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문덕 (문단 편집) == 평가 == * <송사>에서 간신이라는 오명이 남은 [[가사도]]와 함께, 후대에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 명대에는 양양의 화는 여씨 일족이 자초한 것이니 멸족당해도 싸다는 평을 받았다. * [[남송]] 시기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 남송 항몽의 중추적 기둥이었지만,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 당시 '[[석숭]]이 다 뭐냐'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 자신의 일족들과 동향인들을 대거 기용하여 거대한 군사집단을 형성하였는데, 가문의 이익을 국익보다 우선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가군은 남송 정부의 장기적인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씨 군사 집단은 몽골 침략에 저항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여문환의 항복 이후 대부분이 여문환의 권유로 싸우지도 않고 원에 투항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여문덕의 아들인 [[여사기]], 여문덕의 사위 [[범문호]], 여문덕과 동향인 [[하귀]] 등. 여문환은 1273년 [[양양 공방전]]에서 버틸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결국 원에 투항하고 말았고 여사기는 여문환 투항 뒤 바얀의 공격 때 투항. 범문호는 안경부에서 원나라의 군대와 싸우지도 않고 투항했으며 하귀는 악주에서의 패배 이후 [[정가주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회서로 도망쳤으며, 남송 정부가 항복하였던 1276년 회서를 바치고 투항한다.] * 여문덕은 [[가사도]]에게 아첨하여 다른 사람들을 따돌리기를 좋아했다. 특히 1261년 남송의 또 다른 명장 [[유정(원나라)|유정]][* 북방 한인 출신이었다. [[금나라]]가 몽골군의 침공을 받았을 때 남송에 투항하였다. 이존효와 같다는 평을 받았고, 맹공의 수하였다.]이 여문덕의 무시와 암해로 인해 자신이 지키던 노주[* 사천성 루저우 시]를 바치고 몽골군에 투항함으로써 남송 정부에 엄청난 손실을 주었다.[* 비록 노주는 나중에 여문덕이 탈환하지만 유정의 투항은 몽골군이 수군을 육성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남송에 큰 손실 내지 위협을 주었다.] [[분류: 송나라/인물]] [[분류:1269년 사망]][[분류:화이난시 출신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