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정환 (문단 편집) === 유년기 === 수려한 귀공자처럼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만 오렌지를 청소년 대표팀 시절에 처음 먹어봤다는 얘기는 불우함과는 거리가 있다. 오렌지도 오렌지 '향' 탄산음료나 주스 등으로 단어가 친숙했다뿐이지, 본격적으로 대량 수입되기 전에는 실물로 볼 일이 없는 귀한 과일이었다. 안정환이 본인의 유투브 채널에서 [[https://m.youtube.com/watch?v=GV76J5rSZ5g&t=89s|오렌지 얘기를 직접 언급했다.]] 나무위키에 적힌 본인의 문서를 직접 읽어보면서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을 때 오렌지를 처음 먹어봤다. 이런 과일이 있었나?"'''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나나도 청소년 대표팀 시절에 처음 먹어봤다고 한다. 수입 과일들은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로 수입자유화가 되기 전까지 무시무시하게 비쌌기 때문에 그가 못 먹어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어려서 [[유복자|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가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씨를 따른 안정환은 어린 시절 [[후레자식]]이란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육아를 외할머니에게 맡겨버려 외할머니와 외롭게 성장하는 등, 그가 직접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나와서 이야기한 유년 시절은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http://m.cafe.daum.net/ilovenba/34Xk/246252?q=%EC%9D%B4%EC%98%81%ED%91%9C%EC%9D%98%20%EB%B3%B4%EC%95%BD%EC%9D%84%20%EC%96%BB%EC%96%B4%EB%A8%B9&|#]] 사실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외갓집이 원래는 잘 살았던 편이기는 했고 한창 부유했을 적에는 큰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안정환이 6살 때 외갓집이 사업 실패로 어려워진데다가 [[외할아버지]]가 그 충격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의 유산으로 커피숍을 하다가 망한 뒤 다른 곳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이후로도 그의 어머니는 나중에 '''[[도박중독]]자'''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안정환의 생애 내내 민폐를 잔뜩 끼쳤다. 안정환이 축구 선수가 되고 프로 입단을 한 뒤에도 안정환이 축구선수라고 떠벌리면서 도박판을 돌아다녔다가 빚이 엄청나게 불어난 통에 안정환이 뒷처리를 하느라고 이래저래 맘고생을 해야 했으며, [[안종복]]이 어머니 입장에서 기자들을 상대하면서 안정환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했으며, 이것 때문에 안정환과의 사이가 멀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http://ilyo.co.kr/?ac=print&entry_id=15904|기사]] 참고.] 외할머니와 단 둘이 판자촌에서 빈곤하게 살아야했다. 흑석동 판자촌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된 안정환은 배가 고파서[* 그래서 그는 어느 방송에서 '배고픈 게 싫어서' 은퇴 후 딱히 체중 관리를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도 필요하면 체중 조절을 하는 편이긴 하지만 굳이 깡말랐던 시절로 돌아갈 정도로 식단을 하고 싶지 않은듯.] 무랑 배추서리를 하거나, 굿판을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얻어먹고, 옷이 없어서 남의 집 빨래를 훔치는 것은 기본에다가, 산에 흩뿌려진 [[삐라]]를 주워서 [[미군]]부대에 신고하여 학용품을 마련하고, 방생 기간에 방생되는 물고기를 잡아서 다시 되팔아 돈을 마련하고, 차비가 부족해 버스를 타고 가야될 학교를 걸어서 다니고 차비가 역시 아까워서 학교 체육창고에서 잠을 해결하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하루는 안정환이 할머니에게 100원만 달라고 했다는데, 왜 그러냐고 할머니가 물었더니 나가서 아버지를 사오겠다고 얘기했으며 실제로 [[차두리]]의 아버지가 [[차범근|차붐]]이라는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물론, 차두리는 차두리 대로 '아버지가 차범근' 이라는 부담감을 은퇴할 때까지 안고 살았으며 차범근이 차두리의 은퇴식에서 [[https://m.fmkorea.com/best/5277269633|"차범근 아들로 태어난 거 이제 후회 안하지?"]] 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https://www.sports-g.com/2012/01/30/%ec%95%88%ec%a0%95%ed%99%98-%ed%99%94%eb%a0%a4%ed%95%a8-%eb%92%a4%ec%97%90-%ea%b0%80%eb%a0%a4%ec%a7%84-%ec%8a%ac%ed%94%88-%ec%9d%b4%ec%95%bc%ea%b8%b0|안정환의 힘든 유년 시절을 정리한 기사]] 안정환의 할머니는 축구를 하는 것을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하는데, 왜냐하면 가뜩이나 잘 못먹는 애라서, 운동까지 하면 배가 더 빨리 꺼질까봐 걱정해서였다고 한다. 그래도 축구부가 되면 간식으로 지급하는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어서, 단순히 또래 애들보다 달리기가 조금 빨랐을 뿐인 어린 안정환은 그렇게 축구부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어렵게, 굶주린 배를 잡고 시작했던 초등학교 축구부는 후원하던 선배(선배 아버지의 후원)가 졸업을 하면서 지원이 끊겨 버렸고, 축구부는 폐지 수순을 밟게 된다. 다행히 그해 마지막 경기에 훌륭한 활약을 보인 안정환을 다른 학교에서 유일하게 스카웃했다고 한다. 나머지 애들은 축구를 관뒀다고 한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 고등학교 진학 에피소드도 의리의 상남자임을 알 수 있는데, 상위 랭크의 명문고에서 스카웃하기로 했는데 안정환이 뽑혔다. 하지만 같이 동고동락한 친구들과 같이 하기 위해 스스로 명문고 스카웃을 포기했다고 한다. 의리를 알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여기서 감독이나 학부모의 입김까지를 추론하는 건 사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 현재도 이런 경우는 상당히 많은데, 대부분 그 동기는 어린 선수의 착한 마음에 기인한다. 최소 3년을 매일같이 얼굴보고 같은 훈련과 목표를 가지고 동고동락했으니 이들은 사실상 이 시점에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이다. 예체능계 19살 청소년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관해, 쓸데없이 감독이나 학부모의 입김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타 대학에 들어가면 타 대학 감독의 산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고등학교 감독의 입김도 우스운데 학부모의 입김은 거의 소설 같은 얘기다.]를 거치면서 축구를 하지만 선배들의 상습적인 구타와 매일같이 피곤한 몸에 여전히 배곯는 고달픈 생활들이 이어진다. 한 번은 축구부원 숫자대로 지급받은 빵과 우유가 하나 비어버리자 선배 한 명이 안정환을 무려 3시간 동안이나 구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늦게 들어온 다른 선배가 "그거 내가 먹고 나갔는데?" 한 마디에 화가 나서 그 길로 합숙소를 도망쳤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안정환은 밥 먹듯이 축구부를 이탈하고 복귀하기를 반복하게 된다. 본인이 말하길 "이 시기에 축구가 즐거워서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때 싸움도 많이 하고 다니던 시절이라 실제 조직폭력배에서도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쉬는 날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용직 아르바이트, 공사판을 전전했었는데 당시 [[수도권 전철 5호선]] [[목동역]] 건설이 이루어질 때 안정환이 인부로 투입되어 벽돌을 쌓았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3-wy3WzqIJ4|#]][* 모 예능에서 [[수도권 전철 5호선]] [[목동역]]을 갈 일이 있었는데, 본인이 여기 내가 지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https://youtu.be/3-wy3WzqIJ4|#]]] 심지어 프로에 입단하고 국가대표가 되어서도 할머니에게 아파트를 장만해주고 [[https://cafe.naver.com/as6060/746356|어머니의 도박 빚]]을 갚았기 때문에 금방 돈을 모으지도 못했으며, 이것 때문에 계속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이영표의 보약을 얻어먹기도 했다고 한다.[* 같은 2002년 대표팀인 최태욱과 비슷하면서 대비되는 일화이다. 최태욱의 경우도 축구가 즐거워서 하지 않았고 맞으면서 했기 때문에 싫었다고 하며 스스로를 재능에 의존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안정환은 본인의 승부욕과 더불어, 최소한 축구선수로서 동기부여를 받을 능력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좋은 스승을 만났던 듯하다.] 그렇게 [[아주대학교]]에 진학한 안정환은 졸업해서 거액에 프로 축구단에 입단하는 대학교 선배들을 보고 2학년 때 축구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을 잡았다고 한다. 1997년 이탈리아 유니버시아드 직후 돌아오자마자 후반에 투입되어 혼자 2골 1어시스트하면서 1대2로 지던 팀을 5:2로 역전승한 일화는 유명하다.그후 [[아주대학교]]의 재단이었던 [[대우그룹]]이 운영하는 [[부산 아이파크|부산 대우 로얄즈]]로 자연스럽게 입단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