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크교 (문단 편집) === [[무굴 제국]]하의 시크교 === 그 후 시크교는 몇 대의 구루(지도자)를 거치며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초기 발전사 중 명성 있는 사람이 제5대 구루 아르준(Arjun, 1563-1606)이다. 아르준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종교적 신심으로 명망 높았고, 특히 제1대 구루 이후 역대 가르침을 집대성하고 자신의 철학과 여러 찬가를 덧붙여 시크교 경전 '구루 그란트 사히브(아디 그란트)'를 완성해낸 인물이었다. 시크교 문헌에 따르면, 무굴 제국의 전대 황제였던 [[악바르]]가 그가 이슬람을 모욕하는 경전(그란트 사히브)을 쓴다는 전갈을 듣고 찾아갔다가, 책의 사본을 전해 읽고는 오히려 감동해서 금화와 의복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암리차르]] 인근의 시크교 마을 크헤하르타에는 그가 몬순에 대비해 짓도록 한 우물이 전해진다. 또한 그의 시절에 시크교의 가르침을 구현해낸 시크교 사원 하르만디르가 완공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암리차르 황금사원]] 문서 참고.) 한 연구가에 따르면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으며 오히려 시크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악바르 황제 덕분에 시크교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구루 아르준의 공으로 시크교는 상당히 확장되었고, 그는 진정한 [[황제]]라는 뜻의 '사카 파드사'(Saca Padsah)라고 인정받았다. 이 칭호는 어디까지나 종교적 의미만 갖지 당연히 행정적, 국가적 실권과는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순교 후 6대 구루에 이르러 지역 실권자와 비슷한 뜻을 갖게 된다. 그러나 1606년 [[무굴 제국]]의 모든 종교에 관용적이던 황제 [[악바르]]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자한기르]] 때부터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자한기르는 황권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고 박살내기로 유명했는데(항목 참조) 장남이 반란을 일으키자, 시크교 지도자 아르준이 도와줬다고 생각하고는 [[1606년]] 체포, 고문 후 처형했다. 실제로 아르준은 그의 장남의 이마에 사프란을 발라 종교적으로 축복하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란에 직접 가담했는지는 상당히 다른 문제인데, 그가 적극적으로 중앙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견해, 자한가르의 정치적 동기에 의한 살해라는 견해, 시크교도를 지속적으로 박해한 결과물이라는 견해가 있다. 다만 황제의 일기를 보면 자힌기르는, 세력을 넓혀나가며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를 개종시켜나가는 아르준을 이미 적대적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헛된 짓거리를 끝내던지 아니면 그가 이슬람 공동체로 와야 할 것'이라고 열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들을 탄압해가는 힌두교나 이슬람에게 맞서서 비무력적임에도 [[무굴 제국]]대에 이르러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던 시크교도들은, 무굴 제국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무굴 제국에 항쟁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사실 자한기르 황제는 아르준의 처형뿐만 아니라 가산 몰수, 가족 체포 등을 명했지만 구루의 사망으로 인해 시크교도의 세력이 약화될 것이라 판단되었는지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제6대 구루 하르고빈드(1595-1644)는 건장한 교도들의 무장훈련, 요새(Lohgarh) 신축, 용병 모집 등을 시작했으며 몇 년 간 구금 후 풀려난 이후에도 무장 활동을 계속했다. 역설적이게도 자한기르가 오히려 시크교도들의 결집과 무장화를 도와준 셈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눈엣가시여도 종교적 지도자를 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정부가 망명 온 [[이란]]의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호메이니]]를 암살하려고 하자, 오히려 정치적 반대파였던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팔라비]] 정부가 반대했던 일이 있다. 자칫하다간 그가 [[순교자]]가 되어 정치적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자한기르의 뒤를 이어 [[샤 자한]]이 황제가 되었다. 샤 자한 역시 시크교에 대한 불관용 정책을 고수하면서 시크교도와의 갈등이 커져 갔다. 그의 치세 때 시크교도와 여러 차례 교전이 있었으나 로힐라, [[암리차르]] 전투에서 구루 하르고빈드가 승리했다. 하지만 대규모 무굴 군대의 침공을 우려한 그는 [[히말라야산맥|히말라야]] 자락에 있는 키라트푸르(Kiratpur)로 자리를 옮겼고 말년까지 그곳에 있었다. 샤 자한은 [[1636년]] 키라트푸르를 포위했지만 하르고빈드는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고, 이것이 하르고빈드 대에 있었던 마지막 무굴 제국과의 전투였다. 결과적으로 하르고빈드는 [[펀자브]] 지역의 이질적 민족 구성에 기반한 반(反)무굴, 배타적 정서와 결합해서 지역 내에 독자적이고 견고한 명망을 쌓기 시작했으며, 시크교 신자의 수도 점점 증가해나갔다. [[1638년]], 구루 하르고빈드의 후계자로 점찍힌 아들이 갑자기 사망해버리면서 하르고빈드 사후에 손자였던 하르 라이(Har rai)가 제7대 구루에 오르게 된다. 문제는 구루 하르 라이가 샤 자한의 아들내미들끼리의 권력투쟁에 끼였는데, 차기 황제 [[아우랑제브]]가 아니라 다른 형제를 지원했다는 것... 결국 아우랑제브가 승리한 뒤 즉각 하르 라이를 [[델리]]로 호출했지만 하르 라이는 맏아들을 대신 보냈고, 맏이는 다행히 황제의 신용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하르 라이는 맏아들이 아우랑제브와 정치적 유대감이 지나치다고 판단했는지 차대 구루로 겨우 다섯 살이었던 하리 크리쉬엔을 승계시켰다. 하지만 구루 하리 크리쉬엔은 얼마 안 지나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종조부였던 테그 바하두르의 이름을 불렀으므로, 전대 구루인 하르고빈드의 아들들이 아니라 그가 제9대 구루가 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시크교를 자신의 통제권 안이 넣으려고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시크교만이 아니라 왕국 내의 모든 종교에게 '개종을 하지 않으면 모조리 죽이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렸고, 카슈미르 펀디트(지역 힌두교 공동체)가 시크교 지도자인 테그 바하두르에게 청원을 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테그 바하두르는 아우랑제브와의 담판을 통한 평화교섭을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는 그를 뜯어말렸다. 그러자 그의 아들인 고빈드 라이(훗날 고빈드 싱)가 아버지만큼 지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가치있는 분은 없다고 하자 테그 바하두르는 직접 아우랑제브와 담판을 벌이려 [[델리]]로 갔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개종을 요구했다. 테그 바하두르와 그를 따라온 시크교도 수행인들을 개종을 거부했으며 아우랑제브는 그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다. 시크교는 이 바하두르를 다른 종교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역사상 유일무이한 종교 지도자로서 추앙한다. 다만 이 일화는 구루 테그 바하두르 사후 한참 시간이 지나서 기록됐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하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아우랑제브와 담판하고 나서 여전히 델리에 남아 있었던 하르 라이의 맏아들이, 지도권을 가져간 구루 테그 바하두르에게 적대심을 품고 아우랑제브를 만나 그의 죽음을 도왔다는 말도 있다. 경전에 남은 그의 말들을 분석한 연구 결과 그가 제국의 이슬람 헤게모니에 대해 사회-정치적 변혁을 도모하다가 그렇게 됐다는 말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