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비주의 (문단 편집) === [[중세]]의 신비주의 === [include(틀:서양 철학사/중세 철학)] 서양 사상사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중세 초기의 철학은 '교부 철학'이라고 불렸는데, 교부란,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을 때 여기저기 흩어진 경전과 종교 이론 등을 수합하고, 하나의 체계로 통일하기 위해 기여한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즉, 오늘날로 주교님들.[* 사실 교부(Pater Ecclesia)라는 말 자체가 원래는 주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교부가 주교였던 것은 아니지만.] 이 교부들은 기독교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타 종교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문헌을 뒤지며 연구했다. 그 결과 중세 초기 교부들의 철학은, 타 종교들과 원래 서양에 자리잡고 있었던 그리스 철학에 대해 '''배타성'''을 띠는 굳건한 체계로 완성된다. 대체 그러면 그리스 철학의 신비주의는 어디에서 유입된 걸까? 첫 번째는 호교론자들의 존재에 있다.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사상은 원래 서양, 그러니까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배경에 뿌리내린 고유한 사상이 아니다. 비록 로마 정부에서 공인했다고 한들, 그리스의 문화적, 사상적 배경을 충실히 배우며 자란 로마의 지식인들을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려면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직접 배우고, 그 문화를 통해 소통하는 방법밖에 없다. 즉, 그리스 문화에서 자란 지식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기독교 지식인들은 그리스의 문화를 배우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야 했다. 이 소통을 시도한 사람들을 가리켜 호교론자라고 한다. 호교론자들은 다시 기독교에 그리스 철학, 다시말해 [[신플라톤주의]]를 유입시키고, 이 과정에서 신비주의가 조금 유입된다. 그러나 호교론자들의 주장은, 교부들이 모여 교리 정립에 대해 회의한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어느 정도는 걸러진다. 즉, 호교론자들의 존재가 기독교에 신비주의를 완전히 유입시켰다고 보기는 힘들다. 여기에서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하자. 두 번째 이유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라는 이름 아래로 쓰인 저작들의 존재였다. 디오니시우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나, 중세 교부들은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이 디오니시우스라는 사람이 쓴 저작을 참고하게 된다. 문제는 이 저작들이 '''죄다 위작'''이라는 것. 디오니시우스의 저작들은 얼핏 보기에는 기독교 교리를 기반으로 한 사상을 다루는 듯 했으나, 그 저작들의 근본에는 신플라톤주의, 그 중에서도 신비주의적 성향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다시말해, 아직 남아있던 어떤 신비주의자가 저술년도와 저자 이름을 속여 자신의 사상을 남겼고[* 다만 이게 나쁜게 아니다. 고대세계에서 남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남기는 건 흔하고, 당연시되는 일이었다.], 기독교 교부들은 교리를 체계화하기 위해 문헌 연구 과정 도중 그 신비주의를 자연스럽게 흡수한 것이다. '진리와의 합일'이라는 신비주의의 테마는 ''''신과의 합일''''로 바뀌어 교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흡수된 신비주의는 근대 말까지 서양의 정신에 뿌리내린다. 중세 신비주의가 발달했던 지역은 주로 라인강을 낀 독일 서부, 플랑드르, 프랑스 동부 등 이른바 [[라인란트]]라 불린 지역이었고 알려진 신비주의 신학자들 역시 독일인들이 많다. 프랑스에서는 상대적으로 신비주의 전통이 적었고 스페인에서는 [[로욜라]]가 유명한 신비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