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기발도 (문단 편집) === 다른 기록 === [[동사강목]]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당시 포로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기발도가 이원수(李元帥)의 진(陣) 친 것을 바라보고는 '이 군대의 형세는 지난날에 비할 바가 아니니 각별히 조심하라.' 했다." >하였다. 백사집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언급도 있었다고 한다.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상고하면, "고려 말에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장차 광주(光州) 금성에서 말에 먹이를 먹이겠다고 소리쳤다."고 기록되었는데, 주(註)에는 지금 담양부에 있다고 하였다. 이 같은 언급을 참조하면 어린 나이에도 왜구 중에서, 적어도 고려를 침략한 왜구 중 지휘관에 상당하는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인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내내 이성계는 왕조의 창시자로서 찬양해야만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이성계를 빛내는 업적으로 대표되는 아기발도 역시 후대에 이르기까지 태조와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언급된다. 실록에는 [[선조(조선)|선조]]가 이상과 같이 논의한 기록이 있다. 태조가 쓰러뜨린 적들 가운데 [[네임드]]급 중 하나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날 경연에서 고(故) 재상 이준민(李俊民)은 이야기가 변방의 일에 미치자, 말하기를 '상께서는 왜국을 근심하십니까? 왜인은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하였다. 내가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더니, 준민은 '짧은 옷소매에, 단검(短劍)을 들고 맨발로 달리는 것은 잘하나, 그 밖에 다른 장기는 없으니 어찌 적(賊)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외숙 조식(曺植)도 항상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있는 것은 어쩐 일이냐?' 하니, 말하기를 '아기발도는 주객(主客)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적국에 깊숙이 들어왔으니 어찌 태조의 절제(節制)하는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호걸이 아닙니다.' 하므로, 나도 그렇다고 답하였다. 준민은 유장(儒將)으로서 명망이 있는 자인데 그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다. >---- > '''《[[조선왕조실록]]》선조 26년(1593) 6월 17일자 7번째 기사''' [[승정원일기]]에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각지의 관찰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전남도 관찰사 조종필과 대화하며 이같이 언급된다. >"曾是太祖高皇帝破阿只拔都, 而其地有勝戰碑矣." >"일찍이 태조 고황제께서 아기발도(阿只拔都)를 격파하였는데, 그곳에 승전비가 있다." >---- > '''《승정원일기》140책, 고종 37년(1900) 7월 7일[양력 8월 1일] 10번째 기사''' [[정약용]]이 황산대첩비를 읽고 그 감상을 시로 남겼는데 거기에도 언급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