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순치제 (문단 편집) == 생애 == 1638년, 청나라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효장문황후]]. 푸린(복림)이라는 이름은 모친인 효장문황후가 당시 거주하던 ‘영복궁’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부황인 홍타이지는 당시 총애하던 [[민혜공화원비 보르지기트씨|신비 해란주]](효장문황후의 언니이자 푸린의 이모이기도 하다) 소생의 [[8황자(숭덕제)|아들]]이 요절해서 상심한 나머지 푸린의 이름을 대충 지었다. 1643년 부황인 [[숭덕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팔기 회의에서 어부지리로 황제로 선출되었다. 홍타이지 사망 당시 청 황실 최고의 실세는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예친왕 [[도르곤]]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유력했던 이는 홍타이지의 장남인 숙친왕 호오거였다.[* 이로부터 7년 전인 [[병자호란]] 때 홍타이지가 이끌며 압록강을 건너온 우익군과 별개로 좌익군을 이끌며 함경도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온 두 지휘관이기도 하다. 각종 스캔들로 계급 강등과 감봉을 거듭하던 사고뭉치 형제와 조카들은 홍타이지가 직접 지휘했지만 이 둘은 홍타이지가 가장 신임하는 팔기군의 에이스들이었다.] 세력은 동생 도도와 함께 거느린 양백기, 정백기에다 [[아이신기오로 요토|요토]]가 생전 거느렸던 양홍기까지 아우를 수 있는 도르곤의 세력이 더 강했지만, 호오거와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지르가랑]]의 정람기와 양람기, 그리고 당장 발언권은 없지만 호오거에게 협조적이었던 황기들까지 완전히 제압할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적자라 왕위 계승권만 따지면 형 홍타이지보다도 위였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사망 시점에 홍타이지는 이미 성인으로 형제들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도르곤은 적자였고 누르하치의 가장 총애를 받았기에 차후에 제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여겨졌었지만, 누르하치의 갑작스런 사망시점에 도르곤은 아직 13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장성한 홍타이지의 세력에 비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후계를 홍타이지에게 내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홍타이지 사망 시점에 자기보다 십수년 연상인 큰형과 삼촌뻘 조카들보다도 압도적인 실적과 세력을 뽐내고 있었지만, 당연히 황제 홍타이지가 키워놓은 파벌도 만만치 않았고 그로 인해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장남인 호오거 세력을 전적으로 압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호오거 본인의 성품 또한 난폭했기 때문에 호오거 측도 우세하다고 할 수 없는 교착 구도였다.] 결국 타협책으로 어린 푸린을 황제에 앉히고 도르곤이 섭정왕에 올라 푸린이 성년이 될 때까지 실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절충되었다. 이 때 의정왕대신회의에서 도르곤이 많은 지지를 받았으나, 홍타이지의 직속인 정황기와 양황기 출신들의 반발로(팔기 회의는 기주들이 대표권을 가지고 참가하는데, 두 황기의 기주는 홍타이지였으나 사망하였기에 직접적인 발언권이 없었다) 인해 내전상황까지 갈 수 있었다. 실제로 넓게 보면 도르곤의 세력에 포괄할 수 있는 다이샨의 아들인 쇼토와 손자인 아다리가 선을 넘어서 반역죄로 목이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사태가 더 길어지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다이샨이 두 황기의 의견을 받아서 '홍타이지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를 선출하고, 동생인 도르곤과 친모의 가문이 한미한 호오거는 모두 배제하니, 정식으로 인정받은 5비빈의 소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인 푸린이 황제로 결정되었다. 여섯 살의 푸린이 황제에 오르고, [[도르곤]]과 누르하치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슈르하치(愛新覺羅 舒爾哈齊)의 6남인 정친왕 지르가랑(濟爾哈郞)이 좌우 섭정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르가랑은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았고, 실권은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에 오른 도르곤이 거의 혼자서 다 행사했다. 순치제가 황제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명나라에서 [[이자성]]의 농민 반군이 북경을 점령했고, [[숭정제]]가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며 귀순해오자 도르곤은 누르하치 이래 [[존버]]를 거듭한 팔기군의 원기옥(!!!)을 터뜨려 산해관을 돌파하고 명나라를 총공격하여 이자성군을 내쫓고 북경을 접수한다. 이어 도르곤은 청나라가 천명을 상실한 주씨의 명나라를 계승하는 황제국임을 천하에 선포하고 전란으로 파괴된 북경을 복원하며 자금성으로 순치제를 모셔 새로이 즉위식을 열었다. 다음해 이자성은 쫓기던 중 살해당한다. 이로서 도르곤은 아버지 [[누르하치]]와 이복형 [[홍타이지]]도 이루지 못한 최대 숙원 사업인 중원 통일을 완수하였다.[* 다만 이것은 중원에 입성([[입관]])했다는 정도이지 여전히 남쪽에는 [[남명]]세력이 잔존했으며 [[대만]]을 차지한 [[정성공]]의 [[동녕 왕국]]과 추후 [[삼번의 난]]을 일으키는 [[오삼계]]를 비롯한 삼번왕들이 존재했기에 완전한 통일은 [[강희제]]때이다.] 도르곤은 [[1650년]]에 죽기 전까지 사실상의 황제로서 청을 통치했다. [[옥새]]도 도르곤이 가지고 있었을 정도. 순치제는 도르곤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청나라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르곤이 사망한 후 친정을 하기 시작했을 때도 12세밖에 안된 어린 나이였다. 관습에 따라 청나라 황제는 [[몽골]] 출신의 황후를 맞았는데[* 청나라 초반 때 몽골칸위+동맹으로 후방 위험제거를 위해서였으며 아버지인 홍타이지도 적모이자 고모할머니인 저르저르, 생모인 붐부타이, 이모 하르졸과 정략결혼했다. 보다 정확하게 서술하자면 누르하치는 처음 자신의 주변 부족들과 혼인관계를 형성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비교적 가까운 위치의 [[차하르]]부 몽골족과 동맹관계를 구성하여야 했다. 이에 따라서 홍타이지의 정실 저르저르가 시집을 왔는데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자기 부족의 이익을 위하여 조카 붐부타이를 후궁으로 들였지만 붐부타이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이후 순치제를 낳긴 했지만), 홍타이지의 의지에 따라서 붐부타이의 이복언니이자 기혼녀였던 하르졸도 후궁으로 들어왔다. 참고로 홍타이지의 정실 푸진(부인)으로 인정받은 5비들은 모두 몽골 출신인데, 저르저르과 하르졸, 붐부타이, 이외에 나므정과 바트맛주는 차하르부 링단 칸의 푸진(부인)들로 몽골 여성들이였다.] 순치제는 몽골 출신의 황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황후들은 모두 어머니인 효장문황후의 조카(첫번째 황후)와 조카손녀(두번째 황후)였다.] 심지어 첫 황후는 질투가 심한 걸 트집을 잡아 폐출시키기까지 하였다. 대신 후궁들을 좋아했다. 황태자가 된 3황자 [[강희제|히오완예이]](훗날의 강희제)의 생모 [[효강장황후 퉁기야씨]]도 순치제의 후궁이었고, 그중에서도 순치제가 가장 총애한 후궁은 [[효헌단경황후 동고씨|현비 동오씨]]다.[* 아래에 서술된 순치제가 총애한 [[아담 샬]] 역시 순치제가 현비 동오씨에 대해 열렬한 연애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현비 동오씨를 얼마나 총애했으면 아직 젊고 자식도 없던 그녀를 황후 바로 밑의 지위이자 후궁 중에선 가장 존귀한 자리인 황귀비의 자리에 올릴 정도였다.] 현비가 1660년(순치 17년)에 사망하자 이런 타입의 군주들이 종종 그렇듯 '''정치에 뜻을 잃었다.''' 이듬해인 1661년, [[천연두]]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제위를 황태자 히오완예이에게 물려주고 붕어하였다. 23세의 젊은 나이였다. 청나라판 [[햄릿]](?)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어머니인 [[효장문황후]]는 당시 청나라에서 종종 이루어지던 제도인 [[형사취수]]를 했다는 큰 떡밥이 있다.[* 효장문황후는 강희 연간에 죽었는데, 스스로 태종과 묻히길 원치 않았다. 다음 대인 옹정제까지 결론이 나지 않다가 결국 베이링 묘역 밖에 묻힌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형사 취수설이 사실이라면 [[고구려]]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비 우씨와도 비슷하다.][* 다만 비슷할 뿐 실제로는 다른 점이 많다. 우씨의 경우 고국천왕이 죽은 시점에서 권력을 보전하기 위해 시동생 [[산상왕}연우]]을 택해서 그를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여전히 왕비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효장문황후는 도르곤과 결혼했는지 확실하지 않고 또, 도르곤 역시 제위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리고 사실 산상왕은 우씨와 결혼함으로써 차기 왕위라는 이득을 챙겼으나 도르곤은 설령 정말로 효장문황후와 결혼했다고 쳐도 그가 받은 이득은 확실한 게 하나도 없다.] 그러나 도르곤과 효장문황후가 혼인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참조. 순치제는 마음 고생이 여간 심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삼촌이 죽자 존호를 추탈해버리고(실제로 도르곤이 기주로 있던 정백기 장수, 측근들이 친형인 아지거를 섭정왕으로 만들려 했다가 순치제와 섭정왕 자리를 잃은 지르가랑에게 걸려서 아지거는 자결했고 장수들은 숙청당했다.) 유골까지 훼손해버렸다. 덤으로 도르곤이 억지로 황후로 추존한 도르곤의 친모 아바하이를 도로 후궁으로 만들었다. 몽골 출신 황후를 싫어한 이유도 이런 어머니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국정은 선정이었다. 친정 직후 황족 출신 왕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으로 황권을 강화하였다.[* 황권을 강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제2의 도르곤을 막기 위해서였을지도.] [[1659년]] 남명을 [[윈난성]]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나라의 잔존 세력을 대부분 평정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변발]]과 만주 복식을 강요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대학살을 일으켜 많은 한족들을 죽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Iw4CXPefKnk|영상]] 단, 난을 어느 정도 평정한 후 한족에 대한 융화 정책도 병용해서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다만 한족 출신 공신인 오삼계 등의 3번 세력들의 세력은 무척 커져 강희제 때 [[삼번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순치제는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을 매우 총애했다. 아담 샬은 명나라 때부터 베이징에 파견된 가톨릭 선교사로, [[소현세자]]가 베이징에 있을 때 만난 것으로도 유명한 인물. 역법에 능해[* 역법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화약 기술은 강희제가 삼번의 난에서 많이 써먹었다.] 도르곤 때부터 인정받았지만 순치제가 친정을 선포하면서 더욱 대박을 치게 된다. 입관 직후 통의대부, 태복시경, 태상시경에 임명되고 정 3품이 된다. 순치제는 심지어 삼궤구고의 예마저 종교를 감안하여 면제해준다. 몇 년 후에는 광록대부의 봉호를 받고, 조상 3대가 은전을 받는다. 1656~1657년까지는 순치제가 두 해 동안 24번이나 집에 직접 왕림하였다. 샬은 순치제에게 충고도 여러 가지 하였는데, 궁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고, 황제 스스로 자신을 질책하고 회개하라고 충고하여 아담샬이 '섭정왕'이란 조롱투의 기록까지 있다. 덕분에 예수회가 청나라를 조종하였다는 음모론이 나도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야사(역사)|야사]]에서는 현비가 죽었을때 신하들이 황후 추서에 반대하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위를 물린 후 오대산으로 출가를 했고, 1669년(강희 8년), 1707년(강희 46년), 1712년(강희 51년), 심지어는 손자인 옹정제 초기까지 살고 입적하였다고는 한다. 이는 [[김용(1924)|김용]]의 [[무협소설]] [[녹정기]]라거나 얼웨허의 역사 소설 제왕삼부곡 등에도 차용된 이야기인데, 물론 야사는 야사일 뿐, 믿지는 말자. 순치 18년(1661년)에 제위를 황태자인 3황자 [[강희제|히오완예이]]에게 물려주고 23세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사후 청나라 황실의 능구 두 곳 중 하나인 청동릉의 효릉(孝陵)에 안장되었다. 야사에는 효릉 안에 순치제가 생전에 신던 신발 한 켤레와 부채 한 자루만 부장품으로 들어갔다고 알려졌고, 이 때문인지 [[1928년]] [[쑨뎬잉]]이 청동릉에 난입해 [[강희제]]의 경릉(景陵), [[건륭제]]의 유릉(裕陵), [[함풍제]]의 정릉(定陵), [[동치제]]의 혜릉(惠陵) 등 [[동릉 도굴 사건|네 황제의 능을 도굴]]해 보물이 약탈당하고 유해가 훼손될 때도 무사할 수 있었다. 순치제의 치세 기간(1643년~1661년) 조선의 왕은 [[인조]](仁祖, 1623년~1649년), [[효종(조선)|효종]](孝宗, 1649년~1659년), [[현종(조선)|현종]](顯宗, 1659년~1674년)이 재위했다. 일본은 [[에도 막부]] 시절이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徳川家光 1623년~1651년),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 (徳川家綱 1651년~1680년) 재위기랑 일치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