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시타카 (문단 편집) == 평가 == 결점이 없는 완성형 주인공. 작중 내내 부상을 입거나 고뇌하는 장면은 자주 나오지만 이는 살면서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학습과 성장의 과정이었을 뿐,[* 주요한 고뇌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것인데, 양측 다 입체적으로 표현되고 각자의 입장이 있는 만큼 선하고 올곧은 캐릭터라 해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코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아시타카의 극 중 대사인 '흐림 없는 눈으로 진실을 보겠다'처럼 올곧은 의지가 꺾인 적은 없었다. 지브리 작품 내에서도 찾기 힘든 문무를 겸비한 완성형 캐릭터. 오죽하면 [[스즈키 토시오|스즈키 프로듀서]]가 아시타카는 너무 완벽해서 감정 이입이 안 된다며 제목을 몰래 바꿨을 정도. 즉 아시타카는 작 중에서 갈등의 일부분으로써 극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로 인해 생겨난 갈등을 이해하고 풀어가는 역할을 맡은 [[해결사]]인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원령공주의 서사가 아시타카를 중점으로 둔 구조였다면 뻔하디 뻔한 [[먼치킨]]물이 되어 서사의 당위성도 흡입력도 나락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원령공주에서 중요한 것은 아시타카가 아니라 산과 타라라 마을, 그리고 시시가미로부터 생겨나는 갈등이였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이들이 만들어내는 갈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라 여기서 아시타카까지 참가했다간 러닝타임이 두 배는 늘었을 것이다. 애초에 전쟁이 매일같이 벌어지며 피튀기는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맡은 아시타카는 결코 나약해서는 안 되는 캐릭터였다. 만약 아시타카가 불완전하고 나약한 캐릭터였다면 두 세력의 사이를 중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우유부단한 캐릭터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 그나마 유일하게 작중의 스토리에 참여하기 위해 가지게 된 패널티는 재앙신의 저주로 충분했다. 심지어 이마저도 아시타카의 올곧은 신념이나 육체적 강력함에는 거의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일종의 교훈적인 경험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극도로 도덕적인 마음의 소유자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내버려 두지 않고 도와주고, 생판 남인 타타라 마을과 숲의 분쟁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숲과 인간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간 당사자에겐 아무 상관 없는 제3자가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오히려 양측의 미움을 사고도 남을 행동이건만 한없이 올곧은 자세와 마음을 유지하는 모습에 양측에도 큰 미움을 사지 않았으며 숲과 인간이 양쪽 모두를 돕고 둘이 공존하기를 바란다.[* 물론 인간이 계속 자연의 자원을 써가며 발전하는 한 회복력이 상대적으로 느린 자연 쪽이 더 소모전이 되기에 완전한 공존이라 보기엔 좀 어렵다 할 수 있다.] 아시타카가 에보시에게 타타라 마을이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모로의 아들을 [[멧돼지]] 시체 더미에서 빼주려고 하자 그렇게나 오래 들개들과 피를 보며 반목해 왔던 타타라 마을 사람들이 아시타카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모로의 아들도 그런 마을 사람을 적대하지 않는 장면에서 그가 양 진영에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걸 보여 준다.[* 이는 작중 주연급 인물들 중에서 인간과 [[동물]], 양방향으로 소통이 가능한 유일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동물은 산과 아시타카 이외의 인간과는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고, 산은 동물과 소통이 가능하지만 아시타카 이외의 인간과는 서로 소통하지 않아서 인간보다는 동물의 편에 서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단역까지 범위를 확장하면 나고신이 죽는 장면에서 에미시족의 [[점성술사]] 히이에게 말하는 장면은 있지만,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일방적으로 저주를 내뱉는 것뿐이라서 서로 소통이 가능한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굳센 정신을 지녀, 저주에 걸리고 마을에서 추방당하면서도 담담했고[* 상술했듯이 마을의 상황이 상황이었기에 장로들이 일족을 이끌어줄 지도자가 없음에 비통해하고 한탄하며 어쩔 수 없이 보낸 것이긴 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추방이 맞다. 하도 담담해서 오히려 관객이 작중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마저 있다. 작중 상황은 치료할 수 없는 끔찍한 저주를 받은 사람이 평생 살던 고향에서 영원히 추방당하는 상황인데 아시타카가 너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서 관객 입장에서는 참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치료를 위해 잠깐 떠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 실제로 이 때문에 엔딩 이후 아시타카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자주 보인다.] 저주가 조금씩 몸을 좀먹으며 고통스럽게 죽어가게 하는 상황과 숲을 파괴하는 타타라 마을의 모습을 보면서도 한 번도 이에 대해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작중 그가 타타라 마을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는 묘사는 볼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해결하려 하고, 자신이 받은 저주의 궁극적인 원흉이 에보시라는 걸 알자 분노해 순간적으로 살의까지 품어도 에보시를 죽이려 폭주하는 오른팔을 억누를 만큼 올곧음을 유지할 줄 안다.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인 순간은 오직 총포에 맞아 사경을 헤메다 사슴신이 살려내 극도로 허약해진 상태에서 산이 돌봐줄 때 무심코 눈물을 흘린 것이 전부였다. 이마저도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사슴신과의 대면에서, 상처는 치유해주곤 저주는 풀어주지 않아 내심 '이대로 저주로 천천히 고통 받다가 죽으라는 것이구나'로 받아들여 심신이 무너져서 그렇다. 겸사겸사 재앙신의 저주의 무서움을 몸으로 직접 겪어보았으면서도 재앙신이 된 [[옷코토누시]]에게 달려들어 산을 빼내려고 하고 숲의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며 폭주하는 [[시시가미]]에게 머리를 직접 돌려주면서도 두려워하기는커녕 끝까지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평정심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머리를 돌려줄 때도 재앙신의 저주가 내려졌으며 아시타카는 물론 산까지 전신에 걸쳐 저주의 각인이 새겨지는 것을 보아 모노노케 히메 세계관의 최고신인 만큼 나고, 옷코토누시 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원래 저주의 의도대로였다면 아시타카는 재앙신처럼 공포와 증오에 잠식되어 엄청난 고통 속에서 나고가 다하지 못했던 인간 세상에 대한 [[파괴]]를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사심 없이 볼 수 있었고, 그에 따라 항상 옳은 행동을 하고자 했으며, 심지어 위험이나 죽음 앞에서도 너무나도 초연한 태도 덕에 이 저주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가 증오심이나 고통을 느꼈을 때마다 발생했던 오른팔의 경련은 저주로 인한 흉터가 점점 커지고 있음에도 후반부로 갈수록 줄어들고 나중에는 아예 이런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절제력이 탈인간급임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요약하자면 인품적 측면에선 흠 잡을 데 없는 [[완벽초인]]형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어떻게 보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이전 작]]의 [[히로인]] [[나우시카(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우시카]]의 TS판이자 [[파즈(천공의 성 라퓨타)|파즈]]의 상위 호환으로도 볼 수 있다. 게다가 나우시카가 작품의 초반에는 분노를 못 이겨 토르메키아 병사들을 때려눕히고 후회하는 장면이 있는 등 미성숙한 면이 남아있는 성장형 주인공인 것에 비해, 아시타카는 대놓고 살의를 느끼는 대상이 눈앞에 있더라도 상황이 좋지 않을 경우 엄청난 인내력으로 자제하는 등 이미 완성된 주인공이기에 둘의 최종적인 모습은 같더라도 작품 시작 시점에서는 아시타카가 더 성숙할 정도이다. 다만 영웅성이 강한 만큼 나우시카보다도 더 따라가기 어려운 주인공이라는 태생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본작에서는 순수하지만 감정적인 성격인 산을 제2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역할 분담을 시킴으로써 이 단점을 메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