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암우 (문단 편집) == 생애 == 1901년 4월 7일 경상남도 영산군 읍내면 성내리(現 창녕군 영산면 성내리 510번지)에서 아버지 신원하(辛元夏, 1877 ~ 1921. 6. 8)와 어머니 [[진양 하씨]](1873 ~ 1931. 7. 18)[* 하광백(河光伯)의 딸이다.] 사이에서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창녕군 영산면 동리로 이주했다. 1919년 3월 13일 창녕군 영산면에서 [[구중회]]·[[박중훈(독립운동가)|박중훈]]·[[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740|장진수]](張振秀)·[[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36|김추은]](金秋銀)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서 후퇴하는 자는 생명을 빼앗긴다'고 맹세하며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했고,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한 뒤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등을 제작했다. 이후 700여 명의 시위대를 모아 제작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주민들에게 배부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전진가, 창가 등을 부르는 등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였으며,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78&evntId=0034983854&evntdowngbn=Y&indpnId=000001540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7년 12월 25일 별세했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창녕군 영산면 동리 남산에 안장되었다가 1991년 [[양산군]] [[정관읍|정관면]](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대정공원묘원에 이장되었으며, 2004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재차 이장돼 현재에 이른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산 신씨]][[분류:창녕군 출신 인물]][[분류:1901년 출생]][[분류:1947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