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영주 (문단 편집) == 생애 == 1916년 10월 2일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아버지 신진하(辛鎭厦, 1873. 8. 11 ~ 1955. 5. 15)와 어머니 [[경주 김씨]](1880 ~ 1967. 4. 24)[* 김성규(金聖奎)의 딸이다.]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이후 [[경찰공무원]]에 입직한 뒤 [[동아대학교]] [[법학부|법정학부]] [[법학과|법률학과]]에도 다녔으나 3학년 때 중퇴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이던 1941년 10월 치러진 경상남도 [[경부]] 및 [[경부보]] 고시시험에 [[http://db.history.go.kr/id/gb_1941_11_29_a44550_00370|합격해]] [[일본 제국 경찰]]에 입직했고, 1942년 거제경찰서에서 근무했다. [[8.15 광복]] 후 [[경찰인재개발원|국립경찰전문학교]] 행정과를 수료한 뒤 경찰공무원이 되었고, [[경감]]에 올라 1945년 11월 13일부터 1946년 10월 25일까지 초대 경남 고성[[경찰서장]]([[경감]])을 [[https://www.gnpolice.go.kr/gnpsub/page.do?MENU_ID=it0104&go=gs|역임했고]], 1946년 9월 27일부터 1946년 10월 6일까지 제3대 통영경찰서장(경감)을 [[https://www.gnpolice.go.kr/gnpsub/page.do?MENU_ID=it0104&go=ty|역임했다]]. 1946년 10월 7일부터 1947년 1월 3일까지 진주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1947년 제7관구경찰청 제9구경찰서장을 겸했고, 1948년 6월 24일부터 1950년 5월 10일까지 [[경상남도경찰청|경상남도경찰국]] 사찰과장([[총경]]), 1950년 5월 19일부터 1950년 7월 18일까지 제6대 [[https://www.bspolice.go.kr/dongbu/view.do?no=395|부산동부경찰서장]](총경), 1950년 7월 19일부터 1950년 9월 24일까지 다시 경상남도경찰국 사찰과장을 역임했다. 1952년 [[대한민국 경찰청|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 총경을 역임했고, 같은 해 [[창녕군]] [[남지읍]] 남지리에 [[남지고등학교]]의 전신인 남지일민고등학교를 세우고 초대 재단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53년 10월 5일부터 1954년 3월 6일까지 제12대 [[충청남도경찰청|충청남도경찰국]]장([[경무관]])을 [[http://m.geoje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23|역임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창녕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하을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당 하을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이재현(1917)|이재현]], [[현오봉]], [[최석림]], [[박상길(1925)|박상길]] 등과 복당하였다. 1960년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는데, [[3.15 부정선거]] 관련자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지역구 내의 반발이 극심하였다. 결국 [[민주당(1955년)|민주당]] 박기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7월 30일 오후 3시에 창녕군 개표소 부근에서 반혁명세력 규탄을 부르짖는 시위대에 납치된 뒤 등 뒤에 "내가 신영주입니다. 자유당 때 돈 많이 먹었읍니다."라고 쓴 쪽기를 붙이고 개처럼 시위대 선두에 서서 거리를 돌다가 끝내는 시위대에 집단폭행을 당하는 사건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600731000064|또한 있었다]]. 이듬해인 1961년 초에는 3.15 부정선거 가담자라는 이유로 반민주행위자로 분류되어 공민권이 제한되고 피선거권이 상실되었다. 1963년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이에 입당했고, 경상남도 창녕군지구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26일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을 받았다. 3.15 부정선거 가담자라는 게 논란이 되었으나 공천은 강행되었고, 결국 경상남도 창녕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6대 국회]] 기간 동안에 아시아의원연맹 제1차·제2차 총회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1967년)|신민당]] [[성낙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때 변절하여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성낙현에게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공화당 공천에서 밀리자 반발하였다가 해당 행위자로 [[제명]]되었다. 이후 [[재단법인]] [[국민대학교]] 이사, [[천일여객]]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77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마포구)|서교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7121800239107008&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7-12-18&officeId=00023&pageNo=7&printNo=17447&publishType=00010|별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