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산드로스 (문단 편집) == 생애 == 페르시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으로, [[폰토스 왕국]] 제9대 왕이자 보스포로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왕조 2대 국왕 [[파르나케스 2세]] 휘하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첫번째 아내로 글리카레아(Glykarea)를 두었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아산드로스의 아내 글리카레아"라고 명시된 폰토스 비문에서만 전해지며, 그 외의 정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47년 이전에 파르나케스 2세와 [[사르마티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뒤나미스(보스포로스)|뒤나미스]]와 재혼했다. 기원전 47년, 파르나케스 2세의 명령을 받들어 보스포로스 왕국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파르나케스 2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임명한 소아시아 총독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전쟁을 치르느라 자신에게 신경 쓰지 못하는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를 통해 로마인들의 호의를 얻어 보스포로스 왕국의 군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칼비누스를 [[니코폴리스 전투(기원전 48년)|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물리친 뒤 그를 진압하려 했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시리아에 이르자 이에 맞서다 [[젤라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1,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시노페로 도주한 뒤 그로부터 보스포로스 해협을 되찾을 생각으로 흑해를 건너가 테오도시아와 판티카파에움을 공략했다.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공격했고, 파르나케스 2세는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했다. 그는 옛 장인의 수급을 카이사르에게 보내 보스포로스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청했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주를 시해한 자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거절하고, 지난날 [[알렉산드리아 전쟁]] 때 자신을 구해줬던 [[미트리다테스 2세(보스포로스)|미트리다테스 2세]](파르나케스 2세의 이복동생)에게 보스포로스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미트리다테스 2세가 군대를 이끌고 보스포로스에 진군하자, 그는 카이사르의 지지를 얻은 자를 상대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내 뒤나미스와 함께 도주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뒷배가 사라진 미트리다테스를 축출하고 보스포로스 왕위에 아내와 함께 복귀했다. 기원전 27년에서 기원전 17년 사이에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공식적으로 보스포로스 왕으로 인정받았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그는 마이오트 호수 근처의 체르소네소스 지협에 360스타티아(53km) 길이의 성벽을 세우고 10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성벽은 그 지역의 조지아인들이 해적 행위를 일삼는 걸 막고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7년, [[스크리보니우스]]라는 인물이 자신을 [[미트리다테스 6세]]의 손자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루키아누스에 따르면, 당시 93세였던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말이나 도보로 전투에서 누구와도 싸울 수 있음을 신하들에게 과시했지만 신하들이 전투 전날에 스크리보니우스에게 귀순하는 걸 보고 자결했다고 한다. 이후 스크리보니우스는 그의 아내였던 뒤나미스와 결혼하고 왕위에 올랐다. [[분류:보스포로스 국왕]][[분류:기원전 110년 출생]][[분류:기원전 17년 사망]][[분류:자살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