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손기정 (문단 편집) === 지도자·체육 행정가로서의 활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기정 기수 활동 사진.png|width=100%]]}}} || || 태극기를 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손기정 || [[광복|해방]] 이후 10월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손기정은 기수를 맡게 되었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서 슬픈 우승을 해야했던 손기정은 개막식에서 태극기를 들고 감격에 겨워 마냥 눈물을 흘렸다. 손기정은 [[대한민국]]의 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감독으로서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훈련시켰다. [[1948년]]에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1948 런던 올림픽]]부터 [[1964 도쿄 올림픽]]까지 [[마라톤]] 대표팀 감독을 맡아 지휘했고 KOREA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참여한 올림픽에서 개막식 기수로 당당히 [[태극기]]를 들고 입장했다. 이후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맡았으며 [[1966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했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1988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맡았다. [[1983년]]에는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발간하고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kid.chosun.com/2012022001893_2.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210802_184252.jpg|width=100%]]}}} || ||<-2>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 당시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 || 손기정의 인생 후반부에서 특히 기억되어야 할 장면은 [[1988 서울 올림픽/개회식|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뛴 것을 들수 있다. 사실 손기정은 성화 최종 봉송 주자가 아닌 '''성화 점화자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손기정이 성화를 점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극비에 부쳐져야 할 최종 점화자가 너무나 쉽게 예상되는 문제가 있었다.[* 비슷한 경우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개회식|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때에도 있었다. 그때도 국민들은 당연히 [[김연아]]가 성화를 점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손기정이 경기장으로 성화를 들고 들어오는 역할을 하고 이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스타덤에 오른 육상선수 [[임춘애]]가 넘겨받은 뒤 최종적으로 1명의 체육인과 2명의 일반인이[* 마라톤 선수였던 건국대학교 학생 김원탁, [[가거도]]의 중학교 분교 교사 정선만, 예술 꿈나무 손미정이 성화 점화자로 선택됐다. 가난을 딛고 성공에 이른 임춘애나 평범한 시민으로 칭할 만한 3인의 점화자를 올림픽 성화 점화의 주인공으로 낙점한 것은 당시 [[노태우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였던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극대화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할 수 있다.] 성화를 점화했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의 회고에 따르면 손기정은 본인이 당연하게 최종 성화 점화자로 선택될 거라 생각했는데 대회 직전에 이게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지며''' 격노했다고 한다.[* 당시 손기정은 70대 후반이었다. 즉, 팔순을 앞둔 시점임에도 의자를 던질 정도로 심하게 격노했다는 것.] 그의 증언에 따르면 성화봉송 때 자신이 있었고 멋있게 달리기 위해 1년이나 훈련했다고 한다.[* 개막식 2일전 밤, 손기정은 야광봉을 들고 [[https://youtu.be/4EdHnfMdz08&list=WL&index=5|성화봉송 연습]]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신문사 기자에게 들켰다.] 하지만 대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손기정은 결국 자신의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당시 영상을 보면 손기정은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태극 문양]]의 [[1988 서울 올림픽]] 엠블럼을 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유튜브에서 [[https://youtu.be/KeWSC7iCnpM&t=2h5m15s|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 성화가 꺼질 기세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2시간 5분 47초까지 해당된다. 영어 소개에서도 분명히 '''손기정, 1936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되어있다.] 공교롭게도 [[황영조]]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과 손기정이 우승한 날은 [[8월 9일]]로 똑같다.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시상이 끝난 직후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손기정이 황영조를 만나 격려하는 장면도 유명하다. 이때 [[황영조]]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손기정의 사진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 은메달이 [[일본]], 동메달이 [[독일]] 선수라 폐막식 때 [[태극기]] 양 옆으로 [[일장기]]와 독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는데, 이걸 보고 손기정은 "56년 전 그날, [[한국인]]인 내가 [[일장기|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3개의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다"고 감격하기도 했다.[* 사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가 [[남승룡]]이다.] 손기정의 영광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에 있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4/nwdesk/article/1940103_30690.html|당시 뉴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23.jpg|width=100%]]}}} || || 황영조의 골인 순간에 잡힌 손기정 모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0010801084_2.jpg|width=100%]]}}} || || 1996년에 촬영된 사진 || 1996년 가을 강형구(손기정기념재단 공동이사장)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한 손기정이 강 화백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 화백은 캔버스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젊은 손기정의 얼굴을 담았다. 의외로 [[축구]]계와도 접점이 있다. 1950년대에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의 상무이사로 재직했었는데, 대구방직이 1951년 [[1952 헬싱키 올림픽]] 선수 선발을 겸해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한국 축구의 최강팀이었던 육군 특무대를 이기는 파란을 일으키자 [[김창룡(군인)|김창룡]] 특무대장이 조선방직의 선수들을 잡아갔다가 조선방직 단장이 바로 손기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22700329206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2-27&officeId=00032&pageNo=6&printNo=9359&publishType=00020|얘기]]석방했다는 애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