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옹진군(황해남도) (문단 편집) == 역사 == [[통일신라]]에서 [[한산주]]에 소속시키고 고을 이름을 옹천(甕遷)이라 이름붙였다. [[고려]]에서 현재 쓰이는 옹진으로 바꾸었다. 본래 이 지역에 독을 엎어 놓은 듯한 나루가 있다고 해서 고유어로 독나루라고 불리던 것이 [[한자]]로 훈차되면서 옹진, 즉 독 옹(甕), 나루 진(津)으로 된 것 이다. 옹진반도의 대부분은 [[삼팔선|38선]] 이남에 있어서, 광복 이후 [[6.25 전쟁]] 이전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남한령이었다. 38선 분할로 인해 옹진군 교정면, 가천면 대부분[* 38선 이남에 남은 나머지 지역은 각각 서면과 북면에 편입시켰다.], 옹진읍 극히 일부 지역이 북한령이 된 대신, 38선 이남에 있던 [[벽성군]] 해남면, 동강면, 송림면([[연평도]] 포함)[* 이 밖에도 38선 이남에 위치한 벽성군 월록면과 대거면 일부 지역은 옹진읍에, 가좌면 일부 지역은 부민면에 편입시켰다.], 장연군 백령면([[백령도]], 대청도, 소청도)을 더하여, 옹진읍 온천리에 있었던 옹진군청에서 관할하였다. 또한 옹진군과 [[연백군]]을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그러나 [[월경지|바다로 남한 타 지역과 분리되어 있어]] 옹진반도는 사실상 섬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남한 본토와의 연락은 서울(당시 김포군) [[김포비행장]]~옹진 간 부정기 공로(空路) 및 인천~옹진 부포 간 부포항로가 있었다. 참고로 1950년 3월 신문기사에서는 옹진군의 인구를 '18만 군민'으로 표현하였다. 사실상 섬과 같아졌던 이런 문제 때문에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38도선을 행정구역별로 재조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황해도]]는 [[소련군정]]에, [[경기도]]는 [[미군정]]에 이양하자는 것이다.[* 한국전쟁: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정병준, 돌베개. 171~174페이지] 이것이 성사됐다면 [[개성시]] [[송악산]] 이북 지역과 [[장단군]], [[연천군]] 전역은 남한으로, 그리고 [[서해 5도]]를 포함한 옹진은 북한으로 넘어가는 셈이이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만약 실현되었다면 개성 시가지를 방어하는 배후지는 차지할 수 있었겠지만, 서해 5도가 전쟁 중 인천의 방벽이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1949년 6월에 38선 일대에서 북한의 대규모 공격이 있기도 했었다. 결국 [[6.25 전쟁]] 당시 [[옹진반도 전투]]로 북한에 점령되었고 휴전 협정 이후 [[서해 5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완전히 북한 치하로 넘어갔으며 서해 5도는 [[옹진군]] 소속으로 남았고 군청 역시 인천으로 옮겼다.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였고 1995년에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옹진고등학교도 부천으로 옮겨 가서, 현재의 [[부천시]] 범박동에 있는 [[시온고등학교]]가 되었으며, 동남면 용호도의 수산학교도 인천으로 옮겨가 현재 [[인천해양과학고등학교]]가 되어 있다. 옹진군이 고향인 실향민들은 개전 초기 [[옹진지구 전투]] 당시 군과 함께 인천으로 피난한 경우가 적지 않다.[* 개전 초기의 급박한 전황에 피난해서 그런지 가장과 장남 정도만 고향을 떠나 피난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인천광역시]]에는 옹진군 출신 및 그 후손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한다. 또한 [[1.4 후퇴]] 당시 [[황해도]]나 [[평안도]]에서 바닷길로 피난한 사람들 역시 옹진군 도서지역에 집결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