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루과이 (문단 편집) == 역사 == [[스페인]]의 [[아메리카]] 라플라타 강 유역 식민지화 이전 투피-과라니계의 차루아족과 차니족 등의 [[아메리카 원주민]] 종족들이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면서 살던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스페인]]이 이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고, 차루아족들은 스페인군에 거세게 저항하며 맞섰지만 쪽수부터 후달려서 내륙지방으로 계속해서 밀려나갔다.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나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과 접경 지역이라 [[포르투갈]]이 많이 집적거리며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던 지역이다. 스페인의 7년 전쟁으로 잠깐 포르투갈이 점령했었지만 그 후 스페인이 되찾아 계속 스페인의 식민지로 유지되었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의 지배가 무너지면서 우루과이 역시 지금의 [[아르헨티나]]인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의 일원으로 독립하였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합주 정부와 갈등을 빚던 와중 1816년 [[포르투갈]]의 침공으로 강제 합병되었다. 이후 1822년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브라질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브라질의 시스플라티나[* 브라질 포르투갈어로는 시스플라치나겠지만 당시부터 이미 [[스페인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었다. 현재도 [[볼리비아]]에서 빼앗은 아크레 주 등은 스페인어를 쓴다. 그래서 아크레의 대도시 리오블랑코는 히우블랑쿠보다는 리오블랑코로 그대로 불린다.] 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언어와 역사, 문화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과는 판이하게 달랐는지라 브라질의 지배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났으며 이 일대는 독립을 요구하는 우루과이 지역의 스페인계 백인 반란군과 이를 억누르려는 브라질군과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내전 상태로 이어졌다. 1825년 우루과이의 수복을 노리는 아르헨티나로부터 지원을 받은 우루과이 독립운동가들이 시스플라티나의 아르헨티나 재편입을 선포했고, 이에 분노한 브라질이 아르헨티나에게 선전포고하면서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전쟁]]이 발발했다. 결국 1828년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사실상 브라질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우루과이는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이뤄냈다. 그래서인지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를 자국의 은인으로 여기며 양국은 영구혈맹국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양 도시 모두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계 이민자들이 주류였기에 비슷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미국]] - [[캐나다]] 관계 및 [[호주]] - [[뉴질랜드]] 관계와 비슷하다.] Rioplatense 지방에 속하는 유일한 두 나라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이기때문에 사용하는 방언 역시 리오플라텐세 스페인어[* Castellano rioplatense(카스테샤노 리오플라텐세). 스페인식 스페인어로 읽는다면 "카스테야노 리오플라텐세".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의 영향인지 스페인어임에도 나폴리 방언의 억양이 특징적이다.]로 동일하다. 1849년에는 우루과이 최초의 대학인 공화국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알고 보면 [[포르투갈]]의 식민지의 식민지였던 해괴한 이력을 가진 나라가 우루과이다. 그런즉 우루과이는 포르투갈의 2차 식민지였고 포르투갈과 우루과이 사이에는 브라질이 있었다. 정확히는 포르투갈 왕실이 피신한 포르투갈령 브라질 제국의 땅이었던 것.[* 7년 전쟁 때 잠깐 포르투갈이 북쪽을 먹었다 나중에 스페인에 돌려주었다. 정식으로 브라질 땅이 된 건 브라질 제국 때 일이다.] 그래서 리오플라텐세 스페인어 외에도 Portuñol (포르투뇰)이라는 포르투갈어-스페인어 [[크레올]]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하튼 20세기 초반에 농업과 축산업 등 1차 산업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해 옆나라인 아르헨티나와 함께 남미에서 경제적으로 잘 사는 국가로 분류되기도 했었고, [[제1차 세계 대전]]때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1930년대]]에 [[세계 대공황]]으로 한바탕 휘청거렸으며[* 물론 그 와중에 첫 FIFA 월드컵 대회를 자국에서 처음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초기엔 중립을 고수했다가[* 우루과이는 1930년대 가브리엘 테라의 쿠데타로 인한 독재정권 수립 이후 2차 세계 대전 초기까지는 친독적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진주만 사태 이후 미국이 연합국에 참전하고 나서는 친 연합국 스탠스로 전환하였다.] 전세가 완전히 기운 1945년 2월에야 연합군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1940년 독일 해군의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인 그라프 쉬페가 남대서양에서 영국 해군과 교전을 벌인 후 몬테비데오 항에 피항한 적이 있다. 이 때 그라프 쉬페를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독일, 그라프 쉬페를 몬테비데오에 묶어두어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영국, 그리고 중립 노선을 고수하는 우루과이 간의 치열한 외교전이 진행되었다. 결국 그라프 쉬페는 자침, 함장인 랑스도르프는 자살했고 승조원들은 우루과이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억류되었다. [[1954년]]부터 [[1967년]]까지는 대통령제를 없애고 [[스위스]]의 연방평의회[* 스위스 연방평의회(Bundesrat)는 직선으로 7명을 선출하며, 이 중에서 연방의회가 1년 임기의 대통령·부통령으로 한 명씩을 선출한다.]를 본따 9명으로 '정부 국가평의회' 제도를 실시해 직접 민주제와 근접한 정치 체제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결속력 약화와 여러가지 단점들이 초래되면서[* 이 당시 우루과이의 '정부 국가평의회 제도'는 이웃 주변국가들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페루, 에콰도르, 칠레, 과테말라, 멕시코 등 비슷한 시기(1950년대, 1960년대)에 대통령제를 운영하던 다른 중남미의 국가들에서도 비판할 정도였다.] 1967년에 다시 도로 대통령제로 개헌하고 말았다. [[1980년대]]의 군부 독재나 그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민주 투쟁 등 [[대한민국]]과 비슷한 점이다. 독립을 하기 위해 망명정부를 세운 요인의 숫자까지 33명으로 똑같다. 그리고 대통령 임기도 5년 단임제다.[* [[1985년]] 민정이양 이후부터. 다만 한국과 달리 전 대통령이 퇴임한 직후에 대선 재출마도 가능한데, 실제로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Julio María Sanguinetti)가 [[1985년]]~[[1990년]], [[1995년]]~[[2000년]]에 대통령을 지냈다.] 게다가 한국의 맨 반대편에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여수시]]에서 직선으로 파고들어가면 몬데비데오의 앞바다가 나온다. 심지어 컬러 텔레비전 방송 시작한 시기도 [[1980년]] 12월로 한국이랑 동갑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차이가 많이 나게 되었는데 [[1990년대]] 후반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경제가 막장화되면서 같이 막장테크를 탔고 거기에다가 [[2001년]]에 [[구제역]]까지 돌면서 우루과이산 축산물의 수출이 크게 격감하는 바람에 우루과이의 경제도 개판이 되었다. 그로 인해서 [[2004년]] 대선에서 바스케스가 당선되면서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로 좌파가 집권했고 그 동안 소흘히 했었던 복지를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이후 [[2000년대]] 세계 경제 호황으로 우루과이도 경제도 호황세를 누렸다. [[2009년]]에는 [[호세 무히카]]가 당선되었다. 당선 후인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대통령인 호세 무히카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대통령 재임기간이던 [[2012년]] 겨울에 추위가 오자 대통령 관저를 개방해 노숙자들을 관저에서 묵게 하는 파격적인 면모를 보였다. 대통령궁은 인민의 재산이라면서. 2013년 들어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뿐만 아니라 마약류의 일종인 [[대마초]]도 합법화하여 전세계 많은 나라들이 우루과이의 대마초관련 정책에 관심을 가져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많다. 한편 2014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광역전선의 유리함이 예측되었으나 선거 중반 들어서 예상외로 국민당 후보가 치고올라오면서 접전이 에측되고 있는 중. 10월 26일 선거에서 광역전선(좌파)의 바스케스가 49.5%, 국민당의 라카예가 32%를 득표하여 11월 30일 결선투표를 진행하였고 타바레 바스케스가 당선되어 홀리오 산기네티 이후 민주화 시대의 2번째로 두 번 임기를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으며, 현재 전 대통령인 호세 무히카는 5년의 정권을 유지하여 퇴임 직후 같은 당인 타바레 바스케스에게 이양하여 지금도 광역전선이 [[여당]]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경기침체의 영향을 받아서 지지율이 30%대로 크게 떨어져서 집권 1기때에 비해서 인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다. 허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우파로 정권이 교체된 후에도 경제나 정치상황이 영 메롱인지라 2019년 대선에서도 광역전선의 정권재창출이 예상되고 있었는데, 야권의 결집으로 1차 대선에서 과반 득표에 실패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173519|#]] 2차 결선에서 야권의 결집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에 들어맞아 1% 차이로 [[루이스 라카예 포우]] 국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235447|#]] 다만 1차 투표에서는 마르티네스 후보가 40.4%, 세 야권 후보가 54.0%를 득표해 10%p차 이상으로 앞섰기 때문에 라카예 포우 후보의 당선이 유력하긴 했으나, 실제 결선에서는 여권 쪽 역시 결집하면서 라카예 포우 50% 대 마르티네스 49%라는 근소한 차이의 결과가 나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