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탄일성 (문단 편집) == ICBM 개발 == 중국의 ICBM개발은 위의 [[첸쉐썬]] 박사의 귀국과 함께 소련과 유도탄 라이센스 협정을 맺으면서 시작된다. 소련은 이미 대륙간 탄도탄급인 [[R-7]]을 보유하고 있었고, 중국은 당시 소련의 외교방침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었지만, 전략무기인 R-7을 제공하지는 않고, [[V2]]의 단순복제형인 R-1과 이의 사정거리만을 늘린 R-2를 제안했다. 미사일을 포함한 전투기, 구축함, 잠수함에 대한 광범위한 라이센스 계약이 체결되자 소련은 총 1400여명의 기술진을 파견하였고, 이들 중 미사일 전문가는 100여명이었다. 중국은 소련의 [[설계국]]을 모방한 여러 "연구원"을 설립하였고, 첸쉐썬 박사는 탄도 미사일만을 담당하는 제5연구원의 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기반기술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기술흡수가 매우 미진하였다. 기초적인 기계제작 기술마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장장이들이 무기제작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소련 측은 계약과는 무관한 용접기술이나 공작기계 취급법까지 전수해야 했다. 하지만 [[흐루쇼프]] 서기장이 집권하면서 공산주의의 세계혁명론을 수정,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를 반대했고, 이렇게 중국과 소련의 사이가 점점 나빠짐에 따라서 소련의 기술 전수는 무성의해지고, 특히 핵심 기술에 관련된 문서는 절대로 중국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이가 흔들리던 중국과 소련은 1960년 [[중소결렬|완전히 결렬]]되었고, 중국에서 기술개발을 돕던 소련 기술진은 모두 소련으로 돌아갔다. 중국측에 남겨진 것은 첸쉐썬 박사를 비롯해 [[국공내전]] 이전에 미국-유럽에서 공부한 석박사급 인재 100여명, 소련에서 수입한 R-2 시제품 및 소련인들이 귀환하면서 미처 파기하지 못한 문건들, 그리고 소련에서 공부를 마쳤거나 혹은 재학중 송환된 젊은 인재들이었다. 첸쉐썬 박사는 한편으로는 미사일 기술 인재들을 기르면서 한편으로는 소련의 기술고문단이 지도하던 복제작업을 독자적으로 감독했다. 첸쉐썬팀은 1960년 11월 [[내몽골]]에 위치한 [[주취안 우주기지]]에서 R-2 복제형인 [[둥펑]](DF)-1의 발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하지만 약 1000km의 사정거리만을 갖는 DF-1은 전술적인 가치밖에 없었기 때문에, 중국은 좀 더 늘어난 사정거리를 보유한 미사일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번에는 카피할만한 원본을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순수히 중국 기술진이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하고 제작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유 모델을 개발하는 것은 단순 복제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몇년간 큰 어려움을 겪었다.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DF-2는 일본을 사정거리로 두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으나 계속 실패했다. 첸쉐썬 박사는 몇년간 베이징 자택에도 돌아오지 않고 주취안에 상주하면서 미사일 개발을 감독할 정도였다. 5년간의 실패 끝에 DF-2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한 개량형 DF-2A는 1965년 발사에 성공했으며, 여기에 막 개발된 중국의 핵폭탄을 탑재하여 발사하는 실험도 성공하였다. 이 실험 성공으로 [[첸쉐썬]] 박사는 일약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특히 "첸박사가 미국에서 연구하면서 얻은 지식은 이미 구식이기 때문에 별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며 첸을 중국으로 추방한 미국 관계자들이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1966년부터 벌어진 [[문화대혁명]] 때문에 중국의 여러 연구기관은 타격을 입었고, 제5연구원도 홍위병 직원들이 난동을 벌여서 원장이었던 첸쉐썬이 2주간 물러나고 홍위병이 접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개입하여 홍위병의 접수는 진압되고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여러 차질을 빚기는 했지만, 중국정부는 안보를 위해서 (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홍위병의 습격대상이 될 수 있는 여러 과학자들에게 보디가드를 붙여주었을 정도였다. 첸쉐썬 박사는 DF-2를 개량한 [[동방홍]] 로켓을 개발, 동방홍 위성을 띄워서 중국이 [[스페이스 클럽]]에 세계 5번째로 가입하게 하는 대업적을 이뤘다. 사실 동방홍 위성은 프로파간다용이었고, 실제로 중국은 [[모스크바]]와 [[워싱턴 D.C.]]를 때릴 수 있는 DF-5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첸쉐썬 박사는 [[4인방]]을 지지하고, (4인방이 싫어하던) [[덩샤오핑]] 주석 인맥인 제2포병 사령관 [[장아이핑]]을 디스하다가 1970년대 후반 4인방이 몰락하자 제5 연구원에서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 때쯤 되면 중국은 첸쉐썬 박사급의 인재들이 여러 명[* 중국 우주개발 4걸이라고 불리는 [[투서우어]] 박사, [[런신민]] 박사, [[황웨이루]] 박사, [[량서우반]] 박사는 모두 중화민국 시절 미국에 유학한 인재들이며 첸쉐썬 박사 보다 5세 정도 어린 인물들이었다.]인데다가, 첸쉐썬 박사가 이미 수백여명의 인재들을 길러냈기 때문에, 미사일 개발에 차질을 빚지는 않았으며, 1980년 주취안에서 발사한 ICBM이 태평양 공해에 착지하는 실험을 완료하고 세계에서 세번째로 ICBM클럽에 가입했다. 이 ICBM은 DF-5라는 이름으로 1981년 실전 배치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