 사진이다. 은메달을 수상한 뒤의 [[영국]] 선수[* 어니 하퍼(Ernie Harper)라는 선수로, 이 사람도 손기정과 관련된 일화가 있었다. 본래 이 마라톤 경기의 우승 후보는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전 대회]] 마라톤 우승자였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발라(Juan Carlos Zabala)였는데, 마라톤 경기 도중 선두를 달리고 있는 자발라를 보고 다급해진 손기정이 무리하게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 때 뒤에서 같이 달리던 하퍼가 손기정에게 "저 사람은 어차피 금방 지칠 거니까 무리하지 마라"며 조언해 줬다. 어떤 책에 의하면 "Slowly! Slowly!"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조언을 받아들인 손기정은 1위, 하퍼는 2위를 차지했고, 자발라는 얼마 못 가 체력이 다해 곧 기권했다. 하퍼의 충고가 없었다면 손기정도 무리해서 자발라를 추월하려다 지쳐서 뒤쳐졌을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하퍼 자신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으니,''' 손기정에게도 나름대로 은인일 뿐만 아니라 스포츠맨십이 승부를 초월한 훌륭한 귀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더더욱 감동적인 [[스포츠맨십]].]의 밝은 표정과 대조적이다. 동메달을 차지했던 남승룡은 훗날, "'''기정이가 우승해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기정일장기말소.jpg|width=100%]]}}} ||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실어서 [[동아일보]]가 정간당한 '''[[일장기 말소사건]]'''도 유명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414/2012/11/17/082012627_4n.jpg|width=100%]][* 이 사진을 가지고 일제가 손기정을 밧줄에 묶어 연행하듯 귀국시켰다는 낭설이 인터넷 일각에 퍼져 있으며[[https://theqoo.net/?mid=square&document_srl=1337320049|사례]], 나무위키 이 문서에도 [[리그베다 위키]] 때부터 수년간 그렇게 기술된 적이 있다. 오히려 나무위키로 낭설이 더 퍼졌을 가능성도 높은데, 이 사진의 양팔의 줄은 단지 양정고보 교복에서 팔에 줄을 넣은 것일 뿐, 밧줄로 묶은 것이 아니다. 이 문서 기타에 나온 최승희와 찍은 사진에서도 같은 옷을 입어 옷 자체가 팔에 줄이 들어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 이런 판국이니 [[조선총독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엄중한 통제와 감시 속에 그를 귀국시켰고, 이 탓에 올림픽 영웅에 걸맞는 환영 인파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기정이 정말로 찬밥 대우를 받은 것은 절대 아니다. 손기정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제 치하 조선의 대중들에게 암묵적으로 큰 인기와 존경을 얻었으며, 이 당시 국내의 신문광고, 특히 의약품, 식품 광고는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는 광고가 많았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과자]] 광고에는 '이 과자를 먹고 쑥쑥 커 손기정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식의 카피라이트가 유독 많았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당시 [[일제강점기|일본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시골 아낙들도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 《[[상록수(소설)|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손기정의 우승을 찬양하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는 심훈이 같은 해인 [[1936년]] [[9월]]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하면서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 시의 전문은 심훈 문서에 있다. 그러나 손기정은 스포츠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된 사건 때문에 떳떳이 활동할 수 없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바짝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아무 죄 없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손기정은 심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풍문에 따르면 [[의지의 승리]]를 찍은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과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손기정에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기정이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게 굴지 않고 일견 우울한 듯 보일 정도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손기정이 시상식 내내 우울한 듯한 태도를 보인건 일본 국적으로 출전해, 일장기가 휘날리고 [[기미가요]]가 불리는 단상에서 일장기를 단 채로 수상했기 때문이다.] [[올림피아#s-4]]에서 손기정이 꽤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리펜슈탈이 이 동양인 선수에게서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1956년]]에 다시 만나게 된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을 '[[추축국|동맹인 일본의 국민]]'으로 간주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전쟁 당시 동맹국이란 것만 알고 있으면 나오는 오류로, '''올림픽 당시에는 [[중일전쟁|독일에겐 일본은 적국이었다.]]'''[* 당시 독일은 중화민국에 주재무관 파견과 88mm 대공포 등 무기를 공급하며 일본에게 빅엿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히틀러는 [[약한 것은 죄악|그의 성격상]] 단순히 체력과 정신력을 많이 소모하는 근본있는 메인 종목에서 약자들을 찍어누르고 승리한 [[위버멘쉬|가장 강인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 정도만을 가졌을 확률이 크다. 1차 대전의 일본 제국은 승전국 포지션으로 이것저것 뜯어갔기 때문에[* 독일의 소유였던 [[남양군도]]를 뜯어간 것이 일본 제국이다.] 공산주의와 일본을 견제한다고 중국 국민당군을 정예화 시켜놓은게 독일이다. 이 군사적 지원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에 질질끌리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니 말 다한 셈이다. 다만 올림픽 이후 [[방공협정]]을 맺어 동맹을 맺긴 했다. 또한, 히틀러는 출전 소속만 일본으로 되어 있을 뿐 손기정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지하고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독일 방송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Wo der Japanische Sieger Son kommen muss, der '''Koreanische''' Student, er hat die Streitmacht der Welt zertrummert, mit asiatischer Fähigkeit und Energie ist der Koreaner durch >일본의 우승자 손기정이 옵니다, '''조선 대학생''' 손기정은 전세계의 경쟁자들을 아시아의 능력과 에너지로 [[http://youtu.be/GmnnuJ-lPHw#t=37|눌렀습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본]]에서 우승 소감을 녹음한 내용이 레코드로 남아 있는데, 들어보면 손기정의 고향인 [[서북 방언|신의주 억양]]이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내용은 손기정의 자발적인 발언이 아닌 '''일본에 의해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에 불과했기에''', 손기정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 심지어(아래에서는 생략했지만) 누군가가 옆에서 끼어들어 '크게 해라'고 협박하는 것도 고스란히 녹음되어 녹음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장면은 영화 [[1947 보스톤]]에서도 극화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ORlbxFcdN8)]}}} || >손기정: 저는 손기정입니다. 24년 간의 숙망을 달성하려고 우리들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8월 9일]] 오후 3시에 스타트에 나섰습니다. > >이때 나는 신궁대회 때 스타트와 같은 가벼운 기분이었습니다. 이 정도이면 반드시 우승하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쟈바라가 먼저 뛰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달렸습니다. 나는 침착한 태도로 달리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달리고 있는 외국인들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인 하파가 곧 내 앞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32km를 앞두고 하파와 함께 전 회의 우승자인 아루젠친[* アルゼンチン{亞爾然丁} ; [[아르헨티나]].]의 쟈바라를 따라버리었습니다. 그리고 하파와 함께 나는 한동안 똑같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파를 따라버리기에는 무한히 어려웠습니다. 내 전신에 아직도 힘이 가득하였으므로 능히 우승할 자신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 >인제 즉 문제의 언덕에 다다르니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여 주는 것이 보이었습니다. 좌등 코취 역시 응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큰 기를 흔들면서 '인제는 6km가 남았다' 고 큰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일층 더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2번째 언덕에 도달하였을 때도 역시 이곳에 나를 응원하여 주는 우리나라 [[일장기]]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응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제는 1km 반이 남았다'고 고함치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려주었습니다. 나는 무의식 중에서 죽을 힘을 다 하여 더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 >그리하여 나는 이기었습니다. 기록의 시간은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이었습니다. 하파가 나보다 2분 4초 지나치어 들어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남 군이 원기있게 달려들어왔습니다. 이때의 반가움은 내 입으로서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오후 6시 15분 나는 하파와 남 군과 함께 표창대에 올랐습니다. 장엄한 우리나라 [[기미가요|국가]]가 엄숙하게 내 귀를 울려줄 뿐이었습니다. 이때의 기쁨은 내 일생을 통하야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 >이 승리는 결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 >'''???: 크게 해라.''' > >이 승리야말로 내 개인의 달린 힘보담도 우리나라 동포 여러분들의 열렬한 응원의 결정(結晶)인줄 생각하는 바입니다. >---- >금메달 획득 소감. 일본 당국이 써 준 대본을 그대로 읽은 것에 불과했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수상자 명패에는 '손기정' 대신 '손 기테이(SON, Kitei)'[* 이름을 일본어로 음독한 것.]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1970년에 [[신민당(1967년)|신민당]] [[제7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정치인)|박영록]]이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 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 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독일 경찰|서독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JAPAN'''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 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니 명백한 기물파손이며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그대로 들고 도망갔으므로 절도 혐의도 적용됐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송환되어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가이드가 붙는 베를린 올림피아 슈타디온 투어를 하면 박 의원이 너무 정교하게 바꾼 나머지 한참 나중에서야 일본 사람이 지적해서 알아냈다는 얘기까지도 들을 수 있다. 가이드가 혹 감정이 상할까 봐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없는지 확인까지 하고서 해 준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국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나 국적을 은퇴 후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 선수가 종주국 대표로 나와서 메달 딴 건 손기정, [[남승룡]] 말고도 많으며, 그들 역시 종주국 선수로 기록에 남아있다. 혹시라도 은퇴 전에 독립해서 독립국 선수로 나오는 경우도, 독립 전후의 국적을 다르게 기록할 뿐이다.[* 외국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기록에서 손기정의 국적을 [[한국]]으로 나타낸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 작성/편집자의 자의이며, 국제 올림픽 위원회가 공식 인정한 것은 아니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식민지 출신으로 우승한 사례가 셋인데, 손기정 외에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의 부게라 엘 와피(Boughera El Ouafi, 1898~1959,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와 알랭 미뭉(Alain Mimoun, 1921~2013, [[1956 멜버른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이 있다. 그러나 와피는 알제리 독립 이전에 사망한데다 사망 원인이 알제리 독립주의자에 의한 피살이었으며, 알랭 미뭉은 이슬람교와 아랍식 본명까지 버리고 독립 이후에는 아예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해 완전히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민족, 출신지, 정체성, 올림픽 이후의 활동 다 필요 없고 오직 대회 당시 소속 하나만 보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공식 인정할 경우 [[국적]] 변경을 요구하는 다른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각국은 외국 대표 선수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나라와 관련이 있는 선수는 자기 나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럴 경우 국적 분류가 완전히 흔들리기 때문이다.[* [[1936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이후 [[1948 런던 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선수도 몇 있다. 이들 모두 두 번 다 메달을 따지 못해서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한 번 기록되면 평생 정도가 아니라 영원토록 남는 것이다. 그 때문에 현재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는 공식적으로 'Kitei Son, Japan'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신 약력에는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한국인 출신이었음이 강조되며, 후일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2011년 12월 9일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손기정의 '대한민국' 국적은 인정했지만, [[역사 왜곡]](Historical Distortion)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력에 있는 국적 자체를 바꾸지는 [[http://english.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16/2011121601539.html|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