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무운동 (문단 편집) === 정책 진행과 실패 === 당장 무기와 장비는 그걸 쓰는 사람에 따라서 위력이 천양지차로 벌어지게 되는데, 새로운 무기 체계에 걸맞는 교련과 전술 등의 군사 제도가 제대로 자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대가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군대가 우수한 장비에 비해 쉽게 몰락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과는 달리 [[청나라]] 군대의 무기 체계는 전혀 낙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을 능가하는 부문도 많았다. 경제력이 곧 군사력이라고 거대했던 청나라의 경제 규모가 비록 비효율적이라도 각종 무기의 생산력과 수입에 있어 충분한 질과 양을 갖추고 있었다. 일례로 청나라는 일본도 아직 못 가졌던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을 2척이나 독일로부터 수입해왔으며, 청일전쟁 당시까지도 일본에는 대형 순양함만 있었을 뿐 전함은 없었다. 대포도 최신식 강철포를 다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훈련 인프라가 충실하게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우수한 장비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실제 교전이 벌어지자 참패했다. 무기는 제대로 갖췄지만 근대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 육성한 기업은 대부분이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진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창업 초기에는 거액의 국가 자금이 투자되고 양무파의 고관이 추천한 관료가 기업을 운영하였으나 후에는 민간으로부터 자본을 모집하여 거액을 투자한 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국가는 이들 상인을 보호 감독하였다. 여기에 투자한 상인은 상하이 등지의 개항장에서 [[자본]]을 축적한 대상(大商)들이었다.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의 기업은 거대한 외국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 취약한 중국의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세제상의 특혜와 관문(官物), 관용(官用)에 남품하는 영업독점의 특권을 누리면서 운영되었다. 이는 관료들의 부패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청나라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며, 최소한 당대에는 국방력이 예산을 다 잡아먹는 일본에 비해 유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양무파들도 상대적으로 청렴한 관료였던 것은 사실이다.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관독 상판 체제의 문제외에도 가장 큰 문제였던 자금 부족 때문에 기업이 문을 닫거나 경제 공황으로 파산하기도 했으며 경영을 맡은 상인이 공장 경영보다는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 투기에 힘을 쏟아 공장 운영이 잘 되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그외에도 이홍장이 설립에 관여한 [[https://zh.wikipedia.org/wiki/机器织布局|기기직포국]]은 1893년에 화재로 공장이 전소되는 등 재해도 있었다. 광산 같은 경우에는 직례성의 개평 탄광처럼 흑자를 많이 내고 계열사까지 거느린 성공적인 사례도 있었지만 초기의 몇 차례는 낙후한 수송 능력으로 실패했고 양무운동 기간 설립한 총 38곳의 광산 중 성공적인 곳은 개평탄광과 막하금광을 비롯한 소수의 광산뿐이었다. 대만의 기륭탄광은 부정부패와 비효율로 유명했을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