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준혁 (문단 편집) === 은퇴 후 진로 === 프로야구 은퇴 후 현재는 야구해설가, 인기 강사, 예능인, 사업가, 유튜버로 활발히 활동중이다. 은퇴하면 야구장을 짓고 싶다고 했다. 허구연 필드에 이은 양준혁 필드가 나오길... 은퇴 선언 후 실제로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2군데 정도로 후보가 압축된 듯. 남자의 자격에서 직접 꿈의 구장 모형을 만들어 소개하기도 했다. 후배들을 성심껏 지도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 지도자로서도 대성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다할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지 않고 방송 활동을 하다 자취를 감추어 [[코치(스포츠)|코치]]와 [[감독]]이 될 수 있을지는 불분명. [youtube(6F5f4Vg1HGo)] 2010년 플레이오프는 덕아웃에서 지켜봤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미디어데이에서 문제가 되어 덕아웃에서 퇴장. 하지만 4차전 도중에 난입(?!)해서 선수들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트위터 문제도 그렇고 왠지 은퇴 후의 행적이 순탄치만은 않아보인다. 지도자의 길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하다. 자신이 감독이 된다면 어떻게 해보고 싶냐는 질문에 [[김성근]] 감독과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스타일을 섞은 야구를 해보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2011년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양키스]] 구단으로 연수 예정이었으나 사전 언론 노출 관계로 계속 일정이 지연되다가 본인이 고사했다. 대신 과거 [[선수협]]에 같이 참여했었던 [[김재현(1975)|김재현]]이 간다.(LA 다저스 산하 싱글A 쪽으로) 2010년 10월 24일에는 대전 갑천의 잔디구장에서 제1회 '양준혁 전국 청소년 야구 대축제'를 개최하였다. 야구선수의 이름을 딴 야구 대회로는 한국 최초. 1천여 명 55개 팀이 참가했으며 구장만 13개를 대여한 엄청난 규모였다. 경비만 약 5천만 원 들었다고 하는데 양준혁은 이 비용을 '''사비로 지출했다.''' 본인 말로는 이 대회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양준혁은 이때를 기점으로 지도자의 길을 일단 접고, 재단 사업을 시작한다. 2011년 7월 30일 2회 대회 개최. 이때 삼성에서 코치 제의를 받은바가 있지만, 코치 업무도 중요하지만 유소년 야구 육성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삼성의 코치 제의를 거절했다고.[[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130575|#]] 또한 은퇴 후에도 [[삼성 라이온즈]] 팀에 대한 조언을 꼬박꼬박 해주는 모양. 실제로 [[2012년]] 초반 삼성이 극도로 부진하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08/2012050801057.html|삼성 타자들의 눈빛이 죽어있고 야구를 너무 쉽게 보는 거 같다]]는 비판적인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5월까지 '''5할''' 못 맞추면 선두권으로 올라가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5할을 실제로 맞췄다]]. 은퇴 무렵 [[김성근]]의 권유로 [[SK 와이번스]]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뻔했다. 본인도 현역 생활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으나 삼성에서 은퇴하는게 본인에게 더 맞는 결정이라는 생각과 야구재단과 멘토리 야구단을 위해 고사했다고 한다. 후의 일로 [[김응용]]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복귀했을때 지도자 복귀 의향을 전한게 양준혁 본인이었고 한화로부터 수석코치 제안까지 받았으나 재단 관련 일이 너무 많아 고사했다고 한다.(재단 관련은 아래 문단에 서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