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전 (문단 편집) === 고려 이전 === 아전, 그중에서도 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외와전의 역사는 [[통일신라]]대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내용과 같이, [[삼국시대]]의 [[신라]]에서 대부분의 지방민은 복속민의 지위에 머물렀지만, 삼국시대 후반부터 처우가 상승해 [[야이차]], [[죽죽]]과 같이 신라에 충성하는 지방민들이 나타나고 이를 본보기로 삼아 장려했으며 이후 [[통일신라]]로 거듭나면서 보다 체계적인 지방 통치 체제가 자리잡히게 된다. 이들은 수도에서 보낸 지방관을 보좌해 향촌에서 행정 실무를 맡으며, 신라 정부는 매 해마다 번갈아가며 지방 유력자를 수도 [[서라벌]]의 관청에 머물러 있게 하는 [[상수리 제도]]를 통해 지방세력을 통제하였다. 이들 지방세력은 세월이 지나 신라 중앙정부가 쇠약해지자 정부에 반기를 들고 군벌화되어 후삼국시대의 [[호족(한국사)|호족]]이 되었다.[* 촌주들이 어느 정도 재력과 세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는 사례로 889년, 사벌주(沙伐州)의 농민이었던 원종과 애노는 그 지역 농민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 조정은 나마 관등에 있는 장군 영기(令奇)를 토벌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농민 반란군을 토벌하라고 명했지만 영기가 원종과 애노의 반란군 본진을 보고서 이를 두려워하여 토벌군이 진군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촌주(村主) 우연(祐連)이 나서서 반란군에 맞서지만 전사했다. 진성여왕은 칙명을 내려서 장군 영기를 참수하였고, 나이가 10여 세에 불과한 우연의 어린 아들을 아버지의 뒤를 잇는 촌주로 임명했다. 상식적으로 촌주 휘하에 부리는 사람이(사병) 있었기에 맞서 싸워보기라도 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