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선재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1959년 3월 16일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아버지 왕종진(王宗珍)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우고미(李又古未)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야구부 소속, 즉 야구선수로 지냈는데 야구로 진학을 하려고 하다 보니 중학교를 마산, 부산 등으로 가야 했으나 시골에서 보내기가 힘들었던 탓에 공부 쪽으로 진로를 바꾸려 했다. 그러다 산청중학교 2학년 초에 개교기념일 행사로 축구대회를 했었는데, 당시 체육교사가 축구 잘 하는 몇 명을 눈여겨보고 축구부를 창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축구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동아고등학교]] 입학 후 1학년부터 주전으로 뛰면서 2~3학년때 동아고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1978년 제11회 대통령금배 전국고등학교축구대회에서 [[안양공업고등학교]]를 꺾고 최우수선수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여기에 동아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8년에는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되어 아시아축구대회에서 20년만에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연세대학교]] 진학 후 그에게 예기치 않은 시련이 찾아왔는데 정작 대학 시절에는 2년동안 고작 3경기를 뛴 것이 전부였을 정도로 출전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다. 당시 왕선재는 축구를 그만두려 했으나 연세대 3학년 무렵 감독이 교체되면서 출전 기회를 많이 보장받은 것이 위안이었다. 1983년 [[연세대학교]] 졸업 후 그는 프로 구단으로 입단하는 대신 [[김호]] 감독의 부름을 받아 실업팀인 [[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였는데, 그 해 한일은행은 창단 13년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고 동시에 득점왕까지 선정되는 겹경사를 누렸다. 또한 1984년 싱가포르 아시안컵 예선전 대표팀에도 승선해 파키스탄과의 예선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였으며, 이후 아시안컵 대표팀에도 승선하였으나 단 한 차례도 기용되지 못하였다. 이후 [[FC 서울|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하여 [[포항 스틸러스|포항제철 아톰즈]]와 [[울산 현대|현대 호랑이]]를 거쳤으나 30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