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춘추전국시대) (문단 편집) == 고조선과의 관계 == [[춘추전국시대]] 때 연은 [[고조선]]과 국경을 마주하며 충돌했다. 연나라 자체의 기록이 소략하고, 고조선의 기록 또한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갈등관계가 어떤 양상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기는 힘드나 충돌 자체는 [[고죽국]]이 멸망한 이후로부터 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기원전 323년 천자국인 주나라가 약해지자 연의 37대 국군인 [[연역왕|희퇴]]가 스스로 왕(王)을 칭하고 국경 근처의 고조선을 치려 하였고, 이 시기 고조선을 다스리던 [[조선왕 1세|조선후]] 역시 비슷한 시기 왕을 칭하였다. 당시 조선후도 연나라를 치려 하였으나 신하 [[대부례]]가 간언하여 양 측은 군대를 물리고 화해를 하였다. 이후 서기전 4세기~3세기 초 연 장수 [[진개]]가 이천 리 정도의 영토를 조선으로부터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고조선 중심지가 [[랴오닝]] 일대에서 [[청천강]] - [[대동강]]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고고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이 시기에 요서와 요동에서 예맥계 문화 자체가 극적으로 퇴조하고, 요동 절반 지역인 천산 산맥 이서 지역은 연나라가 직접 지배한 반면 천산 산맥 이동에서 청천강까지는 예맥 계열 토착 세력이 여전히 세력은 유지하지만 주요 거점에서는 연나라의 영향력이 강하게 보이면서 예맥계 수장 세력들을 통제하는 게 나타난다. 단, 고조선이 영유하고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 요동 동부 변경 지대는 영유하지 못했는데 이 일대의 고조선 잔민들이 바로, 훗날 서한-신 제국에게 맥족으로 알려지게 되는[* 간단히 말해 고구려인들의 선조다.] 사람들이다. 이 시기에 전과 같이 살던 고조선인들이 훗날 부여에서 남하하는 집단과 연합하여 요동 동부 집단인 고구려가 되고, 청천강 이동으로 물러나서 나라를 유지한 고조선은 위만 조선에 이르게 된다. 즉 그전까지는 [[고구려]]인들의 조상이 고조선의 요동 동부 지역을 구성하는 고조선인들로서 살았으나, 연나라가 고조선을 요서와 요동에서 밀어내는 바람에 요동 동부 지역은 고조선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월경지가 된다. 그 이후로는 고조선도 연나라도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공백지가 되면서, 고구려의 시초가 형성되는 것이다. 한편 역시 이 시기에 연나라의 정복을 피해 도망친 예맥인들이 가깝게는 경기도부터 멀게는 경상전라 남해안까지 곳곳에 퍼지면서 진국의 원형을 형성하게 된다. 훗날 [[한성백제]], [[건마국]]을 구성하는 집단의 일부, [[사로국]]을 구성하는 집단의 일부도 이 시기에 고조선 지역에서 내려온 걸로 판명되고 있다.[* 이후로도 고조선 준왕의 남하, [[역계경]]의 남하 등, 북쪽에서 한반도 중남부 지방으로의 인구 유입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 체제로 봐선 하나였다가 갈라진 걸로 보긴 어렵지만, 그 시원의 뿌리이자 서로 갈라진 계기를 논한다면 결국 전국연에게 패배하기 이전 요서, 요동, 평안도 일대에 자리한 고조선이 된다. 역사적인 기록은 진개의 정벌 외엔 없으나, 고고학적으로는 요서, 요동, 서북한 등지에서 훗날 조선의 [[4군 6진]] 개척처럼 고조선과의 충돌이나 흡수 과정 등이 있었을 것으로 유력하게 추측된다. 즉 연나라가 처음 개척될 즈음에는 요서는 물론이고 춘추연의 국도인 계(지금의 북경) 주변에도 이런저런 이민족들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지만, 이후 우선은 계 주변에서 한족 유물이 많아지는 것과 동시에 이민족들의 물질 자료는 퇴조한다. 시간이 흐르면 요서 일대에서 유력했던 예족 물질 자료가 퇴조하고 중원계 유물 자료가 많아지며, 이런 흐름은 계속 요동에서 서북한까지 진전된다. 고고학에 입각해 연나라의 세력 형성을 뒤따라가보면 하북에서 시작해서 요서와 요동으로 전진하는 과정으로, 이 와중에 하북을 기점으로 동쪽으로의 확장이 한동안 멈춰지는데 이는 요서에 있었던 고조선이 동남부로의 확장을 진행하면서, 요동과 한반도 북부의 부족들을 흡수하고, 제나라와 북방 민족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력을 키워나가며 연나라에게 맞선 것으로 해석된다. 이마저도 기원전 3세기 초반에 진개의 정복 활동으로 요녕성 전역이 연나라의 통치하에 들어왔고 고조선은 멸망할 당시까지도 요서와 요동 상당수 지역을 수복하는데 실패했다.[* 단, 연나라가 예족을 포함한 주변 이민족을 동화시키는 흐름은 요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천산산맥에서 멈추게 된다. 연나라가 청천강 일대까지 영역으로 손에 넣었으나 직접 지배는 천산산맥 이서까지만 할 수 있었고, 천산산맥 이동에서 청천강 일대까지는 간접 지배했다. 시간이 흐르면 이 지역까지 직접 지배화했겠지만 그럴 수 있기 전에 중원의 조나라, 제나라에게 발목을 계속 붙잡혔고, 그러다 진시황의 진나라에게 망했기에 연나라의 동진은 그 시점에서 멈추게 된다.][* 이와 다르게 고조선 후기에 고조선이 요동 대부분을 수복했다는 주장도 있다. 진한 교체기에 요동이 혼란한 틈을 타 고조선이 요하 부근의 혼하까지 진출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천산산맥에서 청천강까지는 연나라 땅이 아니라 고조선의 영역이 된다. 이 학설은 현재 국내 학계에서 꽤 유력한 설로 취급받고 있다.] 이 가설이 만약 사실이라면 한민족의 원류는 원래 요서에서 생활하다가 점차 밀려나가 요동을 거쳐 한반도까지 밀려나갔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교류와 다툼을 겪었을 것이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는 다른 어떤 중원 국가보다도 초기 한민족 형성과 많은 관련을 주고받은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연왕 희]]가 요동을 넘어 [[압록강]]까지 도주하려다 실패하고 [[이신(전국시대)|이신]]에게 붙잡혔다는 기록이 있다. 후기 조선 수도가 [[평양]]이었기에, 연이 멸망하자 조선으로 도망치려던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이외에도 한고조 유방의 부하 [[노관]]이 북쪽으로 달아날 때 연나라 유민 출신인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는 일도 있었다. 연은 나라가 멸망하면서 많은 연나라 피난민들이 고조선으로 이주했고, 이후 [[초한쟁패]] 시절을 거치면서 더더욱 많은 연나라 인구가 조선에 유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