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승자총통 (문단 편집) === 중구경 개인총통 === [[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CP0208308811_l00001.jpg]] 차승자총통.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이다. 50~60cm이다. 하지만 조선중기 이후로는 신호용이나 [[화차]] 제조용으로 돌려졌다. [[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CP0208309511_l00001.jpg]] 쌍자총통. 58cm. 2개의 포신에 3개씩 화약실이 있었다. 매우 원시적인 6연발 화기였다. 하지만 사거리가 짧고 성능이 매우 조악했다. 주로 수레에 싣어서 [[화차]]를 만들거나, 여러 번 장전하기 어려운 지형에서 장전하지 않고 6발을 쏘는 특성을 이용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cfs1.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NSMkJAZnMx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i5qcGcudGh1bWI=&filename=2.jpg]] [youtube(j-U3zgwL1Fw)] 3연자포, 5연자포. 10연자포도 있었다. 주로 수레, [[화차]], 성벽에 매달아서 쏘았다. 총신을 하나씩 뒤로 넘기거나 분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사용한 포신을 빼서 재장전했다고 한다.[* 비슷한 무기로 서양의 [[오르간 건]]개인 화기용으로 개발된 [[덕 풋 피스톨]]이 있다.] [[파일:external/www.gasengi.com/6d4016720e168116796e5d4ce22ed4fe_aS4B477UcN3JbMzsXp2.jpg]] 화승총의 전 단계인 소승자총통이다. 승자총통에 총신을 단 형태이며, 1회당 3알의 총알을 사용했다. 임란 이전에 개발되어 의외로 많은 양이 생산되어졌다. 하지만 조선군이 [[조총]] 생산라인을 빠르게 가동시키자 주력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해전에서 적선과 교전을 할 때 조총 보급 전까지 근접전 용도로 사용되었다. 암튼 소승자총통이 거의 화승총과 비슷함에도 쓰지 않은 건 당시 사람들이 '''[[조총]] 앞에서 내린 승자총통에 대한 평가'''라고도 볼 수 있다. [youtube(6T90NGMRyDY)] 임진왜란 중에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이라는 화승총도 사용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지시에 따라 휘하의 무관 정사준이 기존 승자총통의 단점(조총보다 짧은 총열로 인한 명중률 문제, 낮은 위력)을 보완하기 위해 노획한 일본의 [[종자도총]]을 바탕으로 정철(참쇠)로 된 총열에 조총처럼 총신과 방아쇠를 달아 제작했다.[* 임진장초, 1593년 8월 장계] 연구 및 제작기간에는 1년 정도가 소모되었고 성능실험에서 일본군의 조총보다 더 좋은 위력과 성과를 보여주게 된다. 일본군의 조총을 참고해 만들것으로 기존의 핸드캐논에서 본격적으로 조선의 화기가 '총통'에서 '총'으로 거듭나게 되는 시발점이다. 틀에 부어서 만드는 기존의 총통과 다르게 철판을 두드려서 만들었으며 항왜들이 제작에 참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염초와 철을 구하는데에 제약이 있어서 대량생산되지는 못했다. 대신 [[명나라]]에서 조총을 대거 들여오고 항왜들이 일본 본국에서 밀수로 빼오기도 해서 조총 보유 숫자가 늘어났다. [[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CP0208308211_l00001.jpg]] 소총통이다. 75cm이다. 무려 15세기의 [[세종(조선)|세종대왕]] 치세에 만들어진 소구경 개인 화포의 유물이다. 위의 사진을 비롯한 일부 화포들은 포신을 일부러 휘어놓아서 탄착점을 늘리는 특이한 운용법을 쓰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