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기발도 (문단 편집) == 정체에 대한 추정 == 고려사 기록이 꽤나 상세한데 이는 아기발도가 포함된 무리가 평소의 왜구와 많이 달라 기록할 거리가 된다는 뜻이다. 일단 굉장히 큰 규모였으며 철기병도 운용했다. 이들은 전쟁터에서도 사신을 죽이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 스스로 사신을 칭한(실제로는 정탐을 나온) 고려인 배검한테 술을 대접하고 철기병을 붙여 호송했다. 그리고 '하늘'[* 귀신도 바다도 아니고 하늘이라고 명시되어 있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단을 쌓고 여자아이를 잡아 인신공양을 하며 악기를 연주([[아악]]/[[가가쿠]], 또는 무악/가구라)했다. 이 기록에서 '점치는 자'도 언급된다. 고대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 임금의 역할이었던 것을 보면 아기발도는 최소 명문가 고위인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남의 나라 땅에서 이런 제사를 지낸 것을 보면 정복 의도도 충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https://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kr_126r_0010_0050_0020|고려사]] 어린 나이임에도 지휘권을 갖춘 장수였던 것으로 보이며, 좋은 갑옷을 입고 있고 기마 무예까지 능숙했다고 한다. 원래 [[사무라이]] 즉 일본 무사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궁수였다. 그리고 고려 말 왜구들이 극성을 부리던 서기 14세기 일본 무사들은 말을 타고 칼과 창을 든 채로 적을 향해 돌격하는 기마 백병전에 능숙했다. 심지어 14세기 일본 무사들 중에서는 말에 쇠사슬로 만든 갑옷인 마갑을 입힌 중무장 기병들도 존재했다. 지금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 무사들이 말에 입히던 마갑의 유물이 한 점 보관되어 있다.[* 출처: 잊혀진 전쟁 왜구/ 이영 저/ 에피스테메(방송대출판문화원)/ 2007년 04월 출간] 물론 이후 일본이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이전의 중앙정권의 권력이 여러 다이묘들에게로 분산되어 기병의 유지비를 대기 어려워지면서 기병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간단히 말하면 똑같은 돈을 원래는 1명에게 집중되었던 것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진 상태다. 즉, 절대적인 수익은 똑같아도 개인이 가진 돈이 줄어든 것.] 하지만 그럼에도 다케다 기마대 이야기가 현대에도 사실인 것 마냥 퍼져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 영향력은 남아있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아기발도가 평범한 [[왜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특히 고려사 [[변안열]] 열전을 보면 황산대첩 이후 왜구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사람이 왜구들의 동정을 알리는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시 포로가 되었던 자가 적진에서 돌아와, “아지발도가 이장군(이성계)의 진용이 잘 짜여진 것을 보더니 자기 부하들더러, "이번 군대의 군세를 보니 과거의 장수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오늘 전투는 너희들이 각각 조심하라.”고 당부하더이다. 애초 아지발도는 섬에 있을 때 출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 무용에 탄복한 왜적들이 굳이 청하여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적의 우두머리들도 그를 보러 올 때에는 반드시 달려와 꿇어 엎드렸으며 부대의 지휘도 모두 그가 맡았습니다.”라고 알렸다. >---- > '''《고려사》 열전 39권, 간신(姦臣) 2, 변안열: 변안열이 양광·전라·경상도 도체찰사로서 왜적을 물리치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아기발도는 사실 고려에 침공하는 것을 망설였다는 점, 왜구들도 아기발도를 보면 항상 상전을 대하는 것처럼 대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아기발도는 평범한 왜구 우두머리가 아니라 꽤 지체 높은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있다. 특히 이성계의 진용을 정찰하거나 그 진영을 파악하는 모습, 그리고 이성계와 이지란의 협공에 죽기 직전 몸소 필마 단기로 분전하며 사기를 고무하려 한 점은 확실히 평범한 도적떼가 아니라 정규군 무장에 가까운 모습이다. 또한 당시 [[일본]]은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의 혼란기였는데 규슈에 근거지를 잡고 있던 남조가 북조에 궤멸당하던 시기와 황산대첩 시기 왜구가 대거 침공해온 시기가 겹친다. 이 때문에 고려말 왜구를 일본 남조 세력의 '''마지막 발악'''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역사적으로 무너져 가는 세력이 '마지막 발악'의 일환으로 한반도로 와서 깽판을 치는건 한국사에서 아주 흔하게 발견된다. 당장 아기발도와 비슷한 시기에 [[홍건적]]이 그랬으며, [[명청교체기]] 당시엔 [[모문룡]]이 그랬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아기발도를 남조 측에 선 호족 세력 출신의 장수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려사 변안열전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679ee00cce2b32e147de9c1710b0298d|관련논문]]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아지발도와의 발음 유사성을 근거로 그의 정체를 당시 [[규슈]]의 무사 세력이었던 아카보시(赤星) 가문이나 아지히(相知比) 가문의 인물로 추정된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당시의 고려인들이 이름을 몰라 그를 그냥 아기 장수라고 부른 것이며 용비어천가에 '아기'는 한국어로 '어린 아이'를 의미하는 보통 명사를 의미한다고 적고 있기 때문에 이 추정의 설득력은 떨어진다. 다만 아기발도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하는 해석과 달리 이성계를 띄우기 위해 과장되게 기록된 무명 해적 장수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결국 일본 측 기록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사실상 유일한 기록이 [[태조실록]]이다. 고려사의 기록 역시 거의 같은 시기 같은 집필진이 썼으므로 그 안에 포함된다. 조선왕조실록이 비록 꼼꼼하고 신뢰성 높은 기록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본편과 달리 태조실록 총서 부분은 조선왕조실록 다른 부분처럼 사관이 그 당시에 옆에 붙어서 일일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성계의 옛날 무용담'을 후대에 수집해서 만든 것이고 전주 이씨 왕가의 창시자로서 미화하기 위한 논조가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2022년 한국에서는 아기발도가 단순히 호족 출신이 아니라 더 높은 신분, 특히 일본 남북조 시절 남조의 덴노였던 [[고다이고 덴노]]의 손자인 "이쿠라노미야(伊倉宮)"로 추정한다는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쿠라노미야의 아버지이자 남조의 고다이고 덴노의 아들 가네요시(懐良) 친왕은 정서대장군[* 직제상 흔히 말하는 쇼군, 즉 정이대장군과 동급의 직책이다.]으로서 규슈를 거점으로 세력을 끌어모아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으로 임명되기도 하는 등, 본인이 지배하던 정서부(征西府)를 남조로부터 분리독립시키려던 인물이었는데, 그 아들인 이쿠라노미야는 1365년생으로 1380년엔 15, 16세이므로 '어린 영웅'이라 추측되는 아기발도의 나이와 일치한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17142|관련논문]] 이쿠라노미야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6대 쇼군(将軍)이자 고사가 천황(後嵯峨天皇)의 제1황자인 무네타카 친왕(宗尊親王)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일본은 난세였고 황족과 공가도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기발도와 이쿠라노미야가 동일인이 아니더라도 남조의 황족이었을 가능성 자체는 있다. 이 경우 아지발도의 정체를 추측해볼 만한 기록이 일본에서 사라진 것도 자연스럽다. 결국 승리한 건 북조인데다 남조 황손들은 소수를 빼면 숙청되었으니까. 이쿠라노미야의 기록도 굉장히 적다. 남조의 기록은 사라졌고, 북조가 남조의 사정을 다 알 수 없다. 설령 알아도, 어린 나이에 외국에서 싸우다 죽고 대가 끊겼으며 근거지도 사라진 남조 황족을 굳이 찾아 황족으로서 인정하고 행적을 기록할 이유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