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승자총통 (문단 편집) == 현대의 평가 == 현대 보병끼리의 싸움에서도 각종 중화기와 산탄총의 우선도가 기본적인 [[소총]]보다 떨어지는 이유를 승자총통과 조총의 교훈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위력 자체는 훌륭했던 무기라서 교훈을 헷갈리기도 쉬운 무기인데, 역사스페셜에서 진주대첩을 다루면서 조총에 견줄 만한 화기로 들었다. 물론 승자총통 자체는 지원화기로서 유용한 무기였기에 개인화기가 아닌 전술적인 지원 용도로는 조총을 이긴 경우가 꽤 많다. 문제는 전반적으로 개인화기라는 개념과 목적에서는 [[조총]]에게 확실히 밀렸다는 점이 쉽게 간과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승자총통류를 써서 조총을 이긴 승리는 특정한 지휘관들이 뛰어났던 것이지 기본적으로 보병들에게 편의성을 부여하는 시스템적인 부분에서는 완패라는 점에서 반드시 반성이 필요하다. 물론 현대적 잣대를 무조건 들이대기엔 당시 조선 상황에선 좀 가혹한 면이 있다. [[마카오]] 조차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과 일찍이 조우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통해 유럽인을 자주 접해온 명나라나 역시 포르투갈 등과 일찍이 [[규슈]]를 통해 만났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서양에서 관심이 없는 나라였으며 조총을 일찍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철도 모자랐다. 그나마 [[이순신]] 등 일찍이 깨인 사고를 가진 명장들과 [[김충선]] 등 [[항왜]]들의 노력으로 후발주자치고는 빠른 속도로 조총을 도입한 것이다. 대형 승자포들은 소형포에 맞먹는 살상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방송사와 매체들에서는 이러한 대형 승자총통들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많이 생산해둔 [[천자총통]] 모형이 값도 싸고 크기도 커서 멋을 살리기 좋기 때문이다.[* 정작 천자총통급의 대형 포들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자주 안 사용했다. 여러모로 승자총통의 대형버전 혹은 대형총통 중에서 가장 구경이 작은 현현대로 따지면 경기관총과 RPG-7 수준의 지원화기에 해당하는 화약무기들이 주력이었다. 일본에서도 오오즈츠라는 화력지원형 대형조총만들어 화포대용으로 사용했다. ] 여기에는 외환위기 때문에 제작비가 급감해서 승자총통을 표현하기 어려워져서 그렇다는 아주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1990년대]] 사극만 해도 승자총통이 진주성 전투나 행주대첩, 이치 전투, 충무공 이순신의 주요 해전 등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했다. 최근 한국 경제력이 회복되어 소품 찍어내기가 편해지고 국립진주박물관의 화력조선과 같은 유튜브 영상이나 각종 조선시대 배경 전쟁극 등을 통해 승자총통이 어린 세대에게도 알려지면서 서서히 사극에 재등장하기 시작했다. 징비록에 등장한 변이중 화차가 대표적이다. 다양한 화차들이 재현되면서, 주로 수레 같은 지지대에 수십 개를 싣는 재현품을 만드는 경우가 늘어났다. 실제로 조선 초기 이후의 소형 승자포들은 [[신기전]]처럼 주력에서 밀려났으며 화차에 장착하는 무기 혹은 거점제압을 위한 일종의 바주카로서 역할이 바뀌었다. 임진왜란 기록에는 '''[[조총]] 쇼크'''가 반드시 등장하는데 현대 사극에서는 "조선에는 총이 없어서 처음으로 총을 보고 놀랐다!" 라고 황당한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는 [[2000년대]] 이후 IMF를 겪으며 반토막난 제작비 때문에 승자총통을 묘사하기 힘들어 그랬던 것이 어린 세대에 잘못된 인식을 준 게 크다. 하지만 조선은 초기부터 발전된 [[핸드 캐논]]과 갖가지 화포들을 잔뜩 양산하여 배치한 국가였다. 즉, 임진왜란 당시의 조총 쇼크는 '''조선 초기부터 보급했던 유서깊은 샷건 및 바주카를 겸한 개인 화기보다 강한 화약 개인화기는 없다고 생각한 조선의 승자총통류 무기가 조총에게 쉽게 패배해서 받은 충격이라고 해석'''해야 정확하다. 그리고 여기에 훈련도가 부족한 삼남지방의 병사들이 전장 쇼크로 무너진게 더해진 형태이다.[* 당장 삼남지방의 경우 밥 먹고 훈련만 하는 용병인 경군과 달리 수자리 센다며 농민을 징집한 징집병이라 훈련도도 사기도 낮았다. 반란을 우려해 지방 속오군은 막 대하고는 했다.] 훈련도가 낮은 부대는 아군의 사격 소리에도 쇼크를 받아 붕괴될 수 있으며 이런 사례는 조선뿐만 아니라 후대에서 [[명나라]]나 [[유럽]] 등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사르후 전투]]에서만 해도 명나라의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들이 자신들의 총소리에 자신들이 놀라 일제히 사격하고 탄환을 축내서 결국 후금 기병에게 끔살당했다. 조선군은 1m에 가까운 크기의 대승자총통, 별승자총통, 천자총통같은 대형 화포들을 전방위적으로 보급한 상황이었다. 고작 총소리를 들었다고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들이 놀랄 리가 있겠는가.[* 물론 1, 2년만에 전군 보급이 완료될 무기였는데 일본이나 중국처럼 조금만 빨리 받아들이지하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으나 앞서 언급했듯 [[마카오]]나 [[나가사키]] 등에서 일찍이 포르투갈과 접촉한 명, 일본과 달리 조선은 운이 없었다.] 조총의 보급이 이웃들보다 한 단계 늦은 이유에는 필요성의 문제도 있었다. 조선은 몇 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조총 보급을 끝마칠 정도의 역량은 충분한 국가였다. 문제는 가까운 명나라, 일본에 비하면 조총이 필요할 정도로 격한 전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서양과의 접촉도 없어서 이것도 이것대로 운이 없었다고 볼 수 있었다. 명나라의 경우 마카오 조차 과정에서 [[광동성]] 연안에서 행패부리던 포르투갈인들과 투닥거리다 조총이나 불랑기포 등을 처음 접했고 이후 왜구 침입을 격퇴하면서 또다시 조총을 접한 후 [[여진족]], [[몽골족]]이나 [[왜구]] 대응을 위해 잽싸게 도입했고 일본 역시 무사가 직업이던 전국시대라서 서양 세력인 포르투갈인을 접촉하고 조총을 접하자마자 바로 도입할 수 있었으나 조선엔 모티브가 될 만한 이런 일 자체가 없었다. [[박연(조선귀화인)|벨티브레]]나 [[하멜]] 등 [[네덜란드인]]들이 데지마로 가다 표류해 [[제주도]]에 온 것은 한참 나중에 [[병자호란]]까지 다 끝난 뒤 효종이 북벌을 준비할 시기의 일이다. 당장 조선이 받아들인 유럽식 무기는 모두 명나라를 통해 전래된 것들이었으며 19세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시대가 되었을 땐 원형 무기 제공자인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스페인도 이미 쇠락해서 스페인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에 쳐발리며 식민지를 다 뺏기고 그 스페인식 무기를 쓰던 멕시코도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미국 남서부를 통째로 내줬으며 네덜란드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여러 식민지를 뺏기던 때였다. 암튼 이런저런 악재로 조총 도입이 늦어 그렇지 막상 임진왜란 도중 1593년부터 조총이 도입되자 조선군은 조총에 쉽게 적응했으며 승자총통을 쓰던 포수들의 경우 전원 소승자총통에서 조총으로 무기가 대체되고 대구경 승자총통들만 현대의 [[유탄발사기]]나 로켓 런쳐 수준의 지원화기로 남았다. 이후 병자호란까지 끝나자 다시 궁수까지 사라져서 숙종 시기가 되면 전원 조총병만이 훈련도감과 5군영에 남고 갑주도 사라졌다. 조총에 쉽게 적응해서 보급도 빨랐고 되려 동아시아 화기류 발전은 조선이 선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