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쌍십협정 (문단 편집) == 협정 경과 == 1945년 8월, [[히로히토]] 천황이 일본의 항복을 선언하면서 천만여 명의 중국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중일전쟁]]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 대항해 힙을 합쳤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국민혁명군과 공산군은 중국 북동부, 북부 및 중부 일대에서 도시의 관할권과 전략물자를 놓고 경쟁했다. 또한 소련은 동북 지역에서 일본 [[관동군]]으로부터 압수한 전략 물자의 일부를 [[린뱌오]]가 이끄는 동북 인민해방군에게 이전시켰고 국민혁명군은 미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았으며 미해군은 국민혁명군을 중국 북부와 북동부로 수송했다. 이리하여 양당은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충돌을 벌였다. 이에 기나긴 내전과 중일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친 중국인들은 평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중국 지식인들도 양당의 평화 협상을 촉구하는 사설을 신문에 실었다. 미국 역시 [[패트릭 헐리]] 주중 미국 대사로 하여금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사이를 중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제스는 그 전에 마오쩌둥에게 회담을 3차례 제의했지만 마오쩌둥은 이에 응답하지 않다가 헐리가 자신을 초청한 후에 비로소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자신을 제거하려 들 것을 우려해 충칭에 주재한 소련 군사 대표단에게 자신의 피난처를 확보해달라고 요구했고 헐리가 직접 비행기를 타고 옌안에 와서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장제스는 일기에 마오쩌둥을 비웃었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가! 공산당원이 그렇게 겁이 많고 뻔뻔스러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불과 사흘 전 공산당 신문과 라디오는 헐리가 반동적인 제국주의자라고 욕을 퍼붓지 않았던가. 동일한 제국주의자가 이제는 마오의 안전을 보장하는 보호자가 되다니! 아무튼 헐리와 함께 공항에 도착한 마오쩌둥은 "정치와 군사 문제는 마땅히 공정성과 합리성에 입각할 뿐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에 기초해야 하고 독립적이고 풍요로운 강대한 신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똘똘 뭉쳐서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마오쩌둥이 충칭에 도착하자,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환영하는 연회를 베풀며 "우리가 이제 1924년의 그날[* 1차 국공협정을 일컫는다.]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축사를 했다.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마련한 고급 요리들을 즐겼고, 장제스는 일기에 "나는 그를 성심성의껏 대접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협상은 쉽지 않았다. 공산당은 자신들이 확보한 영역의 지배권을 인정받고 베이징 군사위원회 주석 직위를 확보하고 100만에 당하는 공산군을 그대로 보유하길 희망했다. 장제스는 이들의 요구가 지나치다며 분노했고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9월 29일 일기에 공산당이 그간 저지른 악행을 정리하면서 '1호 전범' 마오쩌둥이 처벌받지 않는다면 항일전쟁 동안 쓰러진 병사와 인민의 원혼을 달랠 수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또한 공산당 측이 28개 사단 자체 보유를 허용해 달라고 했을 때 국민당 측이 이를 수용할 의사를 보이자 [[저우언라이]]가 능구렁이처럼 48개 사단으로 올려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에 장제스는 "공비와의 협상은 놈들의 불공정과 불성실 때문에 있을 수 없다."고 불평했다. 그러던 중 산둥성에서 공산당원들이 미국 전략사무국 간부 존 버치를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앨버트 웨드마이어]] 참모장은 분노하여 마오쩌둥에게 공산군이 미군 특수요원들을 억류하고 살해하는 것에 격렬하게 항의하고 저우언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거짓말, 협박, 살인 및 노예화라는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언제나 예외없이 공산주의자가 정권을 탈취하고 유지하기 위한 상투적 방법이다." 저우언라이는 이에 화가 나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자본주의를 파괴할 때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과 마찰을 빛어봐야 좋을 게 없었던 공산당은 사로잡은 미국인들을 석방했다. 그 후 9월 26일 패트릭 헐리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다음날 장제스가 지방 순시를 떠나자, 공산당원들은 충칭에 남아있는 마오쩌둥의 안위를 걱정했다. 이러한 공산당의 우려를 전해들은 장제스는 충칭에 돌아오면서 일기에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헐리는 단지 나라의 통일을 위해 방문할 공산당원들에게 안전통행증을 줬을 뿐이다. 그는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적의 이익에 봉사하는 반동분자들의 생명을 보장해주진 못했다. 10월 9일,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회담을 가졌다. 장제스는 국공합작에 대해 마오쩌둥에게 물었지만 마오쩌둥은 애매모호한 외교적 수사를 구사해 장제스의 불만을 샀다. 또한 장제스가 "공산당이 독자적으로 영토를 지배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하자 마오쩌둥은 "그게 올바른 방향이겠지요."라고 동의해 장제스는 '저 자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까? 그는 내 진심을 알아줄까?'라며 의심했다. 이렇듯 양측 지도부간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실무진들 간의 협상이 10월 10일에 '원칙상' 합의가 이뤄졌고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모든 정당이 참가하는 연합 정부 구성에 합의했고 평화를 위한 임시 협정을 발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