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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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의 전개도.
1. 개요
2. 내용
3. 실패와 한계점
3.1. 정책 진행과 실패
3.2. 내부적인 갈등과 일관성 부족
3.2.1. 개혁파 내부의 문제
3.2.2. 보수파의 굳건함
3.3. 총론
4. 관련 인물



1. 개요[편집]


中體西用 (중체서용: 중국학문을 본질로 서양학문을 사용하자)

당시 자강운동(양무운동)의 기본 이론.


양무운동()은 19세기 중후반에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자강) 운동. 한때 동아시아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던 청나라가 쇠망할대로 쇠망하여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아편전쟁에서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태평천국의 난의 여파로 내외/내적으로 군벌과 내전 상태에 치닫게 된 자국을 근대화시켜, 열강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열강의 요구로 외교 아문이 성립되는 시점을 시작으로 보고, 1895년 일본제국과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난 것으로 본다.

이 시기에 일시적으로 청 제국의 통치력이 회복되었기에 이 시기의 회복을 당시 황제의 연호를 따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도 한다.


2. 내용[편집]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는 부국 강병 운동이었다. 흔히 교육 과정에서 양무운동은 조선동도서기처럼 중체서용으로 대표된다.[1] 즉, 보수파에 대한 방어적 논리로 "서용"을 강조한 구호이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중체"를 강조한 구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양무운동 역시 당대에는 "자강 운동"으로 불리었다. 다만 변법자강운동과의 구분을 위해서 양무운동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이는 것.


2.1. 1860년대[편집]


언제부터가 양무운동의 기간인지는 다소 이견의 여지가 있지만, 보통은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조정이 공충친왕 혁흔을 중심으로 한 북경파와 황제와 함께 도망간 열하파로 나뉘었을 때 공친왕의 상주로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예부나 이번원과는 별개로 근대적 외교를 담당하는 총리각국사무아문, 약칭 총리아문을 설치한 1861년을 양무운동의 원년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 해에는 함풍제가 사망한 후 북경 잔류파와 열하의 서태후, 동태후가 손을 잡고 신유정변을 일으켜 삼두정치와 비슷한 정국을 형성함으로써 양무운동이 크게 탄력을 받았으며, 다음해에는 서구식 교육 기관인 "양무학당"을 세웠다.[2]

외교관 양성을 위해 장지동은 총리아문에 경사동문관[3]을 설치하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의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통역사를 양성했다. 증국번은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미국으로 유학시켰고[4], 이홍장독일, 영국, 미국 등지로 유학생을 보내어 군사와 무기에 관하여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동문관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개혁 활동은 마건충을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재들이 이를 통해 배출되었다. 이런 통역 기관들은 분교인 상해광방언관이 설치된 상해와, 광주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1860년대의 기관들은 대체로 무기 생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홍장은 1865년 상해에 강남기기제조총국[5]을 세워 총포, 탄약, 기선 등을 만들고, 남경에는 금릉기기국[6]을 세워 대포, 화약을 생산하였다. 좌종당은 1866년 복주복주선정국을 세워 윤선(輪船)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만주족 귀족 출신으로 북양삼국통상대신(北洋三國通商大臣, 여기서 3국은 직례성[7])으로 있던 숭후는 1867, 1870년 천진에 각각 천진기기국과 군화기기총국[8]을 설치하여 화약과 포탄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4대 공장이 설립된 이후 각 지방에 총 24개의 군수 공장이 건설되었다. 그런데 이들 공장에서 생산된 무기는 총포, 탄약류가 대부분이었고 품질도 우수하지 못하였다. 이들 공장은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서양인 기사에 의하여 공장이 운영되었으며 후진적인 경영과 정부의 지원 부족으로 서양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품질과 자금이 둘다 밀린다고 평가받았다.

한편, 공장이 필요로 하는 석탄과 철 등을 공급하기 위하여 각지에 광산이 개발되어 근대적 채광 시설을 갖춘 광업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9] 또 공장의 부속 기관으로 설치된 번역관과 서양식 교육 기관을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 서적이 번역 보급되면서, 기술 인력이 양성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여담으로 1890년대 청을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사천성에서도 서양 과학 서적을 요구하는 지방관이 있다고 서술하였다.


2.2. 1870년대[편집]


과거 시험에 '양무 진취' 시험을 개설해 기술자를 선발하고, 강소성, 직례성에서 서구 교육을 실시하였다. 유학생을 미국에 파견하기도 했고, 1878년에 최초의 방직 공장인 난주직니국과 1879년에 북경-천진 전선을 가설하기도 했다.

1874년 일본의 타이완 침략을 계기로 육방해방 논쟁이 전개되는데 좌종당은 신강 지역 수복 작전을 중심으로 정책을 펴야한다는 육방 우선론을 제기하고 이홍장 등은 해방 우선론을 주장 해군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논쟁이 지속되자 당시 계획하던 신강 수복 작전도 그대로 실행하면서 해방도 강화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1884년 북양함대·남양함대·복건함대의 3대 함대를 창설했다. 함대는 중국에서 건조한 배도 있었으나 주력함은 주로 대영제국, 독일 제국에서 구입하였다. 이 밖에 유능한 지휘관 양성을 위해 1881, 1885년 천진에 각각 천진수사학당천진무비학당을 세우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군사 고문을 초빙하여 서양식 군사학을 교육하였다. 이렇듯 70년대의 사업은 주로 해군과 서양식 교육 제도에 치중되었다.

외국 자본주의의 중국 진출에 대항하여 양무파는 민족 자본과 민간 기업의 양성에 힘을 쏟아 '반관반민(半官半民)'의 '관독상판'(官督商辦)'의 새로운 기업을 육성해 나갔다. 또한 이홍장은 중국의 해운업을 독점하고 있던 외국 기선 회사와 경쟁할 목적으로 1872년 상해에 기선 회사인 윤선초상국을 창립하였다.

한편 청 조정의 군사적 성과가 가장 돋보인 시기이기도 했는데 태평천국 운동 전후 야쿱 벡의 회교도 반란을 정리하고 신강 지역을 회복함과 동시에 러시아와의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2.3. 1880년대[편집]


10여년의 짧은 소강기가 끝나고 열강의 개입이 강해졌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청불전쟁갑신정변으로 청은 조공국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군사력보다는 산업 근대화에 많은 재정이 투자된다.

1881년 근대적 광업 기관인 개평광무국(開平鑛務局)을 세운 청 조정은 1890년대 초까지 대만에 기륭탄광, 하북성에 개평[10]탄광, 흑룡강성에 막하광무국(漠河磺務局),[11] 호북성에 대야[12]철광과 연철창을 열었고 방직 공장도 각지에 건설하였다. 한야(漢冶)[13]에는 한야철창과 한야평매철창광공사가 세워졌는데, 후에 이것이 중국 최초의 철강 콤비나트인 한야평매철창광공사[14]가 되었다.

중국 최초의 철도는 1881년 6월 9일 당산에서 석탄 산지 서각장[15]으로 이어지는 9.7km 구간의 철도였다.[16] 하지만 아직 외국 자본의 손이 많이 들어간 일이었다. 1881년에는 북경과 천진 사이 전신이 개통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외국인이 연해부에 전보망을 개설하지 못하도록 상해에서 광둥성 광주, 저장성 영파, 복건성 복주하문에 전신선을 부설했다. 성선회 등의 관료들이 활약한 시기.

해군의 확장은 계속되어 1881년 여순[17]에 군항이 세워지고, 1882년 '해군아문(해군성)'이 별도의 기관으로 독립했다. 근대적 육군 사관 학교로 천진에 천진무비학당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1884년 이후로는 재정 지원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최소한의 유지비조차 지원받지 못했다고 한다.


2.4. 1890년대[편집]


서태후가 해군 국방비를 빼돌려 이화원 확장공사에 나서면서 청나라의 해군 전함에 나사가 하나둘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정점을 찍어낸 사건인 1894년 ~ 1895년 1년 동안 벌어진 청일전쟁의 여파로 종주국이였던 조선이 일본에 빼앗기고 랴오둥 반도와 대만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후 1896년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을 하기 시작하였고 만주까지 빼앗기는 치욕을 겪게 된다.


3. 실패와 한계점[편집]


근 30년간의 양무운동의 시대는 청나라가 숨을 돌릴 수 있었던 마지막 시대였다. 사실 양무운동은 결코 짧지 않은 계획이었고 성과도 꽤 괜찮았다. 특히 군수를 중심으로 한 산업이 크게 발전하여 이후 중국의 산업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일본에서 일어나던 메이지 유신과 비교되었다. 양무운동이 한창 전개되면서 청의 군사력이 급팽창 하던 시기에는 일본 역시 청과의 대결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었고, 1895년 청일전쟁으로 '체제 대결'에서 패배하고 이홍장이 직례총독과 북양대신에서 해임되면서 끝을 맺게 된다.

양무운동이 흔히 알려진 평가대로 군사력 분야에만 치중된 것은 아니었다. 되려 국방력에 쏟아부은 돈의 비중으로 따지면 메이지 유신이 더 높다. 또 새로운 행정 기관이 도입되고 교육 제도에서도 제법 주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또 강화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주변 조공국들에 대한 패권 유지를 어느 정도 연장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갑신정변이나, 패배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상태는 막을 수 있었던 청불전쟁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근본적인 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소수 관리들의 개혁 정책이라 청조의 시스템은 여전히 구시대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 양무파들이 근본적인 개혁은 놔두고 군사력이나 산업 부분만 개선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여겼고 서양의 제도에 주목했었는데 조정에서 양무파들은 소수였고 보수파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을 진행하기 어려웠다. 보수파들은 양무파들의 활동에 사사건건 비판을 가했고 탄핵하려고도 하여 일본처럼 중앙 정부에서 계획을 짜서 일관성 있게 개혁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3.1. 정책 진행과 실패[편집]


당장 무기와 장비는 그걸 쓰는 사람에 따라서 위력이 천양지차로 벌어지게 되는데, 새로운 무기 체계에 걸맞는 교련과 전술 등의 군사 제도가 제대로 자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대가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군대가 우수한 장비에 비해 쉽게 몰락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과는 달리 청나라 군대의 무기 체계는 전혀 낙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본을 능가하는 부문도 많았다. 경제력이 곧 군사력이라고 거대했던 청나라의 경제 규모가 비록 비효율적이라도 각종 무기의 생산력과 수입에 있어 충분한 질과 양을 갖추고 있었다. 일례로 청나라는 일본도 아직 못 가졌던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2척이나 독일로부터 수입해왔으며, 청일전쟁 당시까지도 일본에는 대형 순양함만 있었을 뿐 전함은 없었다. 대포도 최신식 강철포를 다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훈련 인프라가 충실하게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우수한 장비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실재 교전이 벌어지자 참패했다. 무기는 제대로 갖췄지만 근대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경제력을 갖추기 위해 육성한 기업은 대부분이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을 가진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창업 초기에는 거액의 국가 자금이 투자되고 양무파의 고관이 추천한 관료가 기업을 운영하였으나 후에는 민간으로부터 자본을 모집하여 거액을 투자한 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국가는 이들 상인을 보호 감독하였다. 여기에 투자한 상인은 상하이 등지의 개항장에서 자본을 축적한 대상(大商)들이었다. 관리가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방식의 기업은 거대한 외국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 취약한 중국의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국가로부터 세제상의 특혜와 관문(官物), 관용(官用)에 남품하는 영업독점의 특권을 누리면서 운영되었다. 이는 관료들의 부패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청나라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며, 최소한 당대에는 국방력이 예산을 다 잡아먹는 일본에 비해 유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양무파들도 상대적으로 청렴한 관료였던 것은 사실이다.

'관에서 감독하고 민간이 경영하는' 관독 상판 체제의 문제외에도 가장 큰 문제였던 자금 부족 때문에 기업이 문을 닫거나 경제 공황으로 파산하기도 했으며 경영을 맡은 상인이 공장 경영보다는 가지고 있는 자금으로 투기에 힘을 쏟아 공장 운영이 잘 되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그외에도 이홍장이 설립에 관여한 기기직포국은 1893년에 화재로 공장이 전소되는 등 재해도 있었다.

광산 같은 경우에는 직례성의 개평 탄광처럼 흑자를 많이 내고 계열사까지 거느린 성공적인 사례도 있었지만 초기의 몇 차례는 낙후한 수송 능력으로 실패했고 양무운동 기간 설립한 총 38곳의 광산 중 성공적인 곳은 개평탄광과 막하금광을 비롯한 소수의 광산뿐이었다. 대만의 기륭탄광은 부정부패와 비효율로 유명했을 정도다.

3.2. 내부적인 갈등과 일관성 부족[편집]


청의 근대화가 방향으로 흐를 수 없었던 까닭은 청나라가 서구화 정책을 위임한 한인 대신들, 즉 태평천국 진압의 주도자였던 지방 신사(향족)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거꾸로 국방력에 체계적으로 돈을 안 들여서 망했다라고도 볼 수 있는게 양무운동이다.


3.2.1. 개혁파 내부의 문제[편집]


애초에 자강 운동을 주도한 것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한 한인 대신들이었다. 이러다보니 중앙정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던 이들은 각지 자신의 주요 활동지역에 투자하는 것을 집중했고, 이러다보니 양무운동은 잘 무장된 군벌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막대한 자금이 군대에 흘러들어가면서 말만 정부군이지 사실상 사병의 무장과 장비를 일신한 것이다.

예컨데 이홍장은 영국과 일본의 위협을 강조하며 해군 강화를 주장했지만, 좌종당러시아 제국의 위협을 강조하며 육군 강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의 청나라에게는 영국이나 일본의 해군에 제국이 무너진다는 것보다는 당장 국경을 맞대고 있던 러시아와의 충돌과 실제적인 영토 피해가 더 우려스러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해군 확충은 오히려 늦어졌다.

지역별로 군벌이 나눠진 것도 문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해군은 회군파와 상군파로 나뉘어 통일적인 지휘 계통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므로 1884년에 터진 청불전쟁에서 복건함대가 궤멸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 청일전쟁 때 회군이 일본군에 당할 때 상군 같은 다른 지방의 군대가 상당기간 동안 멍때리고 있는 사태를 만들어냈다. 어쨌거나 양무운동의 결과로 창설된 신군은 북양군벌이 되어 위안스카이가 영도하였으나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가 되려고 난리치다가 호국전쟁으로 퇴갤한 이후 안휘군벌, 직예군벌, 봉천군벌로 분화되어 20세기 초중반의 중국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군사 부문 이외의 분야를 보면, 양무파 관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자신이 총독으로 있는 임지에서 양무에 힘쓰다 임기가 끝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 설립한 공장이나 각종 시설들을 죄다 뜯어서 자신이 부임하게 될 지역에 새로 설치했다. 그러면 원래의 지역은 완전히 기반이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설령 공장이나 시설을 온전히 남겨두고 이임하더라도 새로 부임할 총독이 보수파라면 양무운동의 결과물들을 아예 없애버리기도 했다. 또 이홍장, 좌종당, 장지동 같은 이들은 지방에서 양무운동을 벌일 때, 서로 연합하지 않고 각자 따로 양무를 했었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양무운동을 이어나가는 것에 큰 장애가 되었다.

이홍장이나 좌종당, 풍계분 등은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양무운동을 통해 군사와 산업 전반에 걸친 개혁을 추구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은 문무만이 서양에 뒤지며 오직 총포만이 서양이 앞선다"(이홍장, 1864년)는 발언 등에서 보듯 양무 운동의 방향성은 여러차례 논쟁에 휘말렸으며 그 재정 투자도 일관되게 이뤄지지 못했다.


3.2.2. 보수파의 굳건함[편집]


양무파들은 청 제국 권력의 핵심인 조정에서 소수였다. 당시 청나라는 이념적으로는 천자를 중심으로 한 확고한 중앙집권체제 였으며, 실질적으로는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보수 성리학자들이 주도했다. 이는 만주 귀족 뿐만 아니라 향촌 사회를 장악한 한인 문인들도 마찬가지 였다. 한인도 만주인도 아닌 몽골 팔기인인 왜인(倭仁)[18] 조차 차라리 양이들에게 더 침략당해 피를 흘리는게 낫지 서양무기를 들여오는 것을 극렬 반대 할 정도 였고 이런 의견이 조정을 주도 했다.이런 상황에서 정말 개혁파들 '동양의 우월한 정신 문명을 바꾸려는 의도가 없음'을 내세우기 위해 중체서용을 내걸었으나 이런식의 무늬만 개혁은 시작부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양무운동 당시에도 조정의 대다수는 늘 보수파들이 차지했었고 이런 불균형은 양무운동에 장애가 되었다. 청 제국의 최고 실세이자 양무파의 영수였던 공친왕과 이홍장은 늘 이들에게 공격당하고 비판을 받았으며, 양무운동을 지지했던 서태후조차 이들에게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19] 게다가 서태후가 공친왕을 견제한다고 보수파와 일시 결탁하는 등, 양무파 내부의 갈등도 심했다. 그리고 서양 열강들과의 전쟁이 끝나고 태평천국, 염군이 진압되어 평화를 되찾자 굳이 양무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식자와 관료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양무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회의까지 제기되어 양무파들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3.3. 총론[편집]


30년간의 근대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청의 자강 운동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는 청일전쟁의 군사적 패배, 대내적으로는 보수파의 구심점 서태후의 건재와 변법자강운동의 실패로 총체적 난국에 들어서게 되고, 결국 의화단의 난신해혁명을 겪으며 안팎으로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청의 근대화 노력은 패전 이후에도 20세기 초, 즉 190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지방의 토착 자본과 지식층을 깨우고 신해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 당장 신해혁명도 당장 늘어나던 철도를 정부와 민간 중 누가 운영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촉발된 것이니 근대화의 성과가 완전하게 부정되기는 어렵다. 군사기술도 서양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대륙의 기상이라고 한번 모방이라도 시작하니 제법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다. 또한 이때 도입된 각종 철도와 기관, 학술정보, 각종 산업기술력 등은 중화민국 때에도 근대화를 앞당기는 촉매가 되었다. 조선도 군사력 증강을 위해 영선사라는 군사기술단을 파견하여 기술을 배워오기도 했다.

중화제국으로서의 청나라에게는 자체적 모순을 가진 실패한 근대화였다고 평할 수 있다. 문제는 양무운동이 막대한 세금을 필요로 했고 무엇보다 지배 계급이었던 만주족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았다. 신해혁명이 닥치자 만주족이 한족에게 학살당했을 정도다. 일관성의 부족 또한 병크까진 아니었다. 사실 중국과 유럽을 비교해 보면 근대적 요소가 많이 나타난 만큼 어디를 손대야 할지 몰랐던 것이 더 정확하다. 그래도 이렇게 중구난방으로나마 일찌감치 근대화를 시작한 덕에 여러 반동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영토를 뺏길지언정 전토를 서양에게 난도질당하는 것만은 면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실패했다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4. 관련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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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이 구호가 정식으로 나오는건 1895년의 일이다.[2] 자강운동의 내용은 무기와 장비, 군사 시설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알려져있으나,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시작은 교육 기관이었다. 양무도 양무(養武; 무력을 기름)이 아니라 서양의 문물을 배운다는 의미의 양무(洋務)인 것이다.[3] 약칭 동문관. 이후 경사대학당에 흡수되고 경사대학당은 베이징대학으로 이름이 바뀐다.[4] 유감스럽게도 중도에 조정에 마찰을 빚어 2회로 끝났으며 몇몇 유학생들은 중간 귀국했고 그마저 교육을 이수한 학생들조차 청불전쟁청일전쟁에서 전사한다.[5] 1863년 소주에 세워진 소주양포국의 후신. 1885년 청불전쟁으로 폐지.[6] 금릉은 남경의 옛 이름.[7]하북성, 산둥성, 요녕성[8] 軍火機器總局, 이후 북양기기국(北洋機器局)으로 바뀌었다.[9] 1875년에 세워진 대만기륭탄광이 대표적이다.[10]카이핑구[11]모허시[12]다예시[13]우한시 한양구[14] 약칭 한야평 공사[15] 현 쉬거좡진[16] 이후 이 철도가 천진까지 이어진다.[17]뤼순[18] 몽고 정홍기 출신 문화전 대학사[19] 1870년대초에 열강으로부터 철도, 전신선 건설 사업을 제의받았던 이홍장은 양궁(兩宮. 서태후와 동태후를 이르는 말)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부했다. 중앙의 보수파와 지방의 신사들이 철도와 전신선이 중국의 풍수를 해치고 용맥을 끊는다는 이유로 극렬하게 반대했으며 일반 대중들의 시선도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홍장은 풍수를 해치지 않는 해저 전신선만을 겨우 건설할 수 있었으며 이조차도 반대가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