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문덕 (문단 편집) === 만년의 실수 === 그는 만년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경정(景定) 4년(1263년) 7월, [[유정(원나라)|유정]]이 쿠빌라이에게 남송을 정벌할 계책을 바치고[* 남송을 치려면 양양을 쳐야 한다고 하였다.] 양양성 밖에 의석장을 설치하여 군사행동을 엄호하였다. 그는 또 여문덕을 회유할 수 있다고 했다. 몽골이 여문덕에게 옥대를 건네자, 그는 뜻밖에도 논설위원장에 동의했다. 몽골인들은 또 "남인(南人)의 무신(無信)"을 핑계로 성벽을 쌓고 그 화물을 보호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몽골 사람들이 득세한 것을 보고 불쾌해하며 동의하지 않자, "장래의 성취를 논하는 것은 나의 이익이며,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건의가 나왔다.그러자 여문덕은 태도를 바꿔 송 조정에 시장을 개설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문환은 이것이 몽골군의 음모임을 간파하고, 여문덕에게 편지를 두 차례나 보냈으나, 여문덕의 심복에 의해 은폐되었다. 이후 몽골이 백학성에 제2보를 증축하자 여문환은 다시 여문덕에게 호소해 알게 됐고, 여문덕은 깊이 후회했다. >내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구나! 그 뒤 수성을 맡은 여문환은 여문덕에게 사람을 보내 몽군이 녹문을 쌓고 백하 등 진채를 쌓고 양번이 겹겹이 포위되었다고 보고하자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였고, 그로 인해 양번 지역의 지원 및 수비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함순 5년(1269년) 11월 말 여문덕은 벼슬에 나아가 소사(少師)를 특임하고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다. 이때 그는 이미 병이 위중하였고 여문덕은 스스로도 만년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여 같은 해 12월 2일(일설로는 12월 1일)에 졸하였다. 시호는 '무충(武忠)'이며 태부(太夫)에 추증되었고 덕우 원년(1275년) 12월, '화의군왕'으로 추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